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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헝가리

헝가리 부다페스트: 걸어서 세계속으로 & 거대 건축물 (여행 103일째)

2016년 10월 29일 토요일

부다페스트 


꿈 속에서 까마득하게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현실 세계에서는 단지 몇 분이 지나가는 경우가 있다. 오늘 하루가 그랬다. 24시간 안에 담겼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긴긴 하루였다. 6시간의 걷기 6시간의 전쟁과 평화


데이빗과 헤어진게 바로 오늘 아침이라니!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신사분, 그동안 함께해서 영광이오. (It was nice hosting you, gentleman.)"


데이빗은 언제나 나에게 젠틀맨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고, 젠틀맨 눈에는 젠틀맨만 보이나 보다. 그동안 받기만 한게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선물할 것이 없나 생각하다가, 데이빗이 얼마 뒤 한국에 간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참고로 데이빗은 2016년 5월 방송된 "걸어서 세계속으로: 헝가리 - 봄! 음악에 취하다"에 출현했다.)


"데이빗, 내가 한국 커피 한 잔 사줘도 되겠니?"


동유럽과는 다르게 한국은 커피 한 잔도 비싸다. 지갑에는 중국에 있을 때 한국 여행자에게 위안을 환전해 주고 받은 만원짜리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언제 한국에 돌아갈지도 모르면서 쓸데없이 가지고 다니는 돈이다. 만원짜리 한장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건네 주었다.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건네 주었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아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이지만 데이빗에게 주면 따뜻한 커피 한잔이 될 수도 있고 떡볶이나 호떡이 될 수도 있다.


"땡큐 젠틀맨! 소중하게 쓰겠소. 그럼 좋은 여행 되시오! (Bon voyage!)" 데이빗과 마지막으로 미소를 교환하고 단단한 악수를 한 후 집을 떠난다.


일주일 동안 마음 편하게 잘 놀았다. 이제 다시 여행의 시작이다. 이제 기차를 타러 서쪽 역으로 향한다. 땅이 약간 젖어 있어 걷기가 불편하고 (물을 밟으면 신발 속으로 물이 들어옴), 가방도 꽤나 무겁다. 기차역까지는 4-5km 정도 되는 거리인데 금방 지쳐 버렸다. 이 치쳐버림으로 인해 '산길을 통해 20km를 걸어서 에스테르곰에 도착한다'는 처음 계획을 기각하고 레아니바르(Leanyvar)라는 곳까지 (에스테르곰에서 16km 거리) 가는 기차표를 끊게 된다. 에스테르곰까지 가는 기차표와는 300포린트(약 1200원) 정도 차이가 나는데, 이 1유로를 아끼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길을 지나야 하는지는 곧 알게 된다. 


기차타기 전 기차역 주변에 있던 스포츠용품점 데카트론에서 소변을 보려고 들어갔으나 화장실을 못 찾았다. (기차역에서는 화장실을 쓰려면 돈을 내야 했던 것 같다.) 개찰 후, 참아왔던 소변을 기차 안 화장실에서 해결하고 나오니 기차가 곧 출발한다. 차창 밖의 흐린 하늘을 보며 약간 심란하다. 맘편히 잠들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걸어야 할 길을 20km에서 16km으로, 산길이 아닌 도로로 타협한 것이 찝찝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구글 지도에 나타난 GPS위치를 보며, '한 정거장 전에서 내려서 원래 계획대로 20km를 걸을까'하고 고민을 했다. 하지만 엉덩이를 들지 못해 결국 표를 끊은 레아니바르에서 내린다. 이건 아주 좋은 결정이었다.


이 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걷기 전 가방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플랫폼 벤치에 홀로 앉아 오렌지와 빵 남은 것을 약간 먹었다. 기차역 옆으로는 커다란 굴뚝이 솟아 있었다. 굴뚝을 지나 마을 언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가방은 무겁고, 갈길은 멀다. 목적지인 에스테르곰을 향해 곧바로 걸어야 할 것 같지만, 구글 맵에 표시되어 있는 이름없는 언덕에 올라가고픈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하여 잠시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구름이 꽤나 짙게 끼어 있지만, 저 멀리 지평선 끝자락에는 햇빛이 보인다. 이제 겨우 오후 12시-1시 사이인데도 어두워서 오후 4-5시는 된 것 같다. 


