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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불가리아

불가리아 식객: 데베타슈카 동굴과 공동묘지 (여행 87일째)

2016년 10월 13일 목요일

불가리아 


[등장인물]

엔젤(블랙 피라냐): 20대 후반-30대초반. 키가 크고 머리가 이마가 약간 벗겨졌다. 가끔씩 광기가 번뜩인다.

마리안: 20대 초반. 덩치가 큰 집주인(카우치서핑에서 만난 로라의 사촌). 폭력적이지만 손님에게는 극도로 친절하다.

벨리자: 근육질의 과묵한 20대 후반 남성. 동물 도살하는 것(돼지, 닭 등)을 좋아한다. 

마리아: 집시 소녀. 아직 학생. 엔젤의 여자친구. 


이동경로: 도이렌치(Doyrentsi) - 로베치(Lovech) - 데바타슈카 동굴(Devetashka Cave) - 도이렌치


1. (아침, 마리안의 집) 바바(할머니)가 옆방으로 와서 마리안과 얘기하는 소리에 나도 잠에서 깼다. 불가리아에서는 시골집들만 다녀서 그런지 화장실 문이 잠기는 곳이 없었는데, 이곳도 그렇다. 심지어 문이 제대로 닫히지도 않아서, 로프를 문고리와 화장실 벽면의 고리에 연결해 어설프게 안전장치를 하고, 옷을 벗어 로프에 건 후, 똥을 싸고 대충 씻는다. 씻고 빨래하는 것이 점점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고, 날씨가 추워져 땀을 흘리지 않으니 점점 더 그렇다. 어제 집시 노인 슈크리 집에 놓고 온 우비를 찾으러 갔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이후로도 몇 번 더 가봤는데 갈때마다 계속 잠겨 있고 동네에서도 슈크리 아저씨는 안보임). 


아침에는 마피아 3인방의 보스인 엔젤은 보이지 않고, 마리안벨리자와 마을회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신다. 험악한 얼굴의 마리안이 어설프면서도 다정한 영어로 "유 원 커피(You want coffee)?"라고 물어본다. 이게 또 다시 얻어먹는 분위기여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커피를 세 개 시켜 갖다준다. 아침 공기가 좀 쌀쌀하지만, 건물 밖의 테이블에서 미약한 와이파이를 잡아 메시지를 확인하며 커피를 마신다. 이번엔 마리안이 "유 헝그리(You hungry)?"라고 물어본다. 괜찮다고 하지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를 하나 사다준다. 그리고 마리안과 벨리자는 레드불 비슷한 에너지 음료를 하나씩 사서 마신다. 이게 좀 헷갈린다. 자신들 아침식사 값을 아끼면서도 나만 이렇게 챙겨주는 건지, 아니면 아침이라 식욕이 없는건지(나중에 가서는 안심하게 되었지만, 이 한나절은 이 마피아 친구들이 나중에 갑자기 돌변하며 돈을 요구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했다). 샌드위치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에스프레소인지 조그만 컵에 진하게 나온다), 마피아 친구들 사이에서 블랙 피라냐라고 불리는 엔젤의 집으로 갔다. 마리만이 집앞에서 이름을 몇번 부르자, 자고 있던 엔젤이 씨익 웃으며 나오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한다. 엔젤의 차키를 받아 차 안에서 마리안과 기다리다가 다같이 차에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마리안의 누나가 사용하던 방에서 묵었다. 깨끗하고 잘 꾸며진 방이다.



마리안네 집 앞뜰.


마리안의 할아버지가 이틀전 돌아가셔서 검은 리본이 대문에 걸려 있다.


슈크리 아저씨 집을 혼자서 찾아와 봤지만 문에는 자물쇠가 걸려있고 집에는 아무도 없는것 같다.


어젯밤 먹고 마신 후 정리가 덜 된 탁자. 고등학교까지 마친 시골 청년들은 직장이 없어 이렇게 먹고, 마시고, 카페에 가서 당구치며 시간을 보낸다.


