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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이탈리아

이탈리아 밀라노: 빠르코, 두오모, 베르가모, 아페리티보 (여행 120일째)

2016년 11월 15일 화요일

이탈리아 밀라노


배경음악: Zecchino d'Oro - Volevo un gatto nero


세계일주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두번째다. 


첫번째 포기꿈에서는 여행을 접고 돌아간 것이 원통할 정도로 아쉬웠는데, 두번째 포기꿈에서는 그만큼 안타깝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주 찝찝했다. 이런 꿈을 계속 꾸는 걸 보니 슬슬 여행이 힘든가 보다.


이야! 위트레흐트에서 베라와 헤어진 후 18시간 동안 버스를 달려 밀라노에 도착했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도심에서 북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Lampugnano BUS, Via Giulio Natta, 226)이었다. 아직 새벽이라 사방이 깜깜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은 태국에서 만난 친구 페어(Pair)의 집에서 신세지기로 했다. 페어는 태국 방콕에서 같이 일하던 아인데, 에라스무스 문두스(ERASMUS Mundus) 프로그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을 그만두고 유럽에 와 있다. 페어는 베르가모(Bergamo)라는 밀라노 동북쪽 40km 부근에 위치한 도시에서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


베르가모에 가기 전에 시간이 많이 있으니 밀라노 구경을 좀 해야겠지. 밀라노는 2년전 (2014년) 유럽 여행때도 왔었다. 그 때는 여름이라 하늘은 파랗고 기온은 높고 관광객도 많았는데 지금은 꽤 추워졌다. 별로 떠오르는 건 없지만 밀라노 대성당(두오모, Duomo di Milano)을 보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사촌형과 두오모 내부를 둘러보고 나와 그늘에서 광장과 사람들을 구경하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두오모는 꼭 보고 싶었다.


버스 터미널에서 두오모까지 거리는 6-7 km 정도 된다. 지도로 가장 쉬운 경로와 보급을 위해 길에 있는 슈퍼마켓을 확인하고 어두운 새벽을 걷기 시작한다.


버스터미널 주변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들.


가다가 큰 길을 건너야 했는데 육교를 건너기 위해 지도에 보이는 이상한 공원(Parco del Portello)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공원에서 육교로 통하는 길은 막혀 있었다. 여름 신발이 매달려 달랑거리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공원을 빙빙 돌며 헤매다가 결국 포기하고 나와 다른 길을 찾았다. 공원 맞은편, 큰 길 너머에는 커다란 LG전자 건물이 보였다.


남서쪽으로 쭉 뻗은 길(Corso Sempione)을 만나 따라 내려가니 평화의 문(Arco della Pace)이 나왔고, 그 너머로는 셈피오네 공원(Parco Sempione)의 넓은 녹지가 있었다. 터덜터덜 공원을 통해 남서쪽으로 내려가니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이 보였다. 별것 없는 성이지만 옛 기억이 떠오른다. 2년 전 이 성 앞에서 흑인 남자에게 붙들려 눈 깜짝할 사이에 손목에 팔찌가 채워졌고, 돈을 요구하기에 유로 동전을 한두 개 줘야 했다. 이제는 관광 시즌도 아니고 날도 추워서인지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공원과 성을 지나 계속 걷다 보니, 주세페 파리니(Giuseppe Parini)의 동상이 있는 코르두시오 광장(Piazza Cordusio)이 나온다. 여기도 기억이 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스포르체스코 성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가면 두오모가 나왔었지. 출근길의 바쁜 사람들 사이로 두오모를 향해 걷는다.


흠... 기억 속에서 두오모는 하얗게 빛나면서 까마득하게 솟아 있었는데, 다시 보니 어째 예전보다 작고 초라해 보인다. 날씨 때문인가, 아님 기분 때문인가. 입장료가 있는 것 같아서 들어가지는 않고, 성당 주변만 조금 얼쩡거렸다. 자... 그럼 이제 무얼 한다? 


