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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오데사: 벼룩시장, 포템킨, 오바마의 소녀 (여행 62일째)

2016년 9월 18일 일요일 우크라이나 오데사(Odessa, Одеса)


[등장인물]

보람(가명): 호스텔에서 만난 한국 여자분. 믿기 힘든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1. 아직 어두운 이른 새벽 기차가 오데사에 도착한다. 기름진 걸 많이 먹어서 그런지 꾸륵거리는 배를 진정시키며,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길거리의 문 닫힌 환전소에서 깜박거리는 네온사인의 환율을 보며 호스텔을 찾아간다. 지금 찾아가는 호스텔의 이름은 달라스(Dallas). 원래 2박을 예약했는데, 야간 열차를 이용하면서 2박이나 할 필요가 없어졌고, 호스텔이 미리 연락해 1박으로 바꿔뒀다. 지도에 표시된 곳을 향해 어둡고 인적이 드문 거리를 걷는다. 고맙게도 기차역에서 멀지 않다. 


다행히 잠겨있지 않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러 개의 건물이 보인다. 그 중 빨래가 많이 널려있는, 호스텔 느낌이 나는 곳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 밤손님처럼 문을 조용히 열어보니 문이 열린다. 불이 꺼져 깜깜한 조그만 로비에는 접수대로 쓰는 듯한 책상이 놓여있고, 그 옆 소파에는 어여쁜 여인이 웅크려 자고 있다. 그리고 조그만 고양이가 얼쩡거린다. 이른 새벽에 깨우기도 뭐해서, 일단 화장실이나 쓸까하고 화장실을 확인하는데 소리를 들었는지 소파에서 자던 여인이 일어난다. 졸린 눈으로 웃으면서 여권을 받아 장부에 이름을 적고 윗층 침실의 침대를 안내해 준다. 숙박비는 90그리브나(3600원)로 예약을 했는데, 100그리브나(4000원)를 받고 거스름 돈을 주지 않는다. '엇, 이거 왜 안 거슬러주지?' 하고 좀 섭섭했는데, 나중에 보니 여기 1박 값이 원래 100그리브나인데 나는 인터넷으로 좀 더 싸게 예약한 거라 다른 금액으로 예약한 줄 몰랐던 것이었다. 


이렇게 새벽 6시에 체크인하고, 씻고, 자다가, 아침 8-9시쯤 되니 시끄럽길래 일어나 아래층 로비로 내려간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확인하고 입력하고 있는데, 한국인 여자분이 말을 건다! 나보다는 나이가 좀 있는 분인데, 친근하고 말이 좀 많으시다(이분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기로 하고 보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겠음). 여기서 몰도바(Moldova)로 갈 예정이라고 하니, 보람씨가 몇 번 가봤다며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의 티라스폴(Tiraspol)에 관한 정보와, 버스표 사는 곳도 알려주신다. 


오데사에서 몰도바의 수도 키시나우(Chișinău)로 가는 경로에는 트란스니스트리아라는 국가가 있는데, 국제사회에서 인정 받지 못하고 몰도바의 일부로 간주되는 미승인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된 국가이다(대만과 비슷하다). 버스가 오데사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를 통과해 몰도바에 들어가면 정식으로 몰도바의 입국 도장을 받지 못하고 입국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이 복잡해진다. 그래서 버스표를 살 때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국경을 돌아서 키시나우로 들어가는 버스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


새벽 5시반, 오데사에 도착한 기차.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반팔을 입고 노숙하는 아이가 보인다. 무언가 해야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만 무거운 마음만 가지고 아이를 지나친다.


호스텔에서 2-3시간 짧게 휴식을 취하고 일어난다.


