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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불가리아

불가리아 식객: 가난한 사람들과 권총 (여행 88일째)

2016년 10월 14일 금요일

불가리아. 매우 맑음.


[등장인물]

엔젤(블랙 피라냐): 20대 후반 불가리인. 키가 크고 머리가 이마가 약간 벗겨졌다. 가끔씩 광기가 번뜩인다.

마리안: 20대 초반 덩치 큰 불가리인(카우치서핑 로라의 사촌). 폭력적이지만 손님에게는 매우 친절하다.

벨리자: 과묵한 20대 후반 근육남. 불가리인이지만 러시아 피도 섞여 있음. 동물 도살하는 것(돼지, 닭 등)을 좋아한다. 

마리아: 집시 소녀. 학생. 엔젤의 여자친구.

슈크리: 집시 할아버지. 마을에 처음 왔을 때 먹을 것을 사주고 집으로 초대해 주신 분.


이동경로: 도이렌치(Doyrentsi) - 로베치(Lovech) - 도이렌치 - 로베치


1. (아침) 오늘은 로베치에 가서 세차하는 걸 구경하고, 또 다시 점심을 얻어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 일당이 아닌, 카우보이 모자를 쓴 잘생긴 동네 남자애(로크)가 운전을 했는데, 정말 과격하게 한다. 시골길이어서 지나다니는 차들이 많이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마조마할 정도로 엑셀을 밟고 핸들을 꺾는다. 이 과격한 운전이 불안하면서도, 맑은 하늘 아래에서 빛나는 가로수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쾌감, 큰 음악소리, 자동차에 탄 일당의 괴성과 어우러져 묘한 황홀감을 준다. 도이렌치에 접어 들어서, 운전하던 남자애가 길가던 개한테 갑자기 차를 돌진시킨다. "어어어!!"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데, 핸들을 급격하게 돌려서 개 옆으로 비껴 지나가며 "크하하하캬캬캬!" 하며, 내 얼빠진 표정을 놀리듯이 다같이 낄낄 웃는다. 정말 좋은 애들이면서도 이렇게 무서울 때가 있다.


햇볕을 받으며 이 카페, 저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 집시 아저씨들을 만나 먹을 것을 얻어 먹었던 사거리에 있는 카페다. 카페 뒷쪽의 노천 좌석에 앉아 있으니, 지나다니는 온 동네 사람들을 다 구경할 수 있다. 동네 사람들은 서로 다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못 보던 외국인이 보이자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엔젤의 통역을 통해 이것 저것 물어보거나,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도이렌치를 떠기 전에 슈크리 아저씨 집에 두고 온 우비를 가지러 집에 한 번 더 가보지만 집은 비어 있다. 엔젤과 마리안이 수소문 하더니(이렇게 동네 사람들에게 누구 어디에 있냐 묻고 다니는 것으로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작은 동네다), 마을 외곽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금요일 오전. 맑은 날씨. 조그만 건물들 사이로 난 한적한 길. 슈크리 아저씨는 공사장에서 건물을 짓고 있었다.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집시 아저씨들이었는데, 마리안은 그 와중에도 "쥡-씨-! 쥡-씨-!" 소리를 내뱉으며 수금하러 온 깡패처럼 인상을 쓰고 있었다. 건물 윗층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슈크리 할아버지가 이게 왠 소란인가 하는 항의와 우려가 담긴 표정으로 내려왔다. 내가 아저씨 집에 우비를 두고 왔다는 얘기를 듣더니, 그런 건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이지만 일단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신다. 나와 불가리인 일행은 다시 마을 쪽으로 천천히 돌아간다. 먼저 갔던 슈크리 아저씨가 우비 두 개를 찾아서, 자전거를 타고 이쪽으로 오고 계신다. 우비를 받고 고맙다고 인사한다(천원짜리 일회용 우비이지만 없으면 불안함). 백인 친구들 대신 집시 아저씨와 시간을 보내게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불가리인들은, 심지어 바바(마리안의 할머니)까지도, 집시들이 훔쳐간다고 위험하다고 하는데... 내가 보고 있는 집시는 작고 메마른 노인, 공사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노인, 지나가던 여행자에게 빵과 음료를 주는 노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한 사마리아인과 너무도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집시 슈크리"이 도움이 필요한 "여행자=나"에게 선의를 베푼다.) 여기서 내가 집시에 대해 받는 인상이 잘못된 것일까? 수많은 생각들과 인상들, 느낌들. 다 기록할 시간이 없다. 일들이 벌어지는 속도와 분량이 적어 내려가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빠르고 많다.


내일은 세르비아로 곧바로 가게 되었다.


전날에는 새벽 2시가 넘도록 먹고 마셨다.


아침 일찍 마을 회관 카페에 모인 노인들. 엔젤, 마리안, 벨리자, 그리고 집시 아이들도 노인이 될 때까지 이렇게 이 마을에 살고 있을까?


마을 동사무소 같은 곳. 마을이 세워진지 110년이 되었다고.


로베치에서 밥을 먹고 신나게 차를 달려 다시 도이렌치로.


운전을 격렬하게 하던 것처럼, 자전거로 온갖 묘기를 부리고 있는 동네 남자애와 블랙 피라냐.


마을 풍경. 어느 집이나 고인을 추모하는 사진이 붙어있다.


벨리자의 할머니 집.



2. (저녁) 이곳의 사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고 생각되는 한편, 한국에서의 삶 또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의 집에서 며칠씩 지내고 하루 종일 누군가와 지내볼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한국에서의 삶의 모습이라고 해봐야 수천만명 중의 극히 일부인 나 자신, 가족, 몇몇 친구들의 삶을 알 뿐이다. 


