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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러시아

러시아 모스크바: 찡그린 호스텔과 닫힌 광장 (여행 54일째)

2016년 9월 10일 토요일 러시아 모스크바 호스텔 카르티노 6인실 도미토리(81 Prospekt Mira, Ostankinsky)


1. 기차는 아직 어두운 새벽에 모스크바 카잔스카야역(moscow kazanskaya railway station)에 도착한다. 어두운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이 불안하기도 하고 예약해 둔 호스텔 체크인 시간이 7시부터여서, 따뜻하고, 의자도 있고, 밝은 기차역에서 잠시 앉아 쉬며, 타타르스탄에서 올가가 챙겨준 치킨 파이와 체리 쥬스(Kompot, компот)를 마신다. 


카잔스카야 역에서 숙소까지는 약 4km로 전철 타고 가기에는 돈도 아깝고 좀 복잡해서 걸어가기로 한다. 어느 도시에서건 한시간, 두시간, 세시간을 걷다보면 도시의 사람들, 도시의 일상, 평범한 풍경들이 보이고, 그 도시를 '점(點)'이 아닌 '선(線)'으로, 훨씬 더 넓은 시야로 보게 된다. 하지만 도시를 더 깊숙히 볼 수 있다고 해서 배낭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를 견디며 역을 나오자 구름에 덮인 우중중한 도시가 보이고, 아침 일찍부터 우울한 표정으로 도시를 방황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길 맞은편에서 단체 중국인 관광객 행렬이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 걸어온다. 러시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보는 동양인이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명소에 들렀다가 쇼핑을 하고 호텔로 돌아갈 그들과, 무거운 짐을 지고 한참을 걷다가 빵 쪼가리를 뜯으면서 싸구려 숙소에 들어갈 나 사이에서 별다른 동질감을 찾을 수 없다.


2. 호스텔 체크인 시간에 맞추기 위해 천천히, 배낭을 메고 한시간 넘게 걸어왔건만, 찾아온 주소 '프로스펙트 미라 81'의 건물을 둘러보아도 호스텔 카르티노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로밍폰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보기에는 돈이 아깝고, 방향을 잃은 채로 건물 뒷편을 서성거린다. 그러다가 주변에 있던 동남아시아에서 온 듯한 청소 노동자가 나를 보더니 반가운 미소를 짓길래, 다가가서 호스텔 이름을 보여줬더니, 기본적인 영어로 새로 생긴 호스텔이라며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고 위치를 알려준다. 우와... 너무 고맙다. 별것 아닌 것 같은 도움이지만, 말도 안통하고 갈 곳도 모르는 이방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구원의 손길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호스텔의 입구에는 간판은 커녕 조그만 표식도 없고, 이곳이 카르티노 호스텔(2017년에는 Gnezdo Mira Hostel로 이름이 바뀌었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간 호스텔에는 이층 침대가 여러 개 들어서 있는 방이 보여 호스텔이란 것을 짐작은 하겠지만, 접수를 하는 프론트 데스크나 잠시 앉아 기다릴 의자나 소파는 보이지 않는다. 주방에 식사를 준비하거나 먹는 사람들이 있지만 여행객들로 보이지는 않고, 이곳에 장기 투숙하고 있는 러시아인들로 보인다. 체크인을 어디서 하는지 물어보기 위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여권을 보여주며, "그뎨(где, 어디)?" 라고 하니, 두 손을 모아 머리 옆에 대고 잠자는 모양을 하고는 위를 가리킨다. 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머리를 한참 굴려보다가 '이 곳은 자는 곳이고 위에 가야 체크인을 할 수 있다' 라는 뜻으로 해석을 하고 다시 좁은 계단을 올라가 주변을 돌아본다. 하지만 접수처 같은 곳은 어디에도 안 보인다. 저 멀리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아까 호스텔 위치를 알려줬던 청소 노동자다. 내가 헤매고 있는 걸 보더니 다시 도움을 주고자, 전화번호를 하나 알려주며 여기에 전화를 걸어 보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외국폰이어서(비행기 모드로 되어 있었다) 전화를 할 수 없다고 하자, 호스텔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다시 안내해 준다. 다시 들어가는 수밖에 뭐. 