2. 비가 그치고 나서, 오데사에서의 짧은 체류시간 동안 할 일이 많다. 포템킨 계단(Potemkin Stairs)도 가보고, 환전도 하고, 버스표도 사야 한다. 시장 구경을 하고 중심지로 가는 길에 바로 환전소가 보이길래, 100달러 지폐를 보여주며 10달러만 환전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 바로 90달러를 거슬러 준다(환율은 거의 모든 곳에서 1달러당 25.5그리브나). 와우, 최고다. 이제 단위가 작은 달러가 많이 생겨서 국가별로 10달러나 20달러씩 조금조금 환전할 수 있다. 이제 버스표만 해결하면 된다. 앞으로 예정된 카우치서핑과 헬프엑스만 아니면 이런 도시에서 먹고 싸며 며칠을 쉬어갈 수도 있겠지만(심지어 몇 달도 가능하다. 하루 숙박비와 식비를 합쳐서 5-6달러면 충분하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5번 트램(tram)을 타고 버스정류장까지 가서 키시나우로 가는 표를 산다. 안내센터 직원도 친절하고, 제복을 입은 경비 아저씨도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와서 도와준다. 러시아와는 차원이 다른 친절함이다.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는 물건파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사람들이 집에 있던 잡동사니들을 다 가지고 나와 자리를 깔고 앉아서 판다. 공구, 옷, 뱃지, CD, 인형, 책, 포크, 자전거, 타이어 등 별게 다 있다. 없는게 없는 것 같지만 막상 나에게 필요한 텐트나 매트, 해먹은 안 보인다. 


시장 풍경



기차역 바로 옆에 버스터미널이 하나 있었으나 여기서는 몰도바에 가는 버스가 없는 듯하다.


오데사에서도 키예프와 마찬가지로 환전소가 많이 보인다.


조그맣고 낡은 버스안 풍경


버스 문 밖으로 물건을 팔러 나온 사람들이 보인다. 일요일마다 열리는 장인듯 하다.


고양이 한마리가 몸을 둥글게 말고 꿈을 꾸고 있다.


알록달록 다양하고 자질구레한 물건들까지 팔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가난한 동유럽과 남미 국가들에서는 자연스럽게 중고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었다.




자전거는 꽤나 비싸다. 1500그리브나면 한국돈으로 약 6만원.


행사를 하는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이 골목 저 골목 상인들의 행렬이 이어져 있다.




골격이 떨어져나간 자동차가 왠지 멋있다.


교회 건물은 화려하지 않고 간소하다.





꽤나 좋아보이는 식당인데 가격표만 봐서는 저렴해 보인다.


3. 포템킨 계단은 별 특별한 것이 없지만(영화 <전함 포템킨>의 포템킨 계단 장면은 오데사에 방문한지 1년이 지나서야 봤다: 링크), 흑해를 따라 걷다 보니 항만지역이 끝나고 해변이 나온다. 바다가 거칠다. 파도가 방파제를 멀리까지 넘어 보행로를 적신다. 인도네시아의 발리(Bali)에서 혼자 갔던 타나 롯(Tanah Lot)이라는 곳이 걷는 내내 생각났는데,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가는 길에 '발리 해변(Bali Beach)'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카페의 음식과 음료들은 60-80그리브나(4-5달러)로 유럽임에도 불구하고 동남아 물가이지만 가난한 여행자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사실 난 그리 가난하지도 않다. 특히 이렇게 물가가 싼 나라에서는 펑펑써도 될 만큼 돈이 넉넉하다. 하지만 여기서 마음대로 쓰다가 물가가 비싼 나라로 가서, 혹은 돈이 떨어지고 나서 비참해지느니 처음부터 끝까지 배고픈 것이 낫다. 약간 모자란 것에 익숙해지면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된다.


포템킨 계단에 놀러온 듯한 어린 학생들. 다들 모델처럼 늘씬하고 예쁘다.


포템킨 계단


너덜너덜한 길거리



노숙자가 살고 있는 듯한 숲의 공터


항만지역을 지나 계속 걸어간다.



활 연습장인듯 하다. 남자가 화살통에 화살을 담고 있다.


흑해


파도가 넘쳐 나무판을 다 적셔 놓았다.


신비한 노인. 마치 성자 주변에 짐승들이 모여들듯 참새와 비둘기들이 주변에 얼쩡거린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개. 철벅거리며 신나게 이쪽 저쪽으로 뛰어다닌다.





강한 파도때문에 발리의 타나 롯(Tanah Lot)이 떠올랐는데, 신기하게 발리 비치라는 표지가 보인다.


길을 막고 있는 호랑이


본네트 위의 호랑이



쓰레기통에 쓸만한 것이 없나 항상 살펴보는 습관.



