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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불가리아

불가리아 헬프엑스: 시골 마차 나들이 (여행 74일째)

2016년 9월 30일 금요일 불가리아 다보빅 - 라브네츠


[등장인물] 

기테: 덴마크 출신 50대 여성. 헬프엑스 호스트. 

플레밍: 덴마크 출신 50대 남성. 기테의 남편. 

조지 할아버지: 조그만 불가리아 마을의 70대 중반 노인.


1. (오전 8시, 집 앞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맑고 아름다운 아침이다. 아침마다 일기, 커피, 아침식사, 똥싸기 등 괜히 할일이 많다. 화장실에는 따로 문을 잠그는 장치가 없어서, 문이 닫혀 있고 불이 켜 있으면 사용중인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샤워는 1주일에 한두번 할 수 있다. 일기를 쓸 때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자세히 적고 싶을 때가 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어딘가 조급함이 있어서 빨리 끝내버리자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되면 네줄, 다섯줄에 쓸 내용이 딸랑 한줄로 줄어 버린다. 삶 자체도 그런걸까. 얼마든지 더 풍부하고 가득찬 하루, 한달, 일년, 일생이 될 수도 있는데, 그걸 그저 귀찮은 마음에 딸랑 한줄로 줄여버리는. 


2. 어젯밤 꿈에서는 우주선을 타고 돌아다니고, 어느 이름모를 항성계에서 슬롯머신을 하다가 돈을 많이 날려먹었다. 


간밤에는 플레밍과 별을 보면서 새로운 별자리들을 많이 찾았다. 스카이뷰(Sky View)라는 앱이 다른 앱들보다 보기 편하게 되어 있고 정확하고 쉬워서, 작은곰자리북극성, 염소, 산양, 물고기 두마리, 물병자리 등을 밤하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달만 보내면 머릿속에 별들의 지도를 그려보고, 몇년이 지나면 어떻게 별들이 움직이는지도 자연스럽게 알게될 것이다. 화성이 붉게 빛난다는 것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맑고 깨끗한 아침.


갈색 개가 '카일라'인지 '펄'인지, 오래되니 헷갈린다.


지금은 날씨가 좋지만, 겨울에는 무지 추워진다는 다보빅. 그리고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한 땔감.



3. 오전에는 카딩(carding, 소모: 양털을 가지런히 하는 작업)을 하며 보내고, 점심 식사는 어제 먹고 남은 호박죽, 기테가 해준 버섯구이, 토마토 구이를 먹었다. 기테와 플레밍은 평소에 채식을 하지는 않지만, 평소에 채식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고, 채식을 하는 여행자가 손님으로 오는 경우는 그것에 맞춘다고 한다. 내가 있는 동안에도 채식 위주로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 후에는 플레밍과 함께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맥주를 몇 캔 사왔다. 그리고 나서 햇볕을 쬐며 앉아 있는데 옆집 조지 할아버지의 뮤지카가 요란한 음악과 함께 도착한다. 뮤지카를 끌고 있는 말은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알록달록 주렁주렁 장식을 달고 있고, 조지 할아버지도 검정과 빨강이 멋지게 들어간 전통 복장을 차려입고 오셨다. 구멍가게에서 사온 맥주를 마차에 싣고 라스꼴까(разходка, 나들이라는 뜻)를 시작한다. 에-호.


조지 할아버지의 손은 커다랗고 투박하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드워프를 실물로 보면 이럴 것 같다. 술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74세라고 한다. 음악을 틀고 마차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 나도 신이 난다. 온 동네방네 시끄럽게 다니는게 약간 낯뜨겁기도 하지만, 옆 마을까지 가는 길에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인사해 준다. 양치기 아저씨는 손을 흔들다가, 뮤지카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춘다. 


말이 달리지 않고 타닥타닥 걷는듯 해도, 사람이 걷는 것 보다는 속도가 빠르다. 이렇게 마차를 끌고 다니며 대륙을 주유하고 싶다. 햇살이 따스하면서도 덥지 않고, 흔들리는 가로수들이 느릿느릿 뒤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단, 불가리아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니, 옆에서 마차를 끌고 있는 조지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기분이 든다.


라스꼴까를 시작한다.



쭉 뻗은 길을 따라 옆마을로 향한다.


저 앞에 양떼가 보인다.


소리쳐 인사하며, 뮤지카에서 나오는 음악을 따라 춤을 추던 양치기 할아버지.


나도 양치기가 되고 싶었다.




4. 그렇게 마차에 앉아 맥주캔을 비우면서 가까운 옆마을 라브네츠(Равнец)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돌아온 다보빅 마을에서는 니콜라이 댁에 들러서 쥬스도 얻어먹고, 포도도 한 송이 받고, 집을 구경한다. 대접받은 쥬스는 달콤했지만, 직접 만들고 저장해두는 것이어서 그런지 속에 하얀 벌레가 여러마리 꿈틀거리는게 보여 약간 걱정도 된다. 괜찮겠지. 시골 사람들에게서 투박함과 순박함이 느껴진다.


뮤지카와 뮤지카를 하루 종일 끌어준 말. 다보빅으로 돌아와 니콜라이씨 댁에 잠깐 들렀다.


뮤지카에 앉아 포즈를 취한 조지 할아버지. 마차의 장식과 그림이 아름답다.


니콜라이씨 집구경.




말이 땀을 흘리면 비누거품(lather) 같은 것이 나온다.



5. 오후 커피 시간이 끝난 후에는, 병아리콩으로 팔라펠(falafel) 만드는 것을 거들고, 샐러드 2종을 만들어서 배불리 먹는다. 설거지까지 마친 후에는 지난 1주일을 마무리하는 대화의 시간이다. 기테와 플레밍 두 분이 나에게 배운 것도 많았고 정말 좋았다고, 떠나는게 아쉽다고 말씀해 주신다. 나도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배우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지금까지는 헬퍼(helper, 도우미/봉사자)를 받을 때 1주일 제한을 걸고, 그 이상은 머물게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그 규칙을 바꿀 생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플레밍은 스카이뷰(Sky View)앱을 알게 된 것을 너무 좋아한다. 하늘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불빛이 지금까지는 인공위성인줄 알았는데, 앱을 통해서 그 빛이 국제우주정거장(ISS, International Space Station)이라는 것을 알았고, 같이 좋아했다.


그리고 다시 이런 저런 얘기들.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이면서도 얼른 들어가서 정리하고 쉬고 싶은 생각도 든다. 행복한 시간들, 느릿하고 여유롭고 느긋한 시간들이었지만 역시나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마당의 두더쥐 구멍.



팔라펠, 샐러드, 빵으로 맛있는 저녁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