금요일의 도이렌치 회관 카페에는 사람이 많았다. 귀여운 꼬마 여자애도 있고, 주말이라 학교가 있는 도시에서 돌아 온 학생 애들도 많이 있다. 못보던 얼굴이 많이 보인다.


봉고차를 타고 다시 로베치로 가는데, 벨리자가 차비를 내준다. 좋으면서도 미안하다. 얻어 먹는게 너무 익숙해지는군... 로베치는 도이렌치보다 수십배는 큰 도시다. 벨리자의 가족은 로베치에 살고 있고, 벨리자가 도이렌치에 있을 때는, 할머니와 함께 있는다. 도시의 한 카페에서, 벨리자와 벨리자의 새어머니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커피값이 부담되어 안 마시겠다고 버티다가 또 밀크쉐이크를 얻어먹게 된다. (밀크쉐이크는 2.5레바, 1700원으로 지금 생각하면 푼돈이지만 당시에는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다.) 아, 천원 이천원에 이렇게 쪼잔해 지는것도 고통스럽구나. 새어머니와는 이따가 다시 만나기로 하고, 벨리자의 친어머니 집으로 향한다.


친엄마 집에서는 바나나를 얻어 먹는다. 여기서는 빈곤에 대한 복잡한 상념에 빠진다. 벨리자의 친어머니는 화장실 전구도 못 갈아끼우는 어려운 형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기에도 얼굴에 '가난'이라는 글자를 써 넣은 것 처럼 힘들게 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면서 5레바짜리 담배는 꼬박꼬박 사서 피우고 있다. 5레바는 빵값, 과일값, 채소값을 생각하면 상당히 큰 돈이다. 인상이 좋으신 벨리자의 친어머니는 직업이 교사라는데, 여기서는 교사가 대우를 받는 것 같지도 않고 제대로 된 수입이 있는것 같지도 않다. 이 어머니가 신세한탄 하시는 것을 듣는 게, 잘 사는 나라에서 와서 돈 없는 코스프레하는 나로서는 견디기 힘들다. 한편 어떻게 보면, 나는 집도 없고 빚더미인데 반해, 이분들은 도시에 집이 있고 넓은 정원이 딸린 시골집도 하나씩 있고 빚도 없으면서 가난하고 비참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다. 이게 다 TV에서 과소비를 과시하는 모습을 당연한 것처럼 보여줘서 그런게 아닐까. 불가리아에서 집이 있으면 한달 100불로도 충분히 건강하게 먹고 살 것 같은데... 어쨌든, 저녁은 벨리자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사는 집에서 먹기로 했다. 슈퍼마켓 리들(Lidl)에서 식재료를 살 때에는 10레바를 억지로 건네주었고, 그러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당연한 예의인데, 너무 받는 것에만 익숙해져서...


가족들과 돼지고기, 샵스카(샐러드), 피클을 먹었다. 식사후에는 온 가족이 담배를 피운다. 아빠, 새어머니, 아들... 담배 연기를 즐기는데, 여동생의 남자친구인지 남편인지 영어를 잘 하는데 약간 태도가 건방진 남자가 한명 온다. 남자와 얘기를 잠깐 나누는데, 자기 여자친구(벨리자의 여동생)같이 머릿속이 빈 애들을 상대하는 게 피곤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다. 옆의 여자친구는 영어를 못 해서 무슨말인지 못 알아듣고, 순진하게 앉아 있다. 남자는 바쁘다는 식으로 금방 다시 나가더니, 뭔가를 잊었다는 듯 급하게 다시 돌아오더니 나에게 묻는다. "아, 가장 중요한 걸 잊었네. 축구 좋아해?" 그렇다고 대답하자, "어느 팀?"하고 재빠르게 묻는다. 어... 하고 대답을 안하고 있자 급한 듯, "FC 바르셀로나? 좋아해?" 라고 묻는다. 또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씨익 웃더니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고 간다. 하하하...


어둡고 으슥하고, 왠지 위험해 보이는 도시의 밤길을 걸어 벨리자 친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온다. 춥다. 다들 혼자서 여행하는게 무섭지 않냐고 물어보는데, 얼마나 위험하길래 자꾸 그런 질문들을 하는 걸까. 이것도 다 뉴스와 TV 때문에 그런걸까. 벨리자가 방에서 권총을 꺼내서 보여준다. 케이스에 담겨 차갑게 빛나는 리볼버 권총이다. 동물은 죽이는 걸 좋아하고(돼지나 닭 죽이는 사진을 보여줌), 과묵한 마피아 보스 같으면서도 약간 사이코틱한 장난을 많이 치는 벨리자... 그런 벨리자가 권총을 꺼내 보여주며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으니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벨리자가 권총을 꺼내 장전을 하더니 나를 겨누거나 하지는 않았고... 나에게 자기 방에서 자라고 하더니 자기는 어디론가 간다.


소피아(불가리아의 수도)에서 세르비아로 순식간에 건너갈 것 같다. 히치하이킹을 하기에는 시간이 좀 불안하고, 버스틀 타야할 것 같다. 큰 돈을 쓰려니까 좀 찝찝하지만 숙박비보다는 확실히 싼 것 같다. 온 몸이 간지럽다. 피곤하니 일단 자자.


도시의 카페에 와서 밀크쉐이크를 얻어 먹었다.


벨리자 친어머니 집에서 보이는 도시 풍경.


소박한 친어머니집. 아들 친구가 오면 먹을것을 잔뜩 차려주고 싶으련만, 집에 먹을게 바나나 밖에 없었다. 새어머니 집으로 우리들만 밥을 먹으러 가는게 미안했다.



요리를 하는 벨리자와 새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