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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키예프: 둥지상자의 하루 (여행 59일째)

2016년 9월 15일 목요일 우크라이나 키예프(Kiev, Київ)


콘스탄틴: 카우치서핑 호스트.

베로니카: 콘스탄틴의 아내. 둥지상자의 실세.

맥스: 둥지상자 공동체 멤버중 한 명. 마른 팔다리가 문신으로 뒤덮여 있고 진한 검정색 수염을 하고 있다.

요가선생님: 레옹의 동그란 선글라스를 낀 조용한 분위기의 요가 선생님.


1. 강변의 찬 바람을 막아주는 티피(tepee)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돌오돌 떨며 침낭과 그 위를 덮은 겹겹의 모포를 빠져 나온다. 새 아침의 시작이다. 날씨가 급작스럽게 추워져서, 둥지상자의 나무 오두막이나 텐트에서 자던 공동체 사람들 중 몇몇은 더 이상 여기에서 지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여기서 밤을 보낸 몇몇의 긴머리 남자들이 일어나 명상하고, 강변을 뛰어다니고, 턱걸이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우선 화장실로 간다. 큰 일을 보려고 화장실의 맨 끝 칸으로 들어가 바지를 내리고 쪼그려 앉는다. 좌변기에 익숙해진 허약한 허벅지는 쪼그린 자세로 5분 앉아있는 것도 힘겨워한다. 화장실 변기칸에는 따로 문짝이 달려 있지 않기 때문에, 누가 들어올까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똥 싸는 것을 남들에게 보이기 꺼려하는 것은 단지 관습적인 이유다. 누구나 똥을 싸는데 죄를 짓기라도 한 것처럼 똥을 싸는 모습을 감출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의 어떤 동물도 똥 싸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배변은 먹는 것이나 숨 쉬는 것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문짝이 달려있지 않은 화장실에서도 당당하게 똥을 눌 수 있어야 하지만, 머릿속 생각과 실제의 삶은 일치되기가 어려운지 후다닥 똥을 싸고 화장실을 나온다.


다른 한 쪽 나무가 우거진 곳에는 간이 샤워실이 만들어져 있다. 나무 기둥 네 개를 세우고, 무릎에서부터 2미터 정도까지 높이로 방수포를 둘러 싸서, 그 안에 들어가 있을 때는 바깥에서 볼 수 없도록 해 두었다. 이틀동안 씻지 못한 찝찝함을 지워내려 샤워실 안으로 들어간다.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서 발가벗은 채로 덜덜 떨며 차가운 물줄기로 몸을 씻는다. 주변에서는 잎사귀가 파랗게 달려있는 나무들이 샤워실 안을 내려다 보고 있다. 똥 싸고 샤워까지 하니 매우 상쾌한 아침이다. 


다른 남자 둘과 하룻밤을 보낸 티피(tepee) 천막 안. 밤의 찬 공기를 조금이나마 뎁혀보고자 돌덩이 하나를 밤새 가열하고 있었다.


왼쪽의 칸막이들 사이에는 문짝도 없고, 배설물이 흘러가는 하수도도 없지만, 어째서인지 정성들여 바닥과 벽면에 타일은 깔아 놓은 남자 화장실.


샤워를 마치고 수건과 속옷을 햇볕에 말린다. 


2. 둥지상자가 위치한 곳은 키예프를 관통하는 드네프르 강에 떠있는 섬인데, 이 섬 안에 또 다른 작은 호수가 있다길래 가보기로 한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끔 지나가지만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한강이나 여의도의 산책로처럼 인공적인 구조물과 표지물을 세워 놓고 콘크리트나 나무로 길을 깔아 놓은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 남겨져 있는 모습이 너무 맑고 아름답다.


호숫가에 다녀온 후에는 요가 선생님과 다른 우크라이나 여자와 셋이서 요가를 하며 평화의 시간을 갖는다. 요가를 한 후에는 태극권도 조금 배웠는데, 중국에서 같이 히치하이킹을 하던 줄리에게 배운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각자의 집에서 둥지상자로 나와있다. 설거지를 조금 도와주다가 쉬러 나와서 오두막 뒷뜰에 앉아 있는데,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처럼 수염을 기르고 마른 몸과 팔다리에 문신이 많은 친구 맥스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 온다. "둥지상자는 올해 초에 시작했는데, 날씨가 조금 더 추워지면 영업을 못해. 그래서 가게 문을 닫으면 다같이 여행을 갈꺼야." 어제 공동체 회의의 주제 중 하나가 어디로 여행을 갈지 정하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터키의 카파도키아로 갈 것 같다고 한다. 맥스가 "우크라이나에 얼마나 더 있을거야?"라고 묻는다. 여기서 며칠 더 있다가, 오데사(Odessa)를 거쳐 몰도바(Moldova)로 나갈 거라고 하자 우크라이나 서부와 동부의 아름다운 숲과 산에 대해 얘기한다. "예전에 혼자 여행을 하면서 숲속에서 잔 적이 있는데, 근처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서 도망친 적이 있어." 흥미진진한 맥스의 모험 이야기를 들으며, 애초에 나도 이렇게 자연과 자유를 찾아 여행을 시작한 것 같은데 지금은 왜 무엇을 봐도 큰 감흥이 없고 먹을 것과 잘 곳만 생각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맞는가 보다.


