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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슈라니: 초콜릿과 할머니 집 (여행 107일째)

2016년 11월 2일 수요일

슬로바키아 노베 잠키(Nove Zamky) - 슈라니(Šurany)


배경음악: 사탕 인형의 춤(Tchaikovsky -Dance Of The Sugarplum Fairy)


무지 많은 일이 있었던 날이다. 

하지만 피곤해고 시간이 없이서 일기를 쓰지 않았다. 일기장에는 다음날 기록한 아래 내용만 달랑 적혀 있다.


2016년 11월 3일 목 08:20 AM 니트라


어젯밤 피터의 사진들을 보면서, 여행당 20-30개의 사진만 해도 충분히 많다는 것을 느꼈다. 같은 것을 수십 장 찍기보다는 필름으로 찍듯 신중하게 찍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안그러면 사진이 너무 많아진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는 일기 또한 그렇게 신중하게 골라 내용을 적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안그러면 쓸데없는 내용이 많아진다. 하지만 이건 좀 어렵군. 똥을 싸고, 반대편에 있는 욕실로 가 씻고, 엄마와 아침을 준비해 먹고, 라스타가 치과에 간 사이 엄마와 장을 봤다. 간식거리, 사과, 초코렛 등을 한보따리 챙겨 주신다. 할머니네 갔다가 기차역에서 기차를 타고, 니트라로.


자, 그럼 위의 짤막한 기록과 40장의 사진을 기반으로 2016년 11월 2일을 재구성 해보자.


(오전 8시. 노베 잠키)

노베 잠키에서 시작된 아침. 라스타 방의 소파에서 일어났다. 손님으로 있을 때는 항상 집주인보다 일찍 일어나 화장실을 쓰는게 중요하다. 집주인의 생활 패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난 항상 아침에 똥을 싸고 샤워를 하는데 (똥을 싸고 바로 씻지 않으면 찝찝하다 - 아마도 인도 여행의 영향), 이렇게 변기통과 욕실이 따로 있는 집에서는 약간 불편하다.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집들은 전부 변기통과 샤워시설이 화장실에 같이 있었는데, 여행하면서 변기통(toilet)과 욕실(bathroom)이 따로 있는 집을 많이 봤다. 변기통이 분리된 곳에서는 변기통만 달랑 있거나 변기통과 손 씻는 작은 세면대만 있다. 욕실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화장실 바닥은 물기없이 항상 건조하다. (물청소가 불가능하다.) 라스타의 집도 이렇게 변기통만 있는 작은 공간이 있고, 맞은편에 욕실이 있었다. 똥을 싸고, 휴지로 닦고, 바지를 올리고, 욕실로 건너가, 다시 옷을 벗고, 물로 닦는다.


오늘은 라스타 아빠가 일하러 가시고, 라스타는 치과에 가서, 라스타 엄마와 오전 시간을 함께 보냈다. 같이 슈퍼마켓에 가서 장바구니를 들고 라스타 엄마를 따라 다녔다. 난 이렇게 장보러 따라와서 바구니를 들고 따라다니는게 좋다. 야채, 고기, 치즈, 라스타가 먹을 두부 등을 담고 군것질 거리를 담는다. 


라스타 엄마가 과자를 하나씩 가리키며, "이거 먹어 봤니? 정말 맛있는데... 슬로바키아에 왔으니 이것도 먹어봐야 하고, 또 저것도 먹어봐야 하는데," 라고 하시며 장바구니에 과자들을 담았다. 의사결정권(지불능력)이 없는 나는 가만히 웃으면서 따라 다녔다. 