마을회관 카페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저씨들.


도이렌치의 나뭇잎.


2. 차를 타고 어디에 가나 했더니, 돈을 찾으러 로베치(Lovech)에 간다고 한다. 도이렌치에는 현금을 인출하는 곳도 없나보다. 괜히 나도 돈을 환전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주차비를 아끼려고 도시 외곽의 공터에 주차한 후, 마피아 무리와 시내로 슬슬 걸어가서, 한 샌드위치 가게로 들어갔다. 알수없는 불안감. 얘네들이 정말 마피아(동네 깡패)가 아닐까 하는 걱정과 지금까지 계속 얻어 먹은 것에 대한 미안함에 샌드위치 가게에서는 내가 내겠다고 했지만(가격이 좀 비쌌다), 돈을 못 내게 해서 샌드위치와 음료수(탄산수)까지 얻어 먹었다. 그리고 나서 따로 주문한 케이크가 두 조각 나오는데, 그 중 하나는 마피아 두목인 엔젤이 먹고, 나머지 한 개는 나에게 먹으라고 준다. 이번에도 정말... 애매하다. 뚱뚱한 마리안도 분명 이런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할 것 같은데... 시급이 1달러라는 곳에서 이렇게 얻어먹어도 되나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음료수나 담배에 돈 쓰는 것을 보면 다들 가난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레슬링 선수 같이 생긴 벨리자는 독일에서 3개월 동안 번 수천 유로어치 돈뭉치 사진을 보여줬기 때문에... 정말 모르겠다. 식사가 끝나고 길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거냐고 물어보니 마약 거래상(drug dealer)을 기다린다고 한다. 그래서 마리화나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보니 10레바(5유로)라고 한다. 이렇게 벌건 대낮에 길에서 마약 거래상을 기다려도 괜찮은 건가, 경찰이 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약을 안했으니 괜찮겠지 등 온갖 생각을 하며, 약간의 흥분감과 초조함으로 의문의 드러그 딜러를 기다린다. 알고 보니, 어젯밤에 마리안네 집에서 같이 먹고 마셨던 크리스티앙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는 것을 기다리는 거였다. 크리스티앙은 삐쩍 마르고 키도 작고 나이도 가장 어린 친구다. 크리스티앙은 대마초를 피우기 때문에(엔젤과 벨리자는 피우지 않음) 별명이 드러그 딜러인 모양이었다. 실제로 드러그 딜러일수도 있고... 그리고 다른 장소로 가서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린다. 이번에는 엔젤의 집시 여자친구 마리아였다. 마리아를 기다리는 동안 왠 한국인 남학생이 불가리아 여자 두 명과 장을 보고 돌아오는 걸 만났는데, 잠시 이야기를 나눠보니 선교사 아들이라고 한다. 엔젤 말로는 적어도 5년전부터 로베치에서 봐왔다고 한다.


로베치에서 다음 목적지 소피아까지는 146km.


