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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불가리아

불가리아 헬프엑스: 돼지, 공동묘지, 조지 (여행 73일째)

2016년 9월 29일 목요일 불가리아 다보빅


[등장인물]

기테: 덴마크 출신 50대 여성. 헬프엑스 호스트.

플레밍: 덴마크 출신 50대 남성. 기테의 남편.

조지 할아버지: 조그만 불가리아 마을의 70대 중반 노인.


1. 맑은 아침. 오전 7시 46분.

요즘 음식을 잘 먹고, 치즈나 버터 등의 유제품을 많이 먹는데도 아침마다 똥이 깔끔하게 잘 나온다. 중국이나 태국에서 한때 그랬던 것처럼 다 부숴진(뭉쳐지지 않은) 음식물이 덜 소화된 듯한 똥이 아닌, 점토처럼 잘 뭉쳐진, 하나된 똥... 아쉽게도 닦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나오는 건 아니지만 아주 좋은 편이다. 배변 상태를 보면 우유를 소화하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나, 콧물이 매일 질질 나오는게 이상해, 우유를 하루 이틀 안 마셔보니 훨씬 낫다. 콧물이 나더라도 손으로 닦아도 상관 없을 만큼 깨끗한 콧물이 나온다. 확실히 우유의 영향이 있는 듯 하고, 기테도 그렇다고 말한다.


산책을 하다가 개들이 길에다가 마음대로 똥오줌을 싸는 걸 보면, 그러고도 뒤를 닦을 필요 없이 신나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또 땅에 떨어져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들의 냄새를 킁킁 맡아보고는 주워먹는 것을 보면, 동물들의 자유로움을 본받고 싶다.


2. (꿈)

간밤 꿈에는 중국 시닝에서 카우치서핑 호스트였던 치준도 만나고(링크: 중국 시닝 여행), 사람들이 단체로 지내는 방에서 오랜만에 많은 친구들(중국 여행 당시 만난)을 봤다. 그 중에는 같이 히치하이킹을 하던 대만 여행자 줄리(샤오마오)도 있었는데, 왠지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줄리에게 같이 남미 여행을 하자는 연락이 왔는데, 그것이 부담되서 그런 꿈을 꾼 것 같다.


3. 오늘도 어제 갔던 제너럴 토셰보(General Toshevo) 마을로 향한다. 기테와 플레밍이 좋아하는 불가리아 식당에서 샐러드 3개, 주요리 3개, 빵 2개, 음료수 3개를 주문했는데, 총 20레브(약 10유로) 정도가 나온다. 지난 며칠 동안 음식을 남기지 않고 잘 먹는, 또 많이 먹는 인상을 심어둔 덕분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남은 음식을 싹싹 먹었다(돼지고기만 빼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여기저기서 쇼핑을 한다. 먼저 정육점에 가서 어떤 짐승의 심장과 간(아마도 돼지) 등을 산다. 사람이 잘 먹지 않는 부위이므로 가격이 좀 더 싸고, 이 싼 부위로 플레밍이 개 먹이를 요리한다. 슈퍼에서는 커피콩 갈은 것을 사고, 옆집 조지 할아버지에게 선물할 2리터짜리 맥주를 산다. 플레밍이 던지는 불가리아어에 마을 상점 직원들과, 주민들이 모두 미소를 짓는다. 이렇게 기테와 플레밍은 마을의 구성원이 되어 간다.


한국에서는 오륙천원 정도 될 커다란 맥주가 여기서는 천원 이천원밖에 안된다. 물론 불가리아에서는 교사 월급이 250유로라고 하니까 한국과는 맥주값, 임금 모두 차이가 많이 난다. 덴마크에서 기테에게 지급하는 연금은 월 1500유로 정도라는데, 덴마크에서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지만, 이곳 불가리아에서는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는 돈이다. 게다가 기테와 플레밍 부부는 헤프지도 알뜰하다. 앞집 조안나 할머니네 집은 5000유로면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테와 플레밍이 살고 있는 집은 월세가 200유로 정도라는데, 급하게 구하는 바람에 꽤 비싸게 얻은 편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내가 모아온 푼돈으로도 마당이 딸린 커다란 집을 살 수 있다. 가족과 떨어져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소박한 삶에 만족할 수 있다면 이민을 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앞집 조안나 할머니 댁 현관. 포도넝쿨이 마당을 뒤덮고 있고, 현관문에는 수십년 전 돌아가셨다는 조안나 할머니 남편 사진이 붙어있다.