4. 마트에서 야채, 과일, 빵, 과자를 잔뜩 샀는데(물론 싼 것만 신중히 골랐다), 겨우 2달러다. 야채는 특히 거저나 마찬가지다. 양파나 오이 같은 것은 영수증에 찍힌 금액이 1-2그리브나이니 50원, 100원 주고 산 셈이다. 호스텔에서 만난 한국 여자분 보람씨에게 기름을 빌려 볶아 먹으니 환상의 맛이다. 생으로 야채를 먹다가 기름에 볶기만 해도 이렇게 맛있는데, 소금이랑 후추를 조금만 치면 얼마나 더 맛있어질까? 그런데 한국에 있을 때처럼 배가 부르면 이런 기본적인 것들에 감사하지 못하고, 더 맛있는 음식, 더 맛있는 식당, 더 자극적이고, 더 달고, 더 향기로운 것들을 찾게 된다.


5. 보람씨에게 믿기 힘든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보람씨 얘기를 믿기 힘들고, 보람씨가 살짝 미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세상에 미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영화 <토탈 리콜(Total Recall, 1990)>이나 <컨스피러시(Conspiracy Theory, 1997)>처럼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분은 자기 자신이 하는 말을 100%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 퀸튼이 말한 자기가 요정이라고 믿는 아주머니(링크)처럼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진실일 것이다. 


보람씨가 식용유를 빌려준 덕에 저녁을 맛있게 먹으며, 여행자들 사이에 주고 받는 기본적인 질문들-어디서 오셨고, 얼마나 계셨고, 어디로 가시는지 등-이 오간다. 들어보니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등 동유럽 일대에서 꽤나 오래 떠돌아 다녔고, 한국에 못 간지가 몇 년 된 듯하다. 왜 한국에 안 가시냐고 하니, "제가 말씀드리기 좀 곤란한 상황이 있어서요..."라고만 대답한다. 그 밖에도 대화 중간중간에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딱히 궁금하지는 않지만 예의상 대화에 맞장구 쳐주기 위해 묻는 질문들에 그런식으로 한참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내시더니, "저기... 이거 진짜 말씀드리면 안되는 건데요. 제가 말하는 것 어디가서 얘기하시면 안되요?" 하며 보람씨의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보람씨는 모든 CCTV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거대자본의 유대계 회사가 메리어트 호텔, 옷가게 탈의실 등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보람씨의 누드를 촬영해서 판매한 돈으로 8조 달러(8 trillion dollars)를 벌었다고 한다. (참고로 한국의 2016년 국내총생산(GDP) 금액이 1.4조 달러였고 미국은 18.5조 달러였다.) 그래서 이 엄청난 수익(한국 GDP의 5배가 넘는)을 내는 보람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정부가 항상 감시를 하고 있고, 보람씨에게는 사생활이 없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난민(refugee) 처지이고, 스위스, 프랑스 등의 국가들은 망명을 받아주지 않아 이렇게 떠돌고 있는 신세란다. 유명한 CNN 앵커와 헐리우드 스타들 중 일부가 보람씨를 구제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지만, 누군지는 알려줄 수 없다고 한다. 박근혜(당시 대통령)가 보람씨 체크카드를 정지시켰다고 하고,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보람씨를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보람씨는 감시를 피하기 위해 슈퍼마켓에 갈 때 근처로 안 가고 멀리 있는 곳으로 간다. 오바마가 보람씨 누드를 보고 너무 좋아했기에 아는 사람들은 보람씨를 '오바마의 소녀(Obama's Baby)'나 '8조불 소녀(8 Trillion Dollar Baby)'라는 별명으로 부른다고 한다. 게다가 보람씨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엄청나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더 이상 주한 미군에게 임금을 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보람씨가 이와 같이 숨어사는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트럼프가 당선되는 것만이 희망이라고 한다. 


이 글을 옮겨 쓰는 시점에서는 박근혜도 물러났고 트럼프도 당선되었으니 보람씨는 자유를 되찾았으려나?


다른 얘기가 나오면 약간 수다스러운 평범한 사람과 다를게 없는 보람씨. 나를 보면 명문대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조카가 생각난다며, 조카 자랑을 시작한다. 오, 신은 아시겠지, 도대체 보람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호스텔로 돌아오자 맹수 두마리가 문을 지키고 있다.


슈퍼에서 사온 음식으로 가방을 채운다.


이걸 다 해서 2달러가 나왔다.


호스텔의 아기 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