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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키예프: 도시 산책과 보름달 축제 (여행 60일째)

2016년 9월 16일 금요일 우크라이나 키예프(Kiev, Київ) 


[등장인물]

콘스탄틴: 카우치서핑 호스트. 

요가선생님: 레옹의 동그란 선글라스를 낀 조용한 분위기의 요가 선생님.

퀸튼(Quinton): 오리건(Oregon)에서 온 젊고 가난한 여행자.


1.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요(Ask, and it shall be given to you). 와이파이 핫스팟을 열어달라고만 하면 바로 열리는 것을, 누구한테도 부탁하지 못하고 쩔쩔매다가 겨우겨우 용기를 짜내어 와이파이 좀 열어달라고 하니, 자비로우신 요가 선생님이 한참동안 열어 두고 계신다. 실컷 인터넷을 썼다. 그러면서도 먹을 것을 달라는 말은 잘 나오지 않아서 하루종일 주방에서 얼쩡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누군가가 뭘 먹겠냐고 물어봐 주기만을 기다린다. 그래도 다행히 물통이 있는 곳은 찾아서 물은 마실 수 있다.


아침일기를 쓰며 러시아에서 사온 커다란 부블리카(bublik)를 먹는다. 


평화로운 아침, 강변에 앉아있는 퀸튼.


오늘도 시끌벅적한 밤이 되겠지만, 아침에는 고요한 둥지상자.


배낭을 메고 강변을 걷는 중년 남자.


2. 오리건에서 온 여행자 퀸튼 덕분에 하루를 지루하지도 뻘쭘하지도 않게 보냈다. 모래사장에 앉아 흘러가는 새파란 강물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정오쯤 되어 퀸튼과 함께 다리를 건너 섬을 빠져 나온다. 언제까지고 밥을 차려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으니, 먹거리를 조달하기 위해 시내로 향한다. 


이틀만에 돌아온 도심의 길거리에서는 푸틴 얼굴이 그려진 화장지를 팔고 있고,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나 커피 등을 파는 가판대가 10미터 간격으로 하나씩 있다. 아이스크림이나 소시지빵 같은 것이 15-20그리브나(600-800원) 정도에 팔고 있는데, 퀸튼은 기차역 근처에서 8그리브나(320원)짜리 에그롤이 들어있는 빵을 사먹었었다며 더 싼 음식을 찾아보자고 한다. 나도 돈 아끼는 거라면 대환영이니 둘이 마음이 잘 맞아, 도시를 헤매며 싸구려 음식을 찾는다. 그러다가 전철역 근처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는 곳이 있길래, 우리도 눈치를 보다가 줄을 선다. 둘 다 아침도 안 먹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맛있는 냄새와 허기를 참기 힘들다. 10그리브나(400원)짜리 핫도그를 하나씩 사서, 길에 서서 핫도그를 먹고 있는 다른 키예프 사람들 틈에서 맛있게 먹는다. 하나를 먹고 있는 사람도 있고 두개를 먹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어째 점심으로는 모자라 보인다. 그래도 점심값이 400원이면 괜찮지.