기테와 플레밍이 살고 있는 다보빅의 위치. 동쪽으로는 흑해, 북쪽으로는 루마니아 국경이 있고, 남서쪽으로는 근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인구 9만명의 도브리치가 있다.


토셰보의 버스 터미널. 여기서도 다른 도시로 갈 수 있지만 아무래도 노선 및 운행 수가 훨씬 적다.


식당에 도착.


메뉴에 보이듯이 식사가 매우 저렴하다. 수프는 1유로도 되지 않고(2레브 = 약 1유로), 샐러드도 마찬가지.


요리한 음식도 1.5-2유로, 약 2000원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그래서 음식을 잔뜩 시켰고, 원없이 먹었다. 수프에 빵을 적셔 먹기만 해도 맛있고, 양도 충분할 듯 하다.


2리터가 넘는 맥주들이 한병에 1000-1500원 선이다. 물론 맥주 맛도 좋다.


불가리아 전통 과자들.



4.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한두시간 낮잠을 자고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그 후에는 옆집 조지 할아버지가 와서 커다란 낫(scythe) 쓰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이 큰 낫은 한국에는(아마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농기구인데, 유럽에서는 기본적인 농기구인듯 하다. 그리고 사신(Grim Reaper)이 들고 있는, 죽음이 연상되는 도구이기도 하다. 


저녁으로는 호박수프를 준비한다. 나는 양배추를 잘게 썰고, 당근은 갈아 샐러드를 준비하고, 호박죽에 들어갈 생강을 간다. 기테는 빵을 썰어 기름에 볶고 소금을 뿌려 호박수프와 함께 먹을 양식을 준비한다. 멋진 저녁식사가 끝난 후에는, 평소와 같이 산책을 한다. 집시 가족이 사는 집과 공동묘지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조지 할아버지 집에 놀러간다. 


저녁에는 바삭바삭 튀긴 빵을 호박죽에 넣어 샐러드와 함께 먹었다.


저녁 산책 중에 집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을 지나간다. 얼기설기 만들어진 것이 누가봐도 집시들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마을 끝자락에 있는 공동묘지에 왔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사진과 메시지를 출력하고 코팅해서 매년 새로 붙여 놓는 관습이 있다.


묘지 풍경




아름다운 해질녘 풍경




산책길의 기테와 플레밍





5. 조지 할아버지가 뮤지카(스피커와 USB를 달아서 음악이 나오게 개조한 할아버지의 마차에 붙인 이름)를 구경시켜주고, 포도 등으로 만드는 불가리아의 독한 술인 라끼아(rakia)를 대접해 주셨다. 라끼아는 너무 독해서 다시는 안 먹을 생각이다. 구석구석 집 구조도 살펴보고, 세간도 구경하고, 플레밍의 통역을 통해 조지 할아버지의 자녀들 얘기도 듣는다. 조지 할아버지가 방에 들어가 반짝거리는 권총을 하나 들고 나와 멋진 포즈를 취한다. 플레밍의 통역에 따르면 조지 할아버지는 총으로 딱 두가지만 쏜다고 한다. "들개와 집시(stray dogs and gypsies)." 피식 웃음이 나오는 농담이지만, 불가리아(그리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의 집시에 대한 인식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어둠이 내린 고요한 마을. 집으로 돌아와 플레밍과 별을 보며, 별에 대해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설거지를 도와주고 나만의 공간인 캐러밴으로 돌아온다. 기나긴 하루였는데도, 아직 오후 9시도 되지 않아 두어시간 책을 읽을 여유가 있다. 술을 마셔서인지 배가 꾸륵꾸륵 거리지만 다음날 아침까지 참기로 하고 잠이 든다.


오늘 사온 맥주를 가지고 조지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할아버지가 권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신다. 총으로 쏘는 것이 딱 두가지 있다고 한다: 들개와 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