엄마가 "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라며, 쑥스러운 듯이 큼직한 초콜릿 하나를 집어 바구니에 담았다. 동유럽의 파격적으로 낮은 물가와 비교해보면 초콜릿은 정말 비싸다. 그런데 그 비싼 가격에 비해 영양가는 없다. 초콜릿은 생존에 불필요하다.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참으로 좋은 것은 언제나 값싸고, 해로운 것은 언제나 비싸다'는 말이 참으로 와닿는다. 담배나 술처럼 초콜릿은 사치품이다. (재미있게도 면세점에 가면 이런 사치품들만 볼 수 있다.) 이렇게 생존에 불필요한 물건에 대한 욕망만 없다면 우리 인생은 참 간단해질텐데.


2박 3일 동안 라스타 일가에게 받기만 한 것이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뭐라도 주고 싶어 가방을 뒤져 보았다. 선물로 줄 만한게 뭐가 있을까... 그러다가 불가리아에서 벨리자에게 받은 다용도 칼이 떠올랐다. (내용 바로가기) 숫가락, 칼, 포크, 코르크 따개, 손톱깎이 등으로 쓸 수 있는, 여행자에게 꼭 필요할 것 같은 만능 도구이지만 아직까지 쓸 일이 없었다.


"라스타, 혹시 스위스 군용 칼 있어?" 치과에서 돌아온 라스타에게 물어봤다.


"응, 누나가 선물로 준게 하나 있어. 왜, 필요해?" 라스타가 말했다.


"아니, 사실 불가리아에서 선물받은 칼이 하나 있는데 무겁기만 하고 쓸 일이 없어서 너한테 주고 가고 싶어서." 내가 말했다.


"나도 필요없는데..." 라스타가 대답했다.


"그럼 여기다 두고 갈테니까 필요해지면 쓰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줄래?" 내가 말했다.


"알았어. 그러면 가지고 있다가 혹시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줄게. 너한테는 내 조그만 칼을 주면 좋겠지만, 누나가 준 거여서..." 라스타가 대답했다.


"아니야, 필요없어. 받아줘서 고마워."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다용도칼 1개를 잃었습니다.]


누나 얘기가 나오자 라스타가 결혼한 누나 사진을 보여주었다. 결혼식 당일날 찍은 사진들이었는데, 신부인 누나는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신랑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이 드레스는 한국에서 예식장에 가면 볼 수 있는 하얗고 풍성한 웨딩드레스가 아니라, 결혼식 하객으로 간 친구가 입을 만한 평범한 드레스였다. 아니...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한국 결혼식장에서 여자 하객들이 입는 옷보다도 밋밋한 드레스였다. 신랑이 입은 정장도 각잡힌 턱시도가 아닌, 평범하다 못해 맥이 빠지는 복장이었다. 결혼식이라기보다는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공원에 나와서 사진 몇 장 찍은 느낌이었다.


하! 충격이다.


웨딩드레스를 빌릴 필요도 없고, 식권을 받을 필요도 없고, 예식장을 예약할 필요도 없다. 가지고 있던 옷 중에 가장 좋은 옷을 고르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서, 동네(노베 잠키)의 공터에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 결혼식을 한 것이다. 신랑 신부는 더없이 만족스러워 보였고, 가족들도 행복해 보였다. 어디 한 군데 모자랄 것 없는 완벽한 결혼식인 것이다!


어쩌다가 한국에서는 결혼식이 말도 안되고 비싸고 복잡한 의식이 되어 버린 것일까. 커다란 회색 건물의 몇 개 층을 웨딩홀이라고 이름 붙이고, 하얗고 노란 조명과 가짜 꽃으로 꾸미고, 스피커와 빔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사람들을 모아 이름이 적힌 돈 봉투를 받고, 음악을 틀고, 마이크에 대고 무엇인가를 떠들고, 밥을 먹이고, 노래를 부르고, 사진을 찍고... 이게 무슨 개수작이란 말인가!


(오전 11시. 슈라니)

노베 잠키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슈라니(Šurany)라는 인구 1만명 규모의 도시가 있는데, 라스타의 할머니가 그 근처에 있는 마을에 살고 계신다. 라스타와 라스타의 어머니와 차를 타고 할머니네 집으로 향한다. 