체크인을 하지 못한 채로 식당에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하염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린다(이럴 때 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오른다). 식당에 짐을 내려두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려 보면서 갖고 있는 러시아어 사전 앱으로 문에 붙어 있는 단어를 찾아보니(러시아어 자판이 설치되어 있어야 한다), 닫혀 있는 방 하나가 관리실(admin office)인 것 같다. 문을 살짝 열어보니 조그만 방에 사람이 하나 자고 있길래, 좀 더 기다려 본다. 문 앞에 붙어있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니 아마 10시부터가 근무시간인 것 같다. 기다리는 동안에, 화장실을 찾아서 똥도 싸고, 샤워도 하고, 수건도 말리고, 올가가 싸준 치킨 파이를 먹으면서, 사람들이 주방에서 차를 마시고 아침 식사를 준비해 먹는 걸 구경한다. 낯선 곳에서 어색하게 앉아 이곳에 앉아 있어도 되는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차를 끓여 마시고 익숙하게 파스타나 계란 후라이를 준비해 먹는 사람들의 일상이 어찌나 부럽던지. 열시가 넘었는데도 관리실 문이 열리지 않길래 똑똑 두드리고 열어보니 잠을 자던 남자가 뭐라고 뭐라고 짜증을 내며 문을 닫으라는 손짓을 한다. 무슨 나쁜짓이라도 하다가 걸린 아이처럼 차가운 대접을 받는다. 말이 안 통하는건 참 힘들다.


이빨을 닦으러 화장실에 갔다 오니, 아까 짜증을 내던 호스텔을 관리하는 젊은 남자가 나와서 방을 안내해 준다. 돈을 내고, 방으로 들어오니, 불이 꺼진 깜깜한 방에 이층 침대가 세 개 있는데, 사람들이 아직까지 자고 있다. 짐을 정리하기에는 어둡고, 이대로 밖으로 나가기도 그렇고, 에라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드러누워 잔다.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꿈을 꾸었는데, 지금은 잊어버렸다.


3. 짧고 달콤한 낮잠을 자고 지하 호스텔에서 나와, 약간 쌀쌀하고 흐리고 우중충한 느낌이 도는 도시를 걸어 전철역 알렉시브스카야(Alekseevskaya, Алексеевская)로 향한다. 어느 플랫폼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 건지 확인을 못해 잠시 헤매다가, 감을 잡고 붉은 광장이 있는 남쪽으로 향한다. 환승을 한번 하고 오코트니 리야드(Okhotny Ryad, Охотный ряд)역에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는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바글바글 많고, 전철역에서 지상으로 나오자 마자 보안 검사가 있다. 여기서도 역시나 경찰이 여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북적거리는 인파를 뚫고 붉은 광장(Red Square)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데, 이상하게 광장과 성 바실리 성당(Saint Basil's Cathedral) 방향으로 통하는 길이 막혀있다. 설마, 모스크바까지 와서 그 유명한 테트리스 건물을 못보는 것인가...! 몇 년 전, 친구가 유럽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모스크바 경유로 잠깐 공항에서 나와 붉은 광장에 와봤다가, 길이 막혀 있어서 구경도 못하고 돌아왔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그 당시 나는, 친구가 말도 안통하고 길을 제대로 못 찾아가서 이상한 길로 갔을것이라 지레 짐작했었다. 관광객과 시민들로 가득할 그 커다란 광장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하지만 친구의 경험은 사실이었고, 그것과 똑같은 경험이 시간을 건너 뛰어 나에게 다시 일어난 것이다. 광장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주변의 차로는 자동차의 통행을 막아 둬서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고, 우중충한 구름으로 덮여있던 하늘도 언제부턴가 햇살이 비추고 있기에, 이쪽 저쪽으로 돌아다녀 본다. 한쪽에는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악단이 <Time to Say Good Bye> 같은 유명한 곡을 연주하고 있다. 반대쪽으로 조금 가보니 무슨 행사를 하는지 사람들이 화려한 복장과 화장, 알록달록한 가발을 쓰며 분장을 하고 있고, 뮤직비디오를 찍는지 잔뜩 모여 춤추고 있다. 구경하는 인파를 뚫고 큰 길(Ulitsa Okhotnyy Ryad, Teatral'nyy Proyezd)을 따라 쭉 서쪽으로 걷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성 바질리 성당을 멀리서나마 보기 위해) 골목길(Nikolskaya St)로 들어선다. 이 길은 보행자 도로이고, 벤치가 여러 개 있길래 그 중 하나에 앉아 올가가 싸준 치킨 파이와 체리 쥬스를 마신다(오늘은 아침부터 하루종일 이것만 먹는다). 냠냠, 배가 그리 고프지 않은데도 마음속 어딘가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지친 다리를 쉬고 시간을 죽이기 위해 냠냠 먹는다.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는데, 바로 앞에서 짧은 머리의, 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키가 좀 더 작고 몸이 더 다부진 남자가(아마도 중국인) 파파 피자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 바로 몇 분 전에 지나쳤던 전단지를 나눠주던 흑인이 떠오르며 괜히 이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든다. 난 여기서 뭘하고 앉아 있는 건가! 


