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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러시아

러시아 카잔 - 모스크바행 기차 (여행 52-53일째)

2016년 9월 8일 러시아 연방, 타타르스탄 공화국. 슈키예보(Сюкеево)에서 마지막 밤


[등장인물]

보바(블라디미르): 헬프엑스(Helpx) 호스트. 일본 담배 회사 영업 사원. 올가의 남편.

올가(올렌카):헬프엑스(Helpx) 호스트. 가정 주부. 블라디미르의 아내.


1. 지난 2주 동안 정도 들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서, 아쉬운 작별의 밤을 은근히 기대했지만, 그런건 따로 없었다. 낮에는 음식 만드는 일을 도와주는 것 외에는 별일 없다가, 저녁에 보바가 돌아오고 나서, 벽 골격 세우는 일을 도와줬다. 


2. 오늘도 아침부터 빗방울이 새로 설치한 창문을 때리더니, 하루종일 흐렸는데, 구름낀 하늘 아래의 진흙탕 길을 산책하다가 말괄량이 꼬마 숙녀 셋을 만났다. 약간 놀림 받는 기분을 받으면서도, 다시 한 번 러시아어를 못하는 것이 슬퍼지며, 애들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한다. 애들이 낄낄거리면 나도 허허 하고 따라 웃다가 "바카바카(пока-пока, bye bye)" 하고 헤어졌다. 멀리서까지 손을 흔들어 주는 귀여운 아이들.


2016년 9월 9일 러시아


3. 마지막 날 아침. 오늘 카잔으로 돌아가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아침에는 보바가 세차하는 걸 도와달라고 한다. 이제 당분간 빨래를 할 수 없기에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싫고, 마지막 날까지 일을 시키는 것에 대해 속으로 꽁해 있었는데, 그 사이 올가는 집안에서 침구류 정리를 싹하고(다음에는 프랑스인가 어디에서 커플이 들어온단다), 내가 기차에서 먹을 치킨파이, 체리쥬스, 사과와 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르시(borscht, Борщ, 비트, 감자, 양파, 소세지 등을 넣고 끓인 빨간 수프)와 빵을 나에게만 차려준다. 아... 또 이런 저런 사소한 일로 속으로 섭섭하게 생각했던 걸 부끄럽게 한다. 내가 점심식사를 끝내자, 러시아의 관습이라며 탁자에 둘러 앉아, 사과술을 한 잔씩 마시고, 앞으로의 여행을 축복하는 말과 그동안의 도움을 감사하는 말을 건네 준다. 이렇게 생각해주고 챙겨주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서운한 감정을 가졌던 것이 미안하다. 더 잘하자 누구를 만나던.


4. 기차 시간에 빠듯하게 걸릴 것 같아, 보바가 엄청난 속도로 카잔까지 차를 달린다. 기차역에서는 꿀이 발라져 있는 타타르스탄의 전통 과자 챡챡(чак чак, Çäkçäk)도 하나 사서 챙겨준다. 기차 안까지 들어와서 작별 인사를 하고, 또 다시 창밖에서 손을 흔든다. 생각해 보면 보바, 올가와 지내면서 그리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다시 돌아오라고 말해주는게 너무 고맙다. 


카잔(Kazan)에서 모스크바(Moscow)까지는 약 800km로 서울-부산을 왕복하는 거리다. 기차는 오후 4시 15분에 출발하는데 다음날 새벽 5시 30분쯤 도착한다.


우중충하고 축축하게 시작한 아침


비에 흠뻑 젖은 생쥐가 식탁 밑에서 떨고 있다. 아... 삶이란 왜이리도 고통스러운 것인지.


생쥐는 고양이가 물어다 놓은 장난감이다. 아직 죽이지 않고 살려뒀지만 몸 어딘가를 물렸는지 움직임이 둔하다. 


요리조리 빠져나가 보려고 하지만 어림도 없다. 고양이가 훨씬 강하고 날렵하다. 라이온킹 첫 장면에 스카(Scar)가 생쥐를 데리고 장난을 치는 장면이 오른다.


저렇게 끝까지 가지고 놀다가 생쥐를 잡아 먹을 때는 우두둑 우두둑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생쥐. 그 삶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올가와 함께 만든 음식. 감자를 갈아서 밀가루와 섞어 부쳤던 것 같다.


축축한 안마당


마지막으로 슈키예보 마을에서 산책한다.


풀을 뜯다가 돌아오는 앞집 소들.



마을에서 가장 특이하고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마을 회관 겸 우체국


길에서 만난 꼬마 소녀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이렇게 빼빼마르고 조그만 아이들이 나중에는 우람한 아줌마가 된다는게 신기하다.



다시 카잔으로 가는 길


겨울이 오고 있기에 농사는 다 끝나고 밭은 깨끗히 정리되어 있다.




다시 돌아온 카잔의 크렘린과 모스크


모스크바행 기차. 침대칸은 아니지만 좌석이 충분히 넓고 사람들이 많이 타지도 않아서 밤새 편안하게 갔다. 중국에서 타던 일반석 기차를 생각하면 더 바랄게 없다.


블라디미르와 올가가 싸준 음식. 왼쪽의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게 타타르 과자 챡챡. 무지 맛있다.



기차 객실의 앞이나 뒷쪽 화장실 근처에 붙어 있는 시간표. 이걸 읽을 줄 알아야 몇시에 기차가 도착하고 어디서 얼마나 정차하는지 알 수 있다. 내가 탄 기차는 상행이니 오른쪽의 표를 보면, [도시명(친절하게 키릴문자가 아닌 알페벳으로도 나와 있다)], [도착시간], [정차시간], [출발시간], [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가 순서대로 적혀있다.


카나시(Kanash)에서 기차가 약 15분간 정차하기에 사람들이 다들 나와서 쉬고 있다. 하늘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