3. 차를 타고 위험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린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지나가는 차가 거의 없는 나른한 오후의 황홀한 가로수길을 달려 데베타슈카 동굴로 간다. 옆에서 마피아 친구들이 고함치듯 대화하고, 마리아에게 소리치는 것이 왠지 불안하지만, 길 자체는 너무 멋지고, 속도감에 흥분이 된다. 동굴에 도착하니 자기들은 여러번 다녀왔다고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고 하길래, 내가 내주겠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지금까지 얻어 먹은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1인당 입장료가 3레바인줄 알았는데, 지역 주민 가격으로 받는지 아저씨가 1인당 2레바에 표를 끊어준다(5명 합해서 총 7000원 정도). 다리를 건너 동굴로 들어가며, 친구들도 약간 신이 났는지 공룡 소리를 내며 장난을 친다. 통행금지 표시가 되어있는 곳이 많은데, 이 친구들은 마피아라서 그런지 다 무시하고 들어간다. 마리안이랑 작은 동굴의 한 구멍으로 들어가 보는데, 던전에 보물을 찾으러 들어가는 기분이다. 와우(월드오브워크래프트)에 나오는 통곡의 동굴 생각이 나고, 누군가 구글 리뷰에 써 놓은 것처럼 용이 한 마리 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어둠 속에서 통로를 지나자, 빛이 전혀 들어 오지 않고 핸드폰 불빛을 비춰봐도 빛이 빈 공간속으로 빨려들어가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커다란 방이 나온다. 동굴은 어디까지 이어저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다. 나 자신의 손발도 보이지 않는 이런 공간에 있으면 왠지 엄숙하고 조심스러운 기분이 되고, 마리안과 대화를 할 때도 목소리가 낮아진다. 작은 동굴에서 나왔는데, 엔젤이 그 항상 웃고 있는 듯한 얼굴로 "경찰이 기다리고 있어, 나가자"라고 한다. 장난을 치는 건줄 알았는데 정말인가 보다. 다시 다리를 건너 주차장 쪽으로 가보니 경찰차랑 전날의 그 경찰 아저씨들이 있다. 나에게는 별 말을 안하는데 마리안을 데리고 가서 경찰차 안에 태우더니 한참을 뭔가 얘기한다. 난 또 마리안이 마약 문제로 조사를 받는 건 아닌가 했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내가 수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등의 얘기를 했나 보다. 경찰은 돌아갔고, 마리안은 뚱한 표정으로 "퍽 더 폴리스(fuck the police, 망할 경찰 새끼들), 퍽 더 폴리스"만 계속 반복한다. 


그래도 다행히 별 문제는 없었다. 다시 동굴로 들어간다. 엔젤마리안은 할아버지들이 여기에서 일을 했었기 때문에 동굴을 빠삭하게 잘 알고 있다(그래서 더더욱 돈을 내고 들어올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2차대전 당시에는 디젤 운송관, 탱크, 헬리콥터 등을 보호하는 기지로 썼다고 한다. 동굴 위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통해 헬기가 들어올 수 있어 동굴을 자연 방호벽으로 사용한 것이다. 벙커로 사용했던 터도 남아있고, 예전에는 각종 고철이 많았지만 사람들이 조금씩 갖다 팔아먹어서 지금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박쥐 번식기간 때문에 출입 금지 표시가 되어 있는 지역으로 들어간다. 삑삑- 박쥐들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엘젤과 마리안은 할아버지들이 여기서 일할 당시인 어렸을 적, 식량과 음료, 따뜻한 옷 등을 준비해, 동굴 속 호수와 물을 따라서 탐험을 했었다고 한다. 이 동굴은 수십 km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보지만 내부가 너무 어두워 동굴의 웅장함을 담을 수는 없다. 


다리를 건너 동굴로 향한다. 여기서 익스펜더블2(The Expendables 2)라는 영화를 촬영하며 다리를 새로 짓고, 동굴 환경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동굴로 갔다가 경찰을 만나러 주차장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경찰과 얘기하고 있는 엔젤.


경찰을 보내고 다시 동굴로.



이 구멍을 통해 헬기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엄폐했다고 한다.






4. 동굴 탐험을 마치고 도이렌치로 돌아와서는, 아지트인 센터 카페(마을회관 카페)로 갔다. 또 다시 커피를 얻어 마시고, 달콤한 크림이 잔뜩 들어있는 페스츄리 같은 빵을 얻어 먹었다. 마피아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여동생 얘기가 나왔는데, 동생 사진을 보여주니 다들 열성적인 반응을 보이며, 다음에 올 때는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한다. 자기들 중 한명과 결혼하면 여동생도 EU국적을 얻을 수 있으니 이득이라고, 그 후에 이혼을 해도 상관없다고 제안한다(EU시민으로서의 유리함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5. 집시 소녀 마리아의 집에서 엔젤이 소세지, 계란, 콩 요리를 해준다. 엔젤이 마리아에게 종종 심한 장난을 쳐서, 마리아가 놀란 표정으로 눈이 동그레지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이 마리아에게 험악하게 대해도 엔젤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듯 하다. 그러면서 엔젤은 "이 망할년은 담배만 필 줄 알고, 집안일은 하는게 하나도 없어"라며 투덜거린다.