언덕 위 들판은 마치 오래전 꿈에서 봤던 것처럼 가슴이 먹먹하게 그리운 풍경이다. 한국의 산과는 다르게 나무는 없고 풀이 많이 나 있어서 그대로 드러누워 팔다리를 뻗고 싶었다. 언덕 위의 이름모를 조그마한 예배당세 개의 십자가 상을 구경한 후, 본격적으로 15km의 도보여행을 시작한다.


이름없는 언덕 풍경.


이름모를 언덕 위 예배당.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공동묘지를 지난다. 사람들이 꽃을 많이 갖다 놓아서 아름답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할로윈이어서 그런 것이었다.) 자동차도 사람도 없는 조용한 길을 따라 걷다가 도로를 만났다. 왕복 2차선이지만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다. 여기서부터는 도로 가장자리에서 걷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 차들이 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로 왼쪽에서 걸었다. 다음 마을인 도로그(Dorog)를 향해 한참을 걷다가, 옆에서 차들이 쌩쌩 달리는게 싫어서, 도로와 나란히 나 있는 철길 옆으로 건너갔다. 자갈이 밟히는게 불편하지만 기차가 지나다니지 않아서 한적하고 좋다. (방심하고 철로 위를 걷다가 내려왔는데 갑자기 기차가 한 대 지나가서 깜짝 놀랐다.)


꽃으로 가득한 공동묘지.


고요한 들판.


처음엔 차도를 따라 걷는다.


좀 더 조용한 철길 옆으로 옮겼다.


건너편에서 사람들 몇명이 산책하고 있는 길이 보여 그쪽 길로 건너간 후 도로그(Dorog)라는 마을의 구석으로 들어간다. 마을(village)이라기 보다는 소도시(town) 규모의 제법 큰 곳이어서 마을 안에서도 꽤나 걷는다. 지도에 전망대(view point)라고 표시된 곳이 있어서 가 보았는데, 올라갈 수 없는 붕괴된 구조물만 있었다. 슈퍼마켓 리들(Lidl)에서 싼 빵을 잔뜩 샀다. 빵을 먹으면서 교회와 공원과 건물들을 지나 걷는다. 우물우물하며 걸을 땐 지루함도 피로함도 없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에는 격투기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었다.


마을 풍경.


어딜가도 쓰레기통을 뒤지는 노인이 보인다.


마을의 작은 교회.


버려진 건물. 잘 곳이 없으면 이런 곳에서 비를 피할 수 있을까?


차도에서 벗어나 비포장길을 통해 북쪽으로 향한다. 또다시 조용한 길. 상수도로 보이는 파이프가 길을 따라 나란히 뻗어 있었고, 중간중간 공사중인 구역도 있었다. 이곳을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무가 우거진 지역을 벗어나자, 저 멀리 에스테르곰 방향에 커다란 교회 건물(Esztergom Basilica)이 우뚝 서 있다.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까마득한 거리에서 원근감을 무시하고 그 건물 하나만 달랑 비현실적으로 솟아 있었다. (헝가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자 가장 큰 교회라고 한다.) 거대한 교회 건물 방향으로 다시 한참을 걷는다. 신기하게도 멀리서는 보이던 건물이 다가갈수록 다른 건물들과 지형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걷고 걷고 어깨와 허리의 아픔을 견디며 걷고 걷고 걷는다. 그리고 또 걷는다. 조금씩 시간은 흘러가고 조금씩 거리는 줄어들어, 마침내 에스테르곰에 도착한다. 어깨와 다리가 쑤신다. 


숲길을 빠져 나오자 저 멀리 에스테르곰 바질리카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가정집 문 앞에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에스테르곰에 도착! 주말이라 그런지 가게 문은 거의 닫혀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다.




언제부터인가 구름은 걷히고 하늘은 맑아져 있었다. 저물어 가는 태양이 주황빛으로 비추고 있는 황토빛 언덕의 절벽과 성벽 위에는 조그만 하얀색 교회 건물이 보였다.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고, 도착 예정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냥 스쳐 지나가기 힘든 풍경이다. 그리하여, 경련이 일어나려는 왼쪽 종아리를 주물럭거리며 언덕을 오른다. 내일 이 시간에 무얼 하고 있을지 모르니, now or never, 지금 아니면 다음은 없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