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일주/세르비아

세르비아 스투데니차: 수도원 마을과 은둔자의 사원 (여행 94일째)

2016년 10월 20일 목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 하니 문이 잠겨 있다. 이 집은 구조가 특이해서 안쪽 끝방에 가려면 화장실을 통과해야 하는데(화장실은 문이 양쪽으로 뚫려있음), 안쪽 끝방에서 자는 베하나가 화장실 문을 잠근 것이다. 문을 두드려 깨우니 일어나서 화장실 문을 열어주고 안쪽 방으로 들어가 다시 잔다. 이거야 원 "나 똥싼다!"라고 동네방네 소리치고 다니는 격이군. 조용히 똥을 싸고 씻은 후, 어제 먹고 남은 빵을 물어 뜯으며 슈퍼 막시(Super Maxi)라는 동네 슈퍼로 향한다. 하하, 이렇게 지난 며칠동안 반복된 일과가 슬슬 적응이 되어 가는데 곧 떠난다 생각하니 아쉽군. 슈퍼에서 오이, 당근, 빵, 사과를 사서 (총 800원어치) 보야나가 어제 어머니에게 받아와 오븐에 구워준 (치즈가 없는) 피자와 함께 냠냠 먹었다. 좀 허전해서 빵을 더 먹었다. 빵이 이토록 싼 가격에 어디에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여기 사람들에게는 빵이 밥 대신이니 빵만 먹는 것은 (한국의 우유, 버터, 설탕이 범벅된 달콤한 빵이 아닌 맹맹한 빵임) 맨밥만 먹는 것과 비슷하겠다. 배고플 때는 밥만 먹어도 맛있다. 게다가 빵은 묘하게 맛있고 냄새도 좋다. 이렇게 큰 덩어리 빵을 뜯어 먹을 때는, 이 딱딱한 빵 껍데기를 잘근잘근 씹을 때는 왠지 모르게 좋다. 


이른 아침의 크랄레보.


개조심 표시와 죽은 자를 기리는 종이.


크랄레보의 오래된 자동차.


보야나의 친구들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라(공연 감독을 하는 짧은 머리 여성), 니콜라와 함께 스투데니차에 가기로 했다. 니콜라의 낡은 벤츠를 타고 크랄레보를 떠난다. 날씨도 좋다. 도시를 나와 작은 슈퍼에 들러서 회비를 500디나르(약 5600원)씩 걷었다. (기름값, 커피값, 저녁값까지. 나중에 저녁까지 먹고 생각하니 미안할 정도로 싸게 다녀왔다.) 창밖의 멋진 경치에도 불구하고, 구불구불한 길과 더운 옷의 조화로 머리가 아파 스스르 눈이 감기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세르비아어 대화 속에 홀로 내던져져 더더욱 졸음을 참기 힘든 드라이브를 한다. 거의 60km 되는 거리, 한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가는 길에는 산위에 지어진 중세시대 요새가 보였다.


"지난번에는 히치하이킹으로 같은 길을 갔다왔었어. 4명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태워주는 사람이 있었어! 계곡을 걷고, 버섯을 따고, 그때도 정말 좋았어." 보야나가 말했다. 여기서 버섯은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버섯을 말한다. 특히 니콜라는 환각 버섯의 전문가라고 했다.



졸다가 약간 멍한 상태에서 스투데니차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니콜라(버섯 따러 사라짐)를 제외한 일행은 초등학교로 먼저 갔다. 보야나가 예전에 교사로 있었던 학교였고, 수도승처럼 머리 한가운데가 벗겨지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마른 체격의 선생님(보야나의 친구)이 우리를 맞이했다. 원래는 크랄레보에서 보이칸과 했던 것처럼 학생들과 만나 한국에 관한 수업을 할 계획이었으나 꽤 늦게 도착했던지라 그러지 못했고, 스투데니차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을 뒤따라 일행들도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도 학생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과 미소와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낯선 동양인을 쳐다보거나 인사를 건넸다. 스투데니차 수도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데 어째서 외부인들이 많이 없는걸까? (유명 관광지에서는 이런 호기심과 호감이 가득한 관심을 받기 힘들다.) 관광객이 없어 한적하면서도 너무 아름다운 곳이다.


스투데니차 수도원 구역.


노란 낙엽과 검은 고양이.



털에 먼지와 거미줄을 덕지덕지 붙이고 돌아다니던 검은 고양이.




학생들이 수도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 일행은 바깥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서 냇물을 지나 노란색 낙엽이 주위를 온통 뒤덮은 약수터와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 쉰다는 것은 나의 경우 지저분한 검은 고양이를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낙엽을 줍는 것이고, 세명의 어른들은 하시시를 피우는 것이다. 행복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성벽처럼 수도원을 둘러싼 담벼락 옆으로 난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성문앞에 학생들이 일렬로 서 있다. 들어보니 학생들이 나와 인사하고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보야나가, 이름, 출신, 여행 경로 등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었다. "세르비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다소 어렵고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다시 받는다. (크랄레보에서 인터뷰 할 때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바로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수도원과 음식이 좋다고 했는데,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세르비아의 자연, 시골마을, 교회, 가정집 장식 등이 좋다고 말하고 싶다. 학생들 모두와 하나하나 악수하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다지 잘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으면서도 순수하게 빛나는 학생들의 미소가 좋았다.


