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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독일 & 네덜란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박물관, 식당, 걷기와 자전거 (여행 114일째)

2016년 11월 9일 수요일 흐림 (기온: 섭씨 0-4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나타샤네 아파트(Flakkeestraat) 사라의 방

 

배경음악: Claude Bolling - Gracieuse

 

[등장인물]

나타샤: 대학시절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왔을 때 만난 친구. 한국 문화를 사랑함. 암스테르담에 있는 한국 기업에서 일한다.

사라: 나타샤의 룸메이트. 인공지능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사라의 방에서 일어났다.

 

나는 거실에서 자도 된다고 했는데, 이 착한 아가씨들이 미리 상의를 해서 둘이 같이 나타샤 방에서 자기로 하고 나에게 방을 쓰게 해 준 것이다. 한낱 떠돌이 여행자를 귀인처럼 대접하는 그대들에게 축복 있기를...

 

오늘은 평일이어서 둘 다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

 

이렇게 집이 비는 경우에 카우치서핑이라면 손님인 나도 집을 비워주는것이 예의이지만 이렇게 친구의 집에 있을 때는 좀 다르다.

 

"우리는 나가야 하니까, 집에서 편하게 쉬다가 이따 암스테르담에서 보자! 집에 먹을게 별로 없어서 미안하지만... 주방에 있는 것 아무거나 먹어도 돼!" 마음씨 착한 나타샤가 말했다.

 

그렇게 두 아가씨는 집을 떠났고, 아침 일찍부터 고양이 두마리(덤블도어, 멀린)와 느긋한 오전을 보냈다.

 

빵을 꺼내서 냉장고에 있던 누텔라, 버터, 잼 등에 발라 먹었다. 정말 행복한 순간이다.

 

밀린 빨래도 세탁기에 다 돌렸다.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넘어와서인지 가전제품들이 확 달라졌다. TV, 냉장고, 세탁기 등이 모두 최신형이다. 건조기까지 있어서 빨래가 마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었다.

 

아빠와 영상통화도 한참 했다. 이런게 행복이지. 

 

그렇게 충분히 즐거운 휴식을 취하다가 오후가 되어서 슬슬 집 밖으로 나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 눈을 하고 있는 집고양이. 나타샤 말로는 집 밖으로 나가면 분명 굶어 죽을 거라고 한다.

 

TV는 트럼프 당선 뉴스로 떠들썩했다. 전날 밤 같이 뉴스를 보던 나타샤도 미국에 정말 실망했고 절망이 현실이 되었다고 좌절했다. 하지만 막상 2년이 지난 현재(2018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

 

위풍당당 앉아있는 두 마리의 마법사 고양이.

 

"Not all those who wander are lost. - J.R.R. Tolkien (떠돌아 다니는 모든 이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아빠와 영상통화를 하며 이 글귀를 보여 드렸다.

 

집 밖을 나와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시내까지는 약 7km. 천천히 걸어도 두시간이면 갈 수 있다.

 

하지만 역시나 젖은 길거리를 샌들로 걷는 일은 유쾌하지 않다. 발바닥은 축축하고, 시렵고, 발에서는 냄새가 난다.

 

먼저 나타샤의 집 근처에 있는 슈퍼마켓 점보(Jumbo, 이쪽 발음으로는 '윰보'였던가)에 들렀다. 흠... 어디선가 점보 슈퍼마켓에서는 커피가 공짜라는 말을 들었는데...

 

공짜 커피를 찾으며 각종 먹거리들을 구경한다. 정말 다양한 빵들... 한바구니 담아가서 실컷 먹고 싶지만 지갑이 가벼운 남자에게는 그림의 빵이다. 과일도 잔뜩 있는데 동유럽에서 건너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전부 다 무지막지하게 비싸게 느껴진다. 그냥 나가기는 섭섭해서 1kg 짜리 귤을 샀다. 1유로다. 이정도면 꽤 싸게 산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전리품인 귤을 들고 북쪽으로 계속 걷기 시작한다. 귤을 하나씩 계속 까먹다 보니 배가 무지 불렀지만, 계속 먹으면서 걸었다.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일단 북쪽으로만 걸었다. 가는 길에 수많은 운하를 건넜다. 

