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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영국

영국 헬프엑스: 루튼 공항 노숙, 템스 강, 옥스포드 하숙집 (여행 187일째)

"안녕하세요, 사과님, 당신도 하루 빨리 썩어서 나처럼 싹을 틔워 나무로 자랐으면 좋겠군요."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2017년 1월 21일 토요일

영국 루튼 공항(Luton Airport) - 옥스포드(Oxford)

[1] 루튼 공항 노숙: 늦은 밤, 비행기는 위험하다는 기분이 들 만큼 급강하를 하더니 거칠게 활주로를 긁으며 착륙했다. 다른 승객들도 무서웠는지 착륙이 끝나자 다같이 박수를 친다. 약간 불안했던 입국 심사를 마치고 들어선 루튼 공항은 모로코의 소피에게 들었던 것처럼 구질구질했다. 여기서 어떻게 아침까지 10시간을 떼우지? 누울만한 장소도 없고, 밤이 깊을수록 점점 추워진다. 새벽 1시까지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곧 공항은 조용해졌다. 나처럼 노숙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누가 과자와 콜라를 먹다 말고 의자 위에 버리고 간 것이 보였다.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청소하는 흑인 아주머니가 보더니 쓰레기통에 넣었다. 쓰레기통에는 커다란 꽃다발도 있었다. 주지 못해 버린 꽃다발일까, 받고 나서 버린 꽃다발일까. 점점 없어지는 사람들. 의자 팔걸이 부분을 피해 불편한 자세로 계속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잠이 들었는지 꿈도 꾸었다. 벌거벗은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여자(베라)였고 다른 한 명은 여자 몸매를 하고 있지만 수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남자였다.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알몸의 수염 남자를 여자로 착각해 홀린 것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춥고,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 흘러 아침이 되자, 공항에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공항 화장실에서 똥을 싸고, 옥스포드행 버스를 찾아 버스에 오른다.

[2]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영국의 아름다운 정경을 보며 옥스포드로 향한다. 이정표나 교통표지판이 순수하게 영어로만 되어 있는 것이 생소했다. 중간에 지나친 도시나 작은 마을들이 예뻤다. 건물들의 무거우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이 좋았다. 버스에 몇 시간이고 앉아 내키는대로 졸고 싶었지만, 곧 옥스포드에 도착했다.

옥스포드에 도착

겨울이라 추운 노숙자들

서로 다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건물들

예쁜 서점

[3] 템스 강(River Thames): 공기는 차가웠지만 태양빛은 따뜻했다. 맑은 콧물을 훌쩍이며 옥스포드 거리를 걸었다. 이층 관광버스, 택시, 노숙자, 조화롭고 단정하게 어우러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데이브의 집이 있는 처치 웨이(Church Way)는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폴리 브릿지(Folly Bridge, 愚昧橋)에서 템스 강으로 내려와 산책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강에는 조정 보트가 많이 있었다. 보트에는 노를 젓는 학생들과 마이크폰으로 지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산책로에는 자전거로 보트를 따라가며 감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를 젓는 여학생들이 왠지 멋있었다. 옛날 갤리선 노잡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강물 위와 강가에는 백조, 오리 등 각종 새들이 노닐고 있었다. 강변에는 계류되어 있는 주거용 보트도 많았다.

폴리 브릿지(Folly Bridge, 愚昧橋) 위

노를 젓는 학생들

주거용 보트의 홍학 장식

[4] 데이브(Dave): 데이브는 헬프엑스(helpx)를 통해 나에게 '옥스포드에서 청소를 도와주며 2주 동안 지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나는 그것을 수락해 옥스포드에 오게 되었다. 데이브는 옥스포드에 집을 두 개(각각 처치 웨이Church Way[1번집]와 유니온 스트릿Union Street[2번집]에) 소유하고 있고, 각 집마다 두 명 정도 하숙생을 받아 소득을 얻고 있었다. 이제 60살 쯤 된 데이브는 혼자서 집 두 개를 관리하는 것이 힘들었는지, 지속적으로 나같은 도우미(helper)를 불러 도움을 받고 있었다.

[5] 1번집: 데이브 집에 도착해서 우유와 설탕을 탄 홍차를 마시고, 똥을 한 번 더 싸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씻고 나서는 귀리죽(porridge)과 계란 토스트를 먹고, 우유와 설탕을 탄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한 숨 잤다. 1번 집에서 하숙하는 영국 학생과 중국 학생은 새로 온 도우미(나)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인사도 하지 않고 방으로 갔다. 보통 같은 집에 살면 "안녕" 정도는 하는게 정상인데, 여기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1번집에는 막스 에르만의 잠언시(Desiderata, 바라는 것)가 걸려있었다.

동네 산책

[6] 2번집: 잠시 쉬다가 데이브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2번집으로 갔다. 집 앞의 테스코(Tesco)에서 같이 장을 보고, 차를 마시고(영감님이 차를 자주 마신다), 저녁으로는 치킨 카레 요리를 해 먹었다. 데이브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 자기는 매일 명상을 하고 불교 철학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채식을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닭아 미안. 감사히 먹을테니 잘 소화되기를. 카레는 약간 싱거웠지만 맛있었고 달(dal, 렌틸콩 수프)도 맛있어서 남기지 않고 먹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영감님이다. 식사 후에는 1층의 조그만 거실에서 나란히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었다. 밤에는 대만에서 온 도우미가 돌아왔다. 이 헬퍼는 내일 떠나는데, 오늘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하고서는 늦게 왔다고 데이브가 불평을 했다. 대만 친구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잤다. 


잠언시 / 막스 에르만

세상의 소란함과 서두름 속에서 너의 평온을 잃지 말라.
침묵 속에 어떤 평화가 있는지 기억하라.
너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네가 알고 있는 진리를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라.
다른 사람의 얘기가 지루하고 무지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들어 주라.
그들 역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므로.
소란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피하라.
그들은 정신에 방해가 될 뿐이니까.
만일 너 자신을 남과 비교한다면 너는 무의미하고 괴로운 인생을 살 것이다.
세상에는 너보다 낫고 너보다 못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니깐.
네가 세운 계획뿐만 아니라 네가 성취한 것에 대해서도 기뻐하라.
네가 하는 일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그 일에 열정을 쏟으라.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것이 진정한 재산이므로.
세상의 속임수에 조심하되 그것이 너를 장님으로 만들어 무엇이 덕인가를 못 보게 하지는 마라.
많은 사람들이 높은 이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모든 곳에서 삶은 영웅주의로 가득하다.
하지만 너는 너 자신이 되도록 힘쓰라.
특히 사랑을 꾸미지 말고 사랑에 냉소적이지도 말라.
왜냐하면 모든 무미건조하고 덧없는 것들 속에서 사랑은 풀잎처럼 영원한 것이니까.
나이 든 사람의 조언을 친절히 받아들이고 젊은이들의 말에 기품을 갖고 따르라.
갑작스런 불행에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정신의 힘을 키우라.
하지만 상상의 고통들로 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말라.
두려움은 피로와 외로움 속에서 나온다.
건강에 조심하되 무엇보다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너는 우주의 자식이다.
그 점에선 나무와 별들과 다르지 않다.
넌 이곳에 있을 권리가 있다.
너의 일과 계획이 무엇일지라도 인생의 소란함과 혼란스러움 속에서 너의 영혼을 평화롭게 유지하라.
부끄럽고, 힘들고, 깨어진 꿈들 속에서도 아직 아름다운 세상이다.
즐겁게 살라. 행복하려고 노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