집시 소녀 마리아의 집에서 엔젤이 차려준 저녁식사.


6. 이번에는 차를 타고 공동묘지로 향한다. 이틀 전 돌아가신 마리안의 할아버지를 추모하러 가는 것이다. 프린트한 추모 글을 공동묘지 건물 벽에 붙이고, 마리안은 초에 불을 붙여 할아버지 묘 앞에 놓는다. 엔젤이 공동묘지를 구경시켜 준다. 100년이 지난 구역도 있다. 관리가 되지 않아 황폐해진 묘지와 묘석들도 보인다. 원숭이 섬의 비밀에 나왔던 무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무덤.


공동묘지 입구.



공동묘지 관리실에는 이렇게 추모의 글과 사진이 잔뜩 붙어 있다.


목동 노인 한명이 염소떼를 잔뜩 이끌고 공동묘지 앞을 지나간다.




오래된 묘비.






7. 저녁식사와 공동묘지 방문이 끝난 후에는 어느새인가 다시 카페에 가 있다(마을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과 아저씨들은 다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내는 듯 하다). 동네 청년들이 이렇게 매일 백수건달로 시간을 보낸다. 마을에는 불가리인(백인)들과 집시(롬인)들이 같이 살고 있는데, 집시에 대한 노골적인 야유와 경멸이 놀랍다. 마리안이 가장 심해서, 집시를 볼 때마다 찡그린 얼굴로 "집시, 집시"거리고, 엔젤(블랙 피라냐)가 집시 여자들에게 행동하는 것도 깜짝 놀랄 정도다. 19세기 흑인이나 여성이 받았을 차별과 경멸과 혐오가 눈에 그려진다. 왜 여성인권이나 인종차별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당구와 테이블 축구 게임을 빼면 이 마을에서 또 뭘 할게 있을까(한국도 PC방, 노래방, 술집, 카페, 영화관 등, 테이블 축구와 별 다를 바 없는 오락거리 들로 가득하긴 하다). 밤에는 늦게까지 라키아(rakia)를 마신다. 옆 동네에서 온 친구들도 있다. 84년생인 이 친구는 자신이 윤리적 해커라며 명함을 준다. 영어를 꽤 잘해서 대화를 많이 했다.


마리안은 핸드폰으로 걸레(bitch)들이라며 여자애들 사진을 보여준다. 5유로, 10유로면 된다며 말만 하라고 한다. 엔젤은 한술 더 떠서, "10유로만 내. 그럼 내 여자친구(마리아)는 니꺼야"라며 얼굴에 항상 붙어 있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짓는다. 마피아 친구들이 정말 마피아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한편 말이 없는 벨리자는 숫가락, 칼, 포크, 코르크 따개, 손톱깎이 등 각종 도구로 쓸 수 있는 다용도 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더니, 선물이라며 나에게 준다. 그리고 좀 더 지내다 가면 안되냐고 나에게 묻는다. 이 친구들이... 무엇 때문에 내가 여기에 머무르는 걸 바라는 건가? 고마우면서도... 잘 모르겠다. 앞으로 여자애와 마약 사라는 얘기만 안하면 하루를 더 있겠다고 대답했다.


음식이 안 맞는지, 술을 많이 마셔서 인지 몸에 이상한 반점들이 두둑두둑 나 있고 간지럽다. 엔젤에게 보여주니, 마리안의 집에는 벌레가 없다며, 뭔지 모르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