 

암스테르담은 두번째다.

 

2년 전에도 한 번 왔었다. 그때는 여름이었고, 낮이 더 길었고, 길이 이렇게 축축하지 않았고, 운좋게 비가 잠시 멎었을 때여서 파란 하늘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여행자금을 대주던 사촌형과 같은 차로 여행하던 한국인 일행들과 함께 왔었다.

 

그때는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여 있는 암스테르담의 운하가 정말 인상깊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구름이 잔뜩 껴 있기는 해도, 암스테르담은 여전히 아름답다.

 

북쪽으로 가다가 우연히 빨간 불빛이 흘러 나오는 매춘업소도 하나 지나쳤다. 건물 2층의 유리 벽면을 통해 한 마리의 거미처럼 몸을 움직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그리고 건물 바깥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길을 지나가는 어린 소녀가 보였다. 창밖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몸을 움직이는 매춘부와 그 앞을 지나치는 소녀의 모습이 묘하게 대비되었다.

 

 

 

한참을 걸었다.

 

거의 도심부에 온 듯하다.

 

전방 좌측에 커다랗고 멋진 건물이 보인다. 벽면에 근사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길을 따라 걷다가 건물 뒷편에서 보니 건물을 통과하는 길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통과해 지나다니고 있길래 나도 가 보았다. 유리벽을 통해 건물 안쪽이 보인다. 박물관 같은데, 좀 비싸 보인다. 안쪽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데 문 앞에는 검정색 정장을 입은 보안 요원이 서 있다. 이곳은 출구 전용이고 돈을 내는 입구가 따로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밖에서만 내부를 구경하고 있는데, 길을 지나던 몇몇 사람이 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간다. 오호, 여기로 들어가도 상관 없나 보구나.

 

계단을 통해 내려가자 너무 쾌적한 박물관 로비의 공기에 녹아버릴 것 같았다. 단체로 온 듯한 어린 학생들이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고, 여기 저기 각종 짐승의 박제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전시실은 유료인 것 같았지만 굳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깨끗한 화장실을 무료로 쓰고, 앉을 자리를 찾아서 축축하게 젖은 신발을 벗고, 냄새나는 발을 말리며 와이파이를 잡아 나타샤와 연락했다.

 

[나: 나 24시간 전철표를 안샀어]

[나: 집에서 만나서 같이 가는 것보다 식당에서 바로 만나는게 좋을 것 같아]

[나타샤: 우리 해스예 클래스(Haesje Claes)에서 먹을거야]

[나타샤: 지금 어디야? 거기 어떻게 갔어?]

[나: 레이(Rij-)어쩌고 하는 박물관이야]

[나타샤: 레이크스 박물관(Rijksmuseum)! 좋지!]

[나: 안나 박물관 옆에 있는 교회에 들렀다가 18시 30분까지 갈게]

[나타샤: 응, 18시 30분에 예약해 놨어]

[나타샤: 사라랑 같이 갈게 거기서 보자. 일찍 도착하면, 내 이름으로 예약해 놨으니까 자리 잡아 둬]

 

식당 위치를 지도에서 찾아 표시해 두고 조금 더 박물관의 따뜻한 공기를 즐기다가 밖으로 나왔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Rijksmuseum)에서는 특별 전시가 있는 것 같았다. (Frans Post. Dieren in Brazilië)

 

찾아보니 이런 멋진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Frans Post: View of Olinda, Brazil (Frans Jansz Post (1612–1680), olieverf op doek, 1662)

 

박물관의 박제 사자.

 

박물관 건물 뒤쪽.

 

1895년 즈음의 박물관 건물 모습 (출처: Wiki Commons)

 

나중에 보니 박물관 정면(남쪽)에는 이 유명한 [I amsterdam] 조형물이 있었다. 북쪽으로 들어간 나는 구경도 못했지만.