보야나가 찍은 단체사진.


학생들이 떠난 후에는 수도원 건물 내부로 들어가 벽화를 구경했다. 정말 멋지다. 관광객도 없고, 관리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벽화는 정말 멋지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 보기도 힘든 저 높은 곳에 그림을 저렇게나 그려 놓다니. 예수, 마리아, 그리고 이름모를 수많은 성인들... 이걸 보면 기독교는 유일신교가 아닌 다신교이다. (적어도 카톨릭은.)


수도원 내부의 벽화들. 다들 조용히 고개를 젖히고 사방의 벽화를 둘러봤다.



보야나의 말: "영화관이나 유튜브가 없던 옛날에, 수도원 돔과 벽면에 입체적으로 그려진 성화를 보는것은 마법같은 경험이 아니었을까?"




보야나가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더니 일행을 학교로 데리고 간다. 학교 건물의 넓은 홀에서는 학생들이 일렬로 손을 잡고 서서 포크댄스를 추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몇시간이고 머물러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지만, 이렇게 학교에서 민속 춤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을 보는 것 또한 멋진 일이다. 학생들이 만들어 놓은 작품들로 예쁘게 꾸며진 학교. 이사람 저사람과 인사하는 보야나. 아!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과 이렇게 지낼 수 있다면. 


학생들의 단체사진.


포크댄스를 연습하고 있던 아이들.


학교 풍경.


학생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추수감사절 즈음이어서 그런지 각종 수확물로 재미있는 모양들을 만들었다.


수염이 멋지게 자란 지리 선생님(보야나 친구)과 다른 일행들과 다같이 카페로 갔다. 커피를 하나씩 시키니, 한사람당 물 한잔, 커피 한잔, 젤리같은 달콤한 설탕과자를 이쑤시개에 꽂아 하나씩 준다.


마을 카페에서 여유로운 커피타임.


보야나가 말했던 산속의 동굴 사원에 가기로 했다. 버섯을 따러 차를 타고 어딘가로 사라진 니콜라를 만나기 위해 차도를 따라 산을 내려가다가, 연락을 받고 나타난 니콜라의 차에 모두가 낑겨 타서 몇 킬로미터 더 이동했다. 차에서 내려 산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노란색 낙엽들로 가득한 산길. 그리고 빨강, 하양, 다시 빨강색의 유럽 트레일 표시가 몇 십 미터 간격으로 나무에 칠해져 있다. 올라가는 길에 더워져서 옷을 벗어서 나무에 걸어두고, 물에 젖은 양말도 나무에 걸어 두었다. (등산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외딴 산길이었다.) 가는길에 수도사가 홀로 살고 있는 건물을 하나 지났고, 그 후로도 한참을 올라갔다. 보야나는 힘들어 죽으려고 하고, 나도 산길을 즐기는 것 보다는 낙엽을 줍는데 집착하며 걷다 보니 머리가 좀 아팠다. 중간 쯤 올라왔을 때, 탁 트인 절벽에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망이 내려다 보였다.


숨겨진 절벽 동굴 사원 입구.


차에서 내리는 친구들.


보야나가 입구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름다운 숲길을 올라간다.


유로트레일 표시가 중간중간 보인다.



기독교와 민속신앙이 비슷해 보인다.



중간쯤 올라와 절벽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빠져 들어가는 풍경.


숲이 아름다운 시간이다.



절벽 아래의 동굴 사원은, 영화 <반지의 제왕> 속 엘프의 도시처럼, 숨겨진 비밀의 도시처럼 나타났다. 오... 얼마나 좋던지. 얼마나 멋진지. 태양과 파란 하늘과 사막의 색깔으로 빛나는 절벽과 건물들. 크랄레보에 살고 있는 알렉산드라와 블라디미르도 처음 와봤다고 하는 신기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고 숨겨진 장소이다. 어느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오겠는가. 위험한 절벽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Don't lean over the abyss(심연으로 넘어가지 마시오)"라고 영문과 세르비아어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올 법도 한데, 그리고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한 충분한 가치와 아름다움과 역사까지 있는 곳인데, 관리하는 사람은 커녕 수행하는 수도사도 한 명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보야나의 사진. 사진을 정말 잘찍는다.


하얗게 빛나던 절벽.


절벽과 알록달록 색이 입혀진 나무들.





산속 깊이 숨겨진 사원의 입구이다.


절벽을 따라 길이 나있고 작은 건물들과 기도할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






보야나가 찍은 사진.


저녁에는 레스토랑에서 생선과 감자를 먹었다. 명상(위빠사나) 이야기와 흡연과 음주를 하면서도 오래사는 사람들 얘기를 했다. (불가리아나 세르비아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카샤(보야나 친구의 어린 딸)의 무한한 관심을 받으며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자, 내일은 어디서 잘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이곳에서 나흘 밤을 지내고 놀면서 너무도 멋진 경험들을 한 것이 감사하다. 무얼 더 바라겠는가. 어떻게 더 바라겠는가. 불가리아 이후로 축복의 연속이다. 오 물론 그 전에도. 중국에서부터 쭈욱 축복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감히 내일 일을 걱정할 수 있을까.


목록 바로가기2018/05/13 - [세계일주/소개] - ★ 세계일주 글 전체 목록 보기 (시간순/국가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