평화의 문(Arco della Pace)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


코르두시오 광장(Piazza Cordusio)


지하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공기를 맞기 위해 배기구에 앉아 웅크리고 있는 비둘기들.


밀라노 대성당(두오모, Duomo di Milano)


페어에게는 저녁 무렵에나 가겠다고 했는데, 더이상 밀라노에서는 볼 것도 없고, 돌아다닐 기운도 없다. 빵이나 바나나를 계속 집어먹어서 배는 안 고프지만, 잠도 제대로 못잤고, 똥도 못쌌고, 샤워도 못했으니, 상당히 찝찝하다. 그저 쉬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아 기차역으로 가서 베르가모 행 표를 샀다. 기차표는 5.5유로니까 꽤 비싸지만 별 수 없다.


힘없이 베르가모에 도착해 페어가 알려준 주소로 찾아가 "딩동-" 벨을 눌렀다. 예정보다 훨씬 빨리 온 거라서 페어가 조금 놀랐고, 집에 페어의 남자친구 아델모가 같이 있어서 나도 뻘쭘했다. 페어는 다른 두 명의 여학생과 같이 살고 있는데, 페어 방에는 침대가 두 개여서 아델모가 들어와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손님으로 1주일간 지내도 되겠냐고 페어에게 부탁하는 바람에 아델모는 쫓겨나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참 미안하게 되었지만 여기에 오기 전에는 이런 상황을 전혀 몰랐다.


보통 자기 여자친구 방에 다른 남자가 들어와 함께 지낸다고 하면, 남자친구는 매우 화가 날 것 같은데... 아델모에게서는 그런 기색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정말 성인군자같은 남자일세. 아델모는 한참 동안 짐을 챙겨 나갔고(페어 왈: 어떻게 여기서 1주일 지낸 아델모 짐이 세계일주 하는 사람 짐보다 더 많니?), 아델모와 페어가 붙여 쓰던 두 개의 침대 사이에 간격을 두어서 나와 페어가 따로 잘 수 있도록 했다.


페어는 방콕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무척 잘해준다. 점심을 얻어먹고, 빨래를 하고, 창밖을 통해 어느새 파랗게 맑아진 하늘을 바라본다. 너무 행복한 자유시간! 오늘은 이렇게 가만히 쉬고 싶다. 


베르가모. 페어의 집에서 내다본 도시. 저 멀리 시타 알타(Città Alta, '업타운'이라는 뜻)가 보인다.


잘 정돈된 페어의 방. 문짝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서 이탈리아 분위기가 확 풍긴다.


저녁까지 쉬다가 모로코 출신의 페어 친구를 만나서 같이 "아페리티보(Aperitivo)" 바에 갔다. 아페리티보는 식전주라는 뜻인데, 아페리티보 바에 가서 음료를 한 잔 시키면 핑거푸드를 뷔페식으로 무제한 먹을 수 있다. 아니, 이렇게 말도 안되게 좋은 시스템이 있다니! 페어가 사준 5유로짜리 맥주를 마시며, 파스타, 구운 빵, 피자, 샐러드 등을 내키는 대로 주워 먹었다. 야호!


페어에게 베르가모에 있는 동안 아페리티보에만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아쉽게도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아페리티보였다.


페어의 모로코 친구는 검정색 뿔테 안경을 쓴 빼빼 마르고 예쁜 아가씨였는데, 신기하게도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하나! 둘! 셋!"이라고 외치며 정권 지르기 시범을 보인다.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니 어렸을 때 태권도를 배웠다고 한다. 남자친구가 불가리아 사람이어서 불가리아어와 러시아어도 조금 했다. 같이 있으면 웃음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였다.


셋이서 이런 저런 얘기를 재미있게 했다. 두 아가씨가 내 여행에 엄청난 흥미를 보이며 질문을 하기에 여행 얘기도 조금 풀어 놓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함께 쌀쌀하고 조용한 시내를 걸었다. 


오늘도 정말 긴 하루였구나.


'Macelleria'는 정육점이다. 페어는 이탈리아어를 잘해서 길가다 보이는 단어들을 설명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