4. 경찰이 막아 놓은 곳이 많아, 한참을 빙빙 돌아 찾아간 성 바실리 성당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아니면 이때의 기분이 무엇을 봐도 별로인 기분이었을 것이다. 붉은 광장이 막혀서 인지 성 바실리 성당의 뒷쪽으로 버스를 타고 온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있다. 관광 가이드가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오늘 붉은 광장이 막혔으니 일정을 어떻게 조절하느니 누구에게 연락을 하느니 하는 심각한 얘기를 하고 있다. 오랜만에 본 한국인들이 반갑고 아는척 하고 싶지만, 그저 아무말 없이 지나친다. 성당 바로 남쪽으로 모스크바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 여의도처럼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섬으로 들어간다. 섬에 있는 조그만 공원을 지나 다시 다리를 건너 구세주 성당(Cathedral of Christ the Saviour)으로 간다. 성당의 뒷편 아래쪽으로 갔는데 150루블 어쩌고 저쩌고 하는 표지가 있어 돈을 내는 건줄 알았는데, 위로 올라가 보니 사람들이 입장료 없이 자유로이 오고 가는 입구가 있었다. 성당 내부와 외부의 수많은 성자들과 그들의 머리 주변을 감싸는 후광. 오... 저도 그런 빛을 받을 수는 없을까요? 저도 저런 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성당 입구에는 구걸하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돈 대신에 먹을 것(과자)을 주고 가자 아저씨는 그것을 버리듯이 담장 위로 치워 놓는다. 나는 그 과자를 탐욕스럽게 바라본다. 아... 나는 거지의 음식까지 탐하는가? 오후 4시 45분 경부터 5시까지 성당의 종탑에서 한참 동안 웅장하면서도 맑은 종소리가 울린다. 아르바트 거리(Arbat St)를 걷다가 지하철 역으로, 그리고 숙소로 돌아 온다. 아, 혼자하는 이 여행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을 보아도 큰 감흥이 없고, 그저 배불리 먹고 마시고나 싶구나. 전철에서 본 키 큰 성직자처럼,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신의 말씀만을 생각할 수 있다면. 


새벽 일찍 도착한 기차에서 나와 본 모스크바의 첫 인상. 매우 우울하다.


길 건너편에는 단체 관광객들의 행렬이 보이고, 길 위에는 트롤리 버스(trolley bus)를 위한 전기선이 설치되어 있다.


숙소 가는 길의 주유소와 길 건너편의 성당. 기름값은 리터당 약 40루블(700원 정도)로 매우 싸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있는 새들. 처음 보는 종류의 새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기찻길을 지나 북쪽의 숙소로 향한다.


힘들게 찾아온 호스텔. 말이 호스텔이지 실제로는 여행객들 보다는 장기 투숙객들이 더 많아 보였다. 주방에서 직원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타타르스탄에서 올가가 싸준 체리 컴포트와 치킨 파이.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며 먹어서 음식에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한숨 자고 나와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길. 으슥한 지하통로를 지나간다.


오코트니 리야드(Okhotny Ryad, Охотный ряд)역에서 지상으로 나와보니, 차도 위로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다.


붉은 광장으로 통하는 길이 막혀있다. 가운데의 빨간 건물은 국립 역사 박물관(State Historical Museum)이고 중앙 우측의 별이 달린 탑은 크렘린의 성벽에 세워진 니콜스카야 탑(Nikolskaya Tower)이다.


왼쪽으로는 박물관 건물(Moscow Manege, Манеж)이 보이고 저 끝에 구세주 성당(Cathedral of Christ the Saviour)이 보인다. 일단은 구세주 성당 쪽으로 향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돌아 붉은 광장 쪽으로 진입할 길이 없는지 찾아보기로 한다.


건물 꼭대기에 그려진 그림이 아름답다.


무슨 행사를 하는지 막혀있는 붉은 광장


큰길에서는 뮤직비디오 촬영이 있는지 단체로 춤을 추는 사람들이 보인다.


쉬는 시간


우중충 했던 하늘이 어느샌가 맑아졌다.


뮤직비디오 촬영에 참가하려는지 분장을 하는 사람들


경찰 버스가 많이 보인다.


붉은 광장은 못 들어가지만 북적이는 사람들과 차 없는 도로


모스크바 중심부의 아름다운 건물. 한 남자가 발코니에 나와 거리의 사람들을 내려다 본다.


아름다운 건물이다.


길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남자


니콜스카야 거리(Nikolskaya St). 교관이 꼬마 용병에게 창술 훈련을 시키고 있다.


검술 훈련을 받는 아이. 얼굴에 공포가 가득하다.


한참을 돌고 돌아와 보게 된 성 바실리 성당. 햇볕이 없어서 화려한 알록달록함은 볼 수 없고 밋밋해 보인다.


이제 강을 건넌다. 황금빛 돔의 구세주 성당이 보인다.



크렘린


구세주 성당




수많은 성자들의 조각과 문 주위를 둘러싼 벽의 아름다운 문양.


성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성당에서 나오는 사람들, 구걸하는 남자, 그리고 거지의 음식을 탐하는 나.


구름낀 하늘 아래에서도 황금빛으로 빛나는 성당의 돔


돌아가는 길. 아마도 아르바트 거리.



길고 긴 하루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