본문 바로가기

세계일주/러시아

러시아 타타르스탄 헬프엑스: 장아찌 단지 비우기 (여행 45-46일째)

2016년 9월 1일 러시아 연방, 타타르스탄 공화국, 슈키예보(Сюкеево)
아침부터 비오고 오후에는 구름 많음. 러시아 새학기 시작날


[등장인물]

보바(블라디미르): 헬프엑스(Helpx) 호스트. 일본 담배 회사 영업 사원. 올가의 남편.

올가(올렌카):헬프엑스(Helpx) 호스트. 가정 주부. 블라디미르의 아내.


1. 블라디미르는 회사에 가지 않고(목요일인데?) 집 내부에 벽 만드는 작업을 하고, 나는 주방에서 호박갈기, 감자썰기, 비트갈기와 야채 팬케이크 튀기기를 한다. 주방 일이 다 끝나고 나서는 블라디미르가 작업하는 것을 구경한다. 지난번 카잔(Kazan, 타타르스탄의 수도)의 건축자재 마트(각종 공구 및 건축 재료 등을 판매하는 곳)에서 구입해 온 금속 틀을 길이와 균형을 맞춰서 설치한다. 이 틀을 설치하면 여기에 맞춰서 합판이나 석고보드 등으로 벽면을 세우는 것 같은데, 작업 진행 상황이 매우 느리다. 그래도 성실하게, 그리고 언제나 쾌활하게 작업하는 보바. 


오후에는 다시 사포질 명상에 들어간다.


2. 여행 루트를 짜는게 고민이다. 러시아에서 육로로 빠져 나가는 루트로 '모스크바 - 리가(라트비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 탈린(에스토니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모두 쉥겐 조약에 들어가는 국가이기 때문에, 일단 들어가서 계속 육로를 따라가면 유럽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벨라루스를 통해 유럽으로 가는 길은 비자 때문에 막혀있고, 우크라이나는 내전과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위험해 보인다. 러시아에서 조지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어서 비용과 시간이 우려된다.


우크라이나로 들어가면, 쉥겐에 들어가지 않는 동유럽 국가들에서 넉넉하게 체류하다가 쉥겐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가고 싶지만 보바가 TV에 나오는 우크라이나의 내전과 테러에 대한 뉴스 방송을 보여주며, 가지 말라고 권한다.


"나는 우크라이나에 가본 적이 없고 TV로만 본 거니까 우크라이나가 안전한지 아닌지를 확신하지는 못해. 그래도 난 걱정이 되니까 네가 우크라이나에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 차라리 터키를 가. 터키는 이제 안전하대. 아니면 러시아의 새로운 영토 크림 반도는 어때? 경치가 끝내준다구. 하하하!"


터키에서는 얼마 전 쿠데타 미수가 있었고, 테러도 여러 번 있었다. 부모님은 우크라이나도 내전 상태라는 것은 모르시고 터키는 절대 가지 말라고만 하셨는데, 러시아에서도 터키 여행을 금지하고 있다가 이제 막 금지령을 해제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은 주류 국제 사회(서방)에서는 비탄받고 있지만, 러시아 사람인 보바는 자랑스러워 한다. 보바는 푸틴의 행동력을 높이 사고 있다.


2016년 9월 2일 러시아 연방, 타타르스탄 공화국, 슈키예보(Сюкеево), 구름 많고 흐림


3. 오늘은 창고 정리를 하는데, 지하 창고에서 몇 년 혹은 몇십 년 묵은 장아찌 단지들이 수십개 나온다. 보바와 올가에게 이 집을 판 할머니가 담아 놓은 거라는데, 정말 많다. 이런 시골 한 구석의 오래된 집 하나에 짱박혀 있는 음식과 책, 갖가지 물건들만 해도 이렇게 많은데, 전세계의 집집마다 창고마다 숨겨져 있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이렇게 공들여 만들어 놓은 저장 음식들이 사람 입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버려지는 모습을 보니, 우리가 열심히 아끼고 모은 돈, 수집품, 평판, 능력 같은 것들도 똑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지도 않을 앞날을 위해 너무 많은 걱정을 하고 너무 많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장아찌 단지들을 하나씩 하나씩 따서 창고 뒷편의 유기물 버리는 곳에 버리고, 유리병을 닦는 것을 수십 회 반복한다. 장아찌 중에는 오이, 토마토, 양파같은 기본적인 채소들도 있지만, 이름 모를 과일로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특히 진한 보랏빛 과일로 만들어진 단지에서는 단 맛이 나는지 쌍살벌들이 무지 모여든다. 유리 단지 속으로 기어들어가 단물을 빨다가 물 세례를 받고 쓸려 나와 풀 위에 앉아 날개를 말리는 쌍살벌들도 있고, 그리고 음식물 버리는 곳에 쌓여있는 과액의 끈적끈적한 단물을 핥다가 다음 단지에서 나오는 음식물에 파묻히는 녀석들도 있다.


4. 유럽에서 3개월을 보낸다고 생각하고 호스텔 가격을 찾아보니 후덜덜이다. 심지어 모로코는 가격이 더 비싸다! 쉥겐 90일 제한이 문제가 아니라 남은 예산이 더 문제였다. 그래도 카우치서핑을 하면서 마트에서 야채랑 빵 같은 걸 사먹으면, 텐트가 없어도 길에서 얼어 죽지는 않겠지. 떠돌이 생활이 힘들면 지금처럼 헬퍼를 다시 하면 되고.


오늘자 고양이


창고 옆 쌓아둔 쓰레기들


사이좋게 풍차형으로 밥먹는 고양이들. Circle of Life


창고에서 나온 비축식량들. 몇 년은 먹을 수 있을 듯 한데, 이걸 다 버렸다.


창고에서 음식 단지들을 다 꺼내고, 저장해 둔 감자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정글이 되어버린 지하 저장고를 정리하는 올가. 일하는 모습이 강인하고 아름답다.


버려진 음식물들. 이걸 벌레들이 다 먹으려면 시간 꽤나 걸리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