사람들에게 마트가 있는 곳을 물어물어, 한참을 헤맨 끝에 빌라(BILLA)라는 슈퍼마켓을 찾았다. 퀸튼은 남은 예산을 계산해 보면, 앞으로 우크라이나에서는 하루에 3달러씩만 써야 된다는데, 3달러면 78그리브나 정도이다. 다행히 슈퍼마켓에서 가격을 보니 그리 비싸지 않다. 특히 몇몇 채소나 과일은 거저 준다고 할만큼 싸다. 시간 가는줄 모르고 각각 식료품을 잔뜩 쇼핑한다. 나는 40그리브나(1600원) 어치를 샀는데, 퀸튼은 꽤나 과소비를 해서 150그리브나(6000원) 어치를 샀다. 40그리브나로 레몬티 맥주, 비스킷, 피자빵, 사과, 토마토, 바나나 등을 샀으니, 무지 저렴한 것인데, 퀸튼은 초코렛이나 과자 같은 것을 많이 사서 비용이 많이 들었다. "난 먹는걸 좋아해서 음식에 돈을 너무 많이 써..."라며 퀸튼이 멋쩍게 얘기한다. 슈퍼마켓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생존에 필요한 빵과 야채, 과일 등은 항상 저렴하다(물론 사치품인 수입과일은 예외). 반면 케이크, 초콜릿, 과자, 아이스크림, 고기, 술 등 생존과 건강에는 전혀 필요 없지만 혀의 쾌락을 위해 먹고 마시는 것들은 비싸다. 이런 것들을 사고 즐기기 위해 회사에 다니고 돈을 벌고 구걸하는데, 그저 간소한 음식과 음료에 만족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삶이 간단해질까? 어쨌든 나와 퀸튼은 혀와 감각적 쾌락을 위해 레몬티 맥주를 한 병씩 들고 나왔고, 마트 앞에 앉아 비스킷과 빵을 안주로 달달한 맥주를 마신다. 마트 앞의 조그만 공터에는 비둘기에게 밥을 주는 사람도 많고, 남루한 옷차림의 실업자로 보이는 사람들도 몇몇 있다. 실업자로 보이는 아저씨들은 퀸튼에게 담배를 한 개비씩을 얻어가며 주름진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가게 앞에 앉아서 시간을 떼우며 많은 얘기를 듣는다.


시내로 돌아 나오는 길, 언덕의 아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준다. 퀸튼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18살 소년이다.


여러가지 기념품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 왼쪽 귀퉁이에 쌓여있는 두루마리 휴지에는 푸틴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푸틴의 얼굴로 똥을 닦겠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높았다.


하나에 10그리브나(400원)짜리 핫도그를 팔던 가게. 줄이 무지 길었지만 점심시간이 다 지나가서 그런지 사람이 많이 줄어들었다.


길거리 풍경


핫도그 가게 앞에서 핫도그를 먹는 사람들


길거리의 건물


레몬 맥주 1병과 비닐 봉지의 모든 과일, 야채, 빵이 40그리브나(1600원)이다.


퀸튼과 나의 하루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슈퍼마켓


3. 지금까지 지나온 중국, 카자흐스탄, 러시아에서는 사람들의 서툰 영어를 들으며 힘들었는데, 반대로 여기서 만난 퀸튼은 영어를 너무 유창하게 해서 알아듣기 힘들다. 일단 말이 많아서 쉬지 않고 말을 하는데다가, 18살짜리 아이들이 쓰는 각종 인터넷 속어와 줄임말과 자기 친구들 이름을 해맑게 떠벌이고 있으니, 매번 말을 끊고 그게 뭐냐고 물어볼수도 없어 그저 답답함을 쌓아 둔다. 여기에 오기 전 그리스에 있을 때에는 해변가에 해먹을 걸어 놓고 며칠을 지냈다는데, 그곳은 날씨가 따뜻하고 비가 오지도 않아서 좋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매일 해먹에 누워 있는 퀸튼을 보고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그 사람의 친구들과도 며칠을 보냈단다.


