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일주/불가리아

불가리아 헬프엑스: 도살에 대한 대화 (여행 76일째)


2016년 10월 2일 일요일 

불가리아 롬치(Lomtsi) 


[등장인물]

트레이시: 영국 출신 50대 여성. 헬프엑스(helpx) 호스트. 

: 영국 출신 50대 남성. 트레이시의 남편.


1. 아침 8시 6분. 2층 방. 역시나 실내는 따뜻하구나. 아니면 이 곳 날씨가 전에 있던 곳보다 더 따뜻한 건가? 확실히 단열이 되는지, 불에 타서 망가졌다가 다시 지어진 집인데도 따뜻하다. 게다가 방에는 전기도 들어오고 화장실까지 코 앞에 있으니 캐러밴에서 생활하던 지난 한 주에 비하면 조건이 꽤 좋아졌다. 1주일이라는 시간이 짧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엄청 많은 일들이 생길 수 있는 긴 시간이 될 수도 있다(위빠사나 명상할 때 느꼈듯이). 그러니 여기서도 배울게 많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지낼 곳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아, 위빠사나 명상 센터에 등록을 해둘까 생각했는데, 신청기일이 며칠 지난 지금 보니 이미 자리가 꽉 차있다. 한국에서는 자리가 많이 남았었는데, 유럽에서는 꽤나 인기가 있나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살 길을 찾아봐야지. 하지만 이미 경험했듯이, 걱정하고 계획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일은 알아서 풀리니, 나의 계획이 아닌 신의 계획과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자(물론 말로는 쉽지만 어려운 일이다). 


창고건물 옥상에서 본 지평선.


처트니(chutney)가 담긴 병. 트레이시는 각종 요리를 새롭게 시도해 보는 것을 좋아해 심지어 깍두기도 혼자서 만들어 두었다.처트니는 각종 야채를 새콤 달콤하게 절인 음식인데 맛있다.


집에는 그림자(Shadow), 곰(Bear), 애기(Kitten, 아직 이름 미정) 등의 고양이들이 지내고 있었는데, 관계가 매우 복잡한 녀석들이었다.



왼쪽 건물에서 토끼, 닭, 기러기, 거위 등이 지낸다.


2. 어제와 오늘은 F1 주말(Formula 1, 포뮬러 원)이라 공식적으로 일을 배정받지 않았다. 키가 크고 마른 체구에 머리는 길게 길러 뒤로 묶고 수염을 기른 (Paul)은 F1 자동차 경주의 광팬이어서(특히 폭스바겐 차를 좋아한다) 주말에는 일을 하지 않고 F1 경주만 본다. 나도 할 일이 없으니 오전까지는 뭐 도와줄 일이 없나 여기저기 트레이시를 졸졸 따라다니며 호두를 깐다거나, 설거지를 한다거나, 텃밭의 잡초를 뽑으며 애매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오후에 폴과 함께 다니면서 쓰레기 버리기, 장작패기(도끼로 나무를 때릴때는 나무토막의 윗부분이 아닌, 받침대로 쓰고 있는 아래의 나무를 목표로 때리라는 원리를 배움), 옥수수 낱알(kernel) 털기 등을 도와줬다.


폴의 목공실에서 목공예에 대해 얘기하던 것이 삶, 철학, 시스템, 은행, 자급자족, 전기 기술 등의 다양한 주제로 뻗어나간다. 폴과 대화를 많이 하면서 비로소 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느낌을 받는다.


아침 점심은 빵에 이것 저것 발라가며 혼자 먹는다(폴과 트레이시는 하루종일 커피와 담배만 하고 음식은 먹지 않다가 저녁 한끼만 먹는다). 어제 저녁에는 트레이시의 실험작 돼지감자 수프(고기를 좋아하는 폴은 질색을 했다)와 피자를 먹었고, 오늘 저녁에는 케일(kale)수프와 피자도우로 만든 빵, 감자 퓌레(puree), 삶은 당근, 돼지고기와 양파 등을 소스에 버무린 풀코스 요리를 대접받았다. 심지어는 설거지도 못하게 한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첫날의 어색함은 없고,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몇년전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수리를 시작해 집을 세운 폴과 트레이시. 지난 몇년간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각종 나무에서는 열매를 얻고 밭에서는 채소를 얻는다. 오른쪽에는 온실이 있다.


예전에 왔던 헬퍼가 지었다는 마당의 휴식공간. 실제로 쓰지는 않는다.


트레이시와 폴의 소유하고 있는 땅이 꽤나 넓다. 관리를 다 못하고 있어서 풀이 무성했다.




폴의 목공실.


이렇게 아무렇게나 쳐박혀 있는 잡동사니들이 묘하게 아름다운 폴과 트레이시의 집.


3. 저녁식사 시간에는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깊게 나눈다. 가축에 대해 얘기하는데, 큰 동물을 키우는게 어려운 이유가 유대감을 쌓는데 시간이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대감을 쌓아둬야 도살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으면 큰 짐승들은 힘이 세기 때문에 도살이 매우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유대감이 쌓인 상태에서는 트레이시가 동물에게 말을 하며 안심시키는 동안 폴이 동물의 목을 긋는다고 한다). '유대감이 쌓여야 죽이기가 더 쉽다'는 얘기가 좀 충격적이지만, 자신들이 섭취하는 짐승을 직접 도살하는 이들의 방식이 단순히 슈퍼나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다 먹는 것보다는 더 숭고하고 책임감 있고 인간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대화 중에 종교에 관한 얘기가 나왔는데, 폴이 "어떤 국가나 문화에서도 이유없이 동물을 해하는 것은 금기시 된다"는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트레이시나 폴이 동물을 단순한 '기계' 취급하는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고기를 먹는 것을 포기한다면, 힘든 사육과 도살, 비용, 감정 소모 등이 없어 훨씬 삶이 쉬워질텐데... 고기를 너무 좋아해 포기할 수 없다니 그 부분은 좀 아쉽다. 


그밖에도 너무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기에 모든 것을 기억할 수도, 기록할 수도 없지만, 어떻게 보면 산만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아름다운 집, 마당, 그리고 저 너머로 펼치진 풍경은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