 

박물관을 나와 암스테르담의 젖은 거리를 마음껏 방황하기 시작했다.

 

Grill Steakhouse Mama (Korte Leidsedwarsstraat 56I)

 

Maoz Vegetarian (Leidsestraat 85)

 

2년 전 안나 프랑크 박물관 근처의 교회 베스테르케르크(Westerkerk)에서 어떤 노인의 황홀한 오르간 연주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한번 그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같은 교회를 찾아가 보았지만, 교회 문은 닫혀 있었다. 이 교회는 화가 렘브란트(Rembrandt)가 묻힌 곳이고, 2013년까지 네덜란드의 여왕이었던 베아트릭스(Beatrix)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돈 주고 올라갈 수 있는 종탑이 있다.

 

Westerkerk (Prinsengracht 279)

 

 

 

 

Svaha Yoga (Begijnensteeg 1)

 

보행자 거리를 걷다가 서점에서 시간을 한참 보냈다. 오... 서점 직원으로 일한다면 행복할거야.

 

서점에서 시간을 떼우다가 아주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도덕경의 철학과 곰돌이 푸를 연결한 책인데 책속의 몇몇 구절이 위로가 되었다.

 

알란 와츠(Alan Watts)의 책도 발견했다. 이 책도 위로가 되었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식당 Haesje Claes에 도착했다.

 

해스예 클래스(Haesje Claes)는 암스테르담에 몇 없는 네덜란드 음식점이라고 한다. 딱히 유명한 네덜란드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태국 음식, 프랑스 음식, 일본 음식, 중국 음식, 이탈리아 음식, 멕시코 음식 등 각종 세계 음식을 다 팔고 있으니 네덜란드 음식 자체가 별 인기가 없단다.

 

좁은 입구로 들어간 식당의 내부는 꽤나 넓다. 손님이 많아서 안내하는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 쑤욱 들어가서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와 직원에게 나타샤의 이름을 대자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홀로 앉아서 어색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곧 두 아가씨가 나타났다.

 

저녁을 먹으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겠지만, 별 기억나는건 없다.

 

나타샤와 사라는 세트 요리(코스 요리)를 시켰는데, 나는 채식 메뉴를 따로 고르는 바람에 나중에 나온 커피와 디저트는 포함이 안 된 것 같았다.

 

나타샤: 어떤 케이크를 먹지? (한참 동안 후식으로 나오는 케이크를 못 고르고 고민한다)

사라: 둘 다 먹어.

나타샤: 맞아. 우린 이제 어른이야. 케이크를 두 개 먹고 싶으면 두 개 먹을 수 있어.

사라: 그래, 우린 둘 다 먹을 수 있어.

나타샤: 하지만 둘 다 먹으면 후회할거야.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갔다.

 

나타샤가 사주는 자리여서 돈이 더 나올까봐 후식과 커피는 안 먹겠다고 했는데, 다 먹고 자리를 나올 때 나타샤와 사라가 남긴 케이크와 음식과 빵이 너무 안타까웠다. (싸가고 싶어서)

 

세 명이 먹은 저녁 한 끼의 값은 85유로였다. 너무 고마우면서도 1인당 8유로짜리 팔라펠과 맥주 세트를 먹었어도 충분했을텐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아까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스웠다.

 

돌아갈 때에는 어떻게 돌아가야 하나. 두 사람이 전철을 타고 갈 줄 알고 혼자서 걸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한다! 역시 자전거의 나라다.

 

나타샤 자전거 뒤에 어깨를 잡고 앉아 돌아온다. 정말 자전거를 잘 탄다. 다 큰 남자를 뒤에 싣고도 쌩쌩 잘 달리는 나타샤. 발은 차갑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며칠 전부터 담이 걸린게 아직 덜 나았는데, 하루 종일 중지 등쪽을 마사지했더니 좀 나은듯 하다.

 

귤 까먹느라고 쓴 1유로, 첫날 밤 전철 타는데 쓴 2.9유로, 이렇게 큰 소비 없이 암스테르담을 떠난다. 내일은 푸이, 모레는 베라를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