할머니가 어제 만들어 두신 조그만 빵과 차를 마시면서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밀가루 반죽을 넓직하게 펴더니 컵을 이용해 반죽을 동그라미 모양으로 잘라 낸다. 남은 반죽을 다시 뭉쳤다가 넓직하게 펴서 동그라미 모양으로 잘라내고, 두 개의 동그라미 반죽 사이에 달콤한 속을 넣는다. 


요리를 구경하다가 라스타와 밖으로 나와 동네를 구경했다. 이 동네는 수영장 겸 온천 리조트가 있어서 부업으로 숙박업을 하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 지금은 시즌이 아니지만 라스타의 할머니 집도 손님을 받을 때가 있단다. 라스타와 함께 리조트까지 걸어가 봤다. 수영장은 물이 빠져 마른 바닥이 드러나 있고, 슬라이딩 구조물만 앙상한 해골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온천에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할머니 집 뒷뜰을 청소했다. 갈퀴로 낙엽을 긁어내는 간단한 일이었다. 뒷뜰의 닭장에는 닭들이 있었고, 뒷뜰의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면 개울가와 연결된 뒷문이 나오는데, 개울에서는 오리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라스타의 할머니가 키우는 오리들이라고 했다.


어슬렁 거리다가 돌아오니, 라스타 엄마와 할머니가 요리를 완성해 놓으셨다. 정말 맛있는 빵 요리다! 먹고 또 먹고 두고두고 먹고 싶었다.


할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신지 예수, 성모, 성인 등의 성상과 성화가 많았다. 에스테르곰에서 타우 목걸이와 함께 선물받은 성모 그림이 떠올랐다. 별것 아니지만 할머니에게 뭐라도 선물해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가방을 뒤져 조그만 성모 그림을 찾아 냈다. 할머니에게 드리니 정말 좋아하신다.


[성모 그림 1개를 잃었습니다.]


원래는 라스타 어머니가 나를 니트라까지 태워주려고 하셨는데, 오후에 회사에 가야할 일이 생기셔서 계획이 바뀌었다. 대신에 나를 슈라니의 기차역까지 태워 주셨다. 회사에 가셔야 하는데, 바로 가지 않으시고 차에서 내려 기차역까지 따라 오신다. 그리고 매표소에 가더니 기차표까지 사 주신다.


[니트라 행 기차표 1개를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오전에 같이 장을 봤던 먹거리가 잔뜩 담긴 보따리를 주신다.


[사과 1개를 획득했습니다.]

[음료수 1개를 획득했습니다.]

[초콜릿 1개를 획득했습니다.]

[초코바 1개를 획득했습니다.]

[사탕 1봉지를 획득했습니다.]

[웨하스 1개를 획득했습니다.]


"기차가 15분 뒤에 올거야. 여기서 기다리다가 이쪽으로 나가서 열차를 타렴." 기차표와 먹을 것 보따리를 주시면서 걱정 가득한 눈으로 라스타 어머니가 말했다. 


그렇게 기차역에서 라스타와 라스타 어머니와 작별했다. 지금까지도 이때 느꼈던 고마움과 뭉클한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도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자.


요리하시는 할머니.


수영장에 있던 코카콜라 광고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할머니 집의 닭장.


할머니 집의 뒷뜰.


뒷문으로 나가면 개울이 있고, 할머니 오리들이 나와서 놀고 있다.


초콜릿과 달콤한 속이 들어있는 맛있는 빵떡.


할머니가 키우는 개털을 고르는 라스타.


공동묘지에 잠깐 들렀다.


기차표.


라스타 어머니가 챙겨주신 간식 보따리.


기차역에서 니트라행 열차를 기다린다.



(다음 글에서 계속: 니트라에서 만난 베테랑 여행자 페테르와 귀여운 딸 나타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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