둥지상자(Скворечник, 스크보리에츠닉)로 가는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있는 섬


쓰레기통. 아무래도 분리수거 같은 것은 없는듯 하다.


전깃줄, 전봇대, 가로등 등이 없어서 깊은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파란 하늘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개울


실제로 보면 훨씬 더 아름답다


여기가 그 호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산책도 어느정도 했으니 슬슬 둥지상자로 돌아가기로 하자.


3. 어떻게 그 긴 오후 시간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와이파이가 없어서 인터넷이 필요할 때마다 이사람 저사람에게 부탁해 와이파이 핫스팟을 열어달라고 해야 한다. 오데사로 가는 교통편과, 오데사 숙소, 오데사 카우치서핑 때문에 연락하고 알아볼 것이 많은데 인터넷이 없으니 이렇게 무력해진다. 요가선생님(레옹)에게 오데사행 버스표를 예약해야 된다고 인터넷을 부탁하자, 인터넷을 열어주면서 기차가 더 싸다고 표를 알아봐 준다. 키예프에서 오데사까지는 거리가 약 500km인데, 요가선생님이 알아봐 준 표는 130그리브나, 한국돈으로 환전하면 겨우 5500원이다. 기차표도 준비하고, 미리 예약해 뒀던 오데사의 호스텔에 연락해 날짜도 변경하고, 카우치서핑 호스트에게 연락처와 주소도 받았다. 


그리고 나서 어제와 같이 베로니카가 잼 병을 헝겊으로 포장하는 것을 도와주고, 추위에 떨다가 바지를 한 겹 더 입고, 모래사장의 스크린에 프로젝터로 상영하는 재미없는 인도 영화를 보는둥 마는둥 하다가, 설거지를 더 도와준다. 그러다가 수프와 바나나를 얻어 먹는다. 얻어먹을 때가 가장 좋다. 정해진 끼니 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음식을 둥지상자에서 사 먹을 것도 아니고, 근처에 먹을 것을 살만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니 누군가가 먹을 것을 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다. 둥지상자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기들이 주인이니 마음대로 음식을 요리해 먹거나 차를 끓여 먹는데, 나는 그저 군침을 흘리며 냄새를 맡을 뿐이다. 이렇게 아웃사이더의 하루가 간다.


하나 반가운 것은, 미국의 오리건(Oregon) 주에서 온 여행자를 만나 같이 묵게 된 것이다. 강변 모래사장에서 송아지만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얼쩡거리는 이 친구에게 콘스탄틴이 말을 걸었고, 일을 도와주면서 지내다가 가도 된다고 제안한 것이다. 이 여행자는 이탈리아, 독일, 그리스를 거쳐서 우크라이나로 왔는데, 나처럼 예산이 작다. 음식값으로 하루에 1~2달러가 예산이고, 해먹을 두 개 갖고 다니며 나무에 해먹을 설치해 노숙한다. 독일은 물가가 비싸지만 커다란 빵이 하나에 30센트씩 판다는 좋은 정보를 전해 듣는다. 어젯밤에도 이 섬에서 해먹을 걸고 잤다고 한다. 


거의 오후 3시가 되어서 오늘의 첫 식사를 한다. 얻어 자는 주제에 염치없이 밥 달라는 말은 못하겠고, 옆에서 얼쩡거리다가 콘스탄틴이 "배고프니? 밥 먹을래?"하고 친절하게 물어봐 주면 먹겠다고 대답한다. 콘스탄틴이 직접 맛있는 채식 요리를 만들어 준다.


밥을 먹고 있는데, 예쁘고 조그맛 차주전자와 찻잔에 차도 끓여주고, 케이크도 가져다 준다.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먹으라고 둔 것 같은데, 너무 맛있어서 눈치를 보며 두 개를 먹었다.


베로니카를 도와서 잼 단지를 헝겊으로 예쁘게 포장한다.


설거지를 깨끗하게 끝낸 주방. 접시 수십 수백개와 조리기구가 싱크대 아래, 위, 옆으로 놓을 공간이 없을 만큼 쌓여 있었다.


강변 모래사장에서는 다들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며 재미없는 인도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있다.


채식, 요가, 음식 등 많은 부분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은듯한 둥지상자. 주방의 한 켠에 힌두신들의 그림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