그 밖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퀸튼이 알고 있는 자기가 요정이라고 믿고 있는 아주머니 이야기와(나와 퀸튼의 공통된 의견은 아주머니가 그 사실을 굳건히 믿는 한 그것은 적어도 그 아주머니에게는 진실이라는 것이었다) 시간여행자 이야기, 퀸튼이 미래에 섬을 사서 지을 리조트에 대한 구상, 자기가 믿고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우주에 대한 이야기 등등... 퀸튼은 사실 미국에 있을 때 만난 엘리제라는 여자아이를 따라 이탈리아로 갔고, 이탈리아에서 함께 살면서 엘리제의 가족이 하는 일을 도와 줄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탈리아에 오자마자 엘리제에게 차였고, 갈데가 없는 참에, 그리스에 있는 다른 여자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친구가 독일에 가면 버켄스탁(Birkenstock) 샌달이 5유로, 10유로 밖에 안하니 사가지고 그리스로 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독일로 갔는데 막상 독일에 가보니 버켄스탁은 무지 비쌌고,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로 그리스로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싼 비행기표를 찾아서 우크라이나까지 온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온 후에는 너무 저렴한 이곳 물가에 놀랐지만, 빈털털이 여행자 신세여서 저렴한 물가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맥도날드에서 하루에 100달러씩 벌던 얘기를 하며 아쉬워한다. 여기서는 하루에 10달러만 있어도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지붕 아래에서 잘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맥도날드에서 일을 할 때에는, 손님이 콜라와 햄버거 등을 시키면 기계에는 세트메뉴로 입력하고 돈은 단품 가격을 받는 수법으로 하루에 20달러 정도씩 빼돌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번은 대마초를 잔뜩 피우고 약에 취한 상태로 돈을 빼돌리는 것이 적발되었고, 그 이후로는 돈을 빼돌리는 것도 대마초를 피우고 일을 하는 것도 그만 두었다고 한다. 나도 몇년 전 죽을 고비를 넘긴 이야기를 해주자, 그런 경험을 한 것이 행운이라며 부럽다는 퀸튼. 그러고 보면 모든게 지나가 나서는 모험담이고 웃음거리이다. 군대에서의 서글프고 비참한 순간들, 무임승차하다가 걸려서 끌려가던 일, 고등학교에 몰래 들어가 난리치다가 경찰에게 잡힌일 등등.


퀸튼이 쓰는 성냥갑의 그림이 예쁘다.


한참 마트 앞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여행자로 보이는 남자가 보인다. 이 남자는 어디서 하룻밤을 보내려는지.


4.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공원에 들러서 체스와 카드놀이를 하는 노인들을 구경한다. 중국에 있을 때 공원에서 장기와 마작을 하는 아저씨들을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기차역 바로 근처에는 구질구질한 상점들이 잔뜩 들어서 있는 시장가가 있다. 음료수, 주류, 초콜릿, 차, 커피, 과자 등을 파는 가게들이 있는데, 가격이 말도 안되게 싸다. 퀸튼은 미국에서는 20달러, 30달러 하는 보드카를 여기서는 5달러, 10달러면 살 수 있다며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장사를 해서 돈을 벌 궁리를 한다. 하지만 둘다 빈털털이이기 때문에 결국 구경만 실컷하고 산 것은 별로 없다. 퀸튼은 10그리브나(400원) 어치 쿠키를 사면서 동전 모양 초콜릿 몇 개를 얻고, 나는 7그리브나(280원) 짜리 초콜릿 바를 하나 사면서 조그만 초콜릿을 서비스로 받는다. 오백원 쓰면서 덜덜 떠는 불쌍한 녀석들... 하하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가서 10달러씩 쥐어주고 싶다. 제대로 된 포장도 없이 비닐에 싸여 있는 싸구려 초콜릿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너무 달콤하고 진하고 맛있다.


상점가를 나와 기차역을 통과해 퀸튼이 지난번에 7그리브나에 에그롤 빵을 사먹었다는 광장 쪽으로 간다. 가게에서 생맥주를 팔고 있는데, 가격을 보니 14그리브나(약 560원) 씩이나 된다. 그래서 생맥주는 포기하고 가판대에서 팔고 있는 9그리브나(360원)짜리 병맥주를 하나씩 사 들고 근처에 앉아 웨하스, 초콜릿, 빵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안주 삼아 마신다.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동안 구걸하는 사람들이 열 명 정도 거쳐갔다. 처음 세 명에게는 1그리브나 씩 주다가(고작 40원이다!) 1그리브나 지폐가 점점 떨어져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빵이나 다른 먹을 것을 건넨다. 어떤 아이들은 먹을 것을 주자, 싫다며 끈질기게 그리브나를 달라고 한다. 심지어는 초콜릿도 싫다고 하는 아이들을 보니 왠지 슬퍼진다. 퀸튼은 돈을 구걸하는 사람에게 심술을 부리고 싶은 마음에 돈은 안주고 담배를 한 개비씩 내밀거나, 유럽에서 쓰고 남은 25센트짜리 동전, 그리스에서 주워온 예쁜 돌멩이 등을 준다. 사실 담배 한 개비가 1그리브나 정도 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25센트 유로 동전도 7그리브나가 넘는 큰 돈이다. "나도 내가 이러는게 나쁜 걸 알아. 그런데도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면 심통이 나서 어쩔수가 없어." 이렇게 말을 해도 퀸튼은 얼굴만 봐도 유쾌함과 긍정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좋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하고, 어머니는 조지 워싱턴의 후손이라는 퀸튼. 우크라이나에서의 예산이 하루 3달러이고 해먹과 천막에서 잠을 자는 주제에 주말에 20달러짜리 오페라를 예약해 놨다는 녀석.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 값은 예산에 잡혀있지 않지만, 대사관이나 항공사에서 일하는 친척을 통해서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멋진 녀석이다.


시장의 과일들


체스를 두거나 수다를 떠는 노인들. 그러고 보니 할머니들은 없고 할아버지들만 있다.


저 많은 노인들이 나이 칠십 팔십이 되도록 체스를 두었을텐데, 얼마나 실력이 출중할까.


백발의 노인들. 한국의 노인들은 많이들 염색을 해서 그런지 전철에 타면 늙은 아저씨 아줌마들이 보이지 노인들이 보이지는 않는다.


키예프의 멋진 건물


상점가의 군것질거리들


술값도 매우 싸다. 여기 보이는 것들 중 가장 비싼 것이 3200원(80그리브나)


와인도 싸다. 물론 나는 와인 사먹을 돈이 없지만.


커다란 초콜릿과 캔디들


허름한 상점가 모습


신나게 쿠키를 고르는 퀸튼과 손님이 와서 신난 가게 아주머니.


감자가 들어가 있는 튀김빵. 무지 맛있고 싸다.


퀸튼과 9그리브나(360원) 짜리 병맥주를 마시며 여느 부랑자들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역 앞 풍경


다시 한참을 걸어 섬의 둥지상자로 돌아가는 길. 거리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퀸튼은 "음악은 정말 중요해. 음악이 분위기를 결정하거든. 음악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져"라며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든다. 


5. 둥지상자에 돌아오니 파티가 한창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금요일이구나. 여행을 하다 보니 매일이 휴일이어서 요일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월요일이 두렵지 않고 금요일이 반갑지 않다. 하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금요일 밤을 싹싹 긁어 남김없이 즐기려는 모양이다. 음악과 춤과 음식과 음료와 모닥불. 그래도 술, 담배, 약물 없이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콘스탄틴이 커다란 망원경으로 달을 보다가 나와 퀸튼을 보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생일 선물로 받았다는 커다란 천체 망원경을 설치해서 보름달을 볼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몇몇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아이들도 보인다. 눈 양쪽에 만화경(萬華鏡)을 대고 "우오오오오오오아~"하고 탄성을 지르며 입을 쫙 벌리고 좋아하는 남자도 있다. 나도 만화경을 한 쪽 받아서 강 건너편의 풍경과 알록달록 빛나는 다리를 만화경에 비춰본다. 그러다가 설거지를 하고, 차를 마시고, 다시 파티가 계속 된다.


크림 반도(Crimea)에서 온 사람들을 몇 명 만났다. 크림 출신의 여자 한 명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 공화국 합병 이후 돌아갈 곳이 없어서 키예프의 지인과 지내고 있다. 또 다른 크림 출신 중년의 남자는 크림 반도가 합병되면서 집과 재산 모두를 잃었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고 한다. 이 남자의 집 잃은 설움과 조용한 분노가 러시아의 새 영토를 자랑하던 보바의 웃음이 겹쳐진다(링크: 러시아에서 만난 보바). 


금요일 밤의 보름달 축제(full moon par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