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일주/헝가리

헝가리 부다페스트: 마법의 가을, 예쁜 간판, 할머니 채식 버거 (여행 102일째)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부다페스트

 

오늘은 아름다운날. 아침부터 하늘이 파랗다. 어제 집에 늦게 돌아온 데이빗을 깨우지 않고 뮤슬리를 오트 밀크에 조용히 말아먹은 후 집을 나선다. 지도에서 확인한 부다페스트 서쪽의 산에 가려고 한다. 212번 버스가 산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해 뒀지만, 아침의 기분에 따라, 발걸음을 따라, 본능을 따라 버스를 타는 대신 걸어간다. 햇살과 파란 하늘 덕분에 걷는 맛이 난다. 걷다가 다리 밑 노숙자가 살고 있는 곳을 지나쳤다. 침실로 사용하는 듯한 매트리스가 있고, 화장실로 사용하는 듯한 공간에는 똥무더기가 쌓여 있다. 나도 그 옆에 오줌을 쌌다.

 

 

일주일 내내 흐리더니 떠날 때가 되니 하늘이 파랗게 갰다. 그리고 부다페스트는 더 예뻐졌다.

 

 

노숙자가 지내고 있는 듯한 고가차도 밑 공간

 

들고 나온 빵이랑 오렌지도 먹으며 걷는다. 태국 방콕에 살 때 돈을 아끼려고 걸어다니던 것처럼, 걷고, 걷고 또 걷지만, 그곳처럼 덥고 습하지 않아 목마르지도 않고 걷는데 큰 불편함이 없다. 걷고 걸어 철길 위를 지나고, 도시 중심부에서 멀어지자 사람들이 점점 더 적어진다. 더 이상 관광객을 찾을 수 없는 길을 지나, 점점 오르막이 되는 길을 따라 걷는다. 서울에서 해방촌을 찾아 언덕을 계속 오르던 기억이 난다. 확실히 도시를 벗어난 것 같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도 마주치고, 가볍게 인사도 건넨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했는지... 참 좋다. 

 

 

산으로 가는 길에는 간판이 예쁜 가게들이 많이 보였다. 가게를 차리면 이런 간판을 달고 싶다.

 

 

나무에 도보여행 길 (성지순례 길) 표식도 그려져 있었다.

 

 

하얗고 뾰족하게 솟은 교회 건물이 노랗게 물든 나무들과 파란 하늘과 근사하게 섞여 있었다.

 

그렇게 2시간이 넘도록 걷고, 걷고, 걸어서 212번 버스 종점에 도착한다. 여기까지 걸었으니 일단 버스비는 아꼈다. 그리고 걸어오면서 예쁜 가게들, 동네 시장, 교회, 낙엽이 깔린 길 등의 한적한 가을 풍경을 실컷 구경했다. 여기서 길을 따라 좀 더 걸어가니, 감시탑처럼 생긴 타워가 보이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니 공원 (산림욕장) 입구가 나왔다. 언덕을 올라오면서 고도가 꽤나 높아졌는지, 부다페스트 시 전체가 내려다 보였다. 공원 이름은 노르마파(Normafa Park)였다. 오는 길은 한적했는데, 도착해 보니 기차도 다니고,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음. 도저히 쓸 수가 없다. 마법으로 그려낸 듯한 숲길의 색깔, 낙엽 냄새, 나뭇잎들, 사람들의 조용한 대화 소리와 새소리. 길은 노란 낙엽들로 덮여 있었고 소풍 온 유치원 아이들은 낙엽을 줍고 있었다. 유치원 선생님 중 한명은 비닐봉투에 낙엽을 한 보따리 주워 담아가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낙엽으로 미술 수업을 하려는 것 같았다. 한 가족은 노랗게 장판이 깔린 나무 아래에서 가족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적당히 새어나오는 햇빛이 사진찍기에 완벽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숲길을 따라 걷는다. 중간중간 나무에는 칠해진 색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이 페인트 칠도 풍경과 잘 어우러져 보기 좋았다. 낙엽 덮인 길을 계속 따라가니 성탑이 하나 나왔다. 들어가도 되는 곳인지 몰라서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있는데, 아빠와 어린 딸이 커다란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길래 따라 들어갔다.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보니, 층마다 전망대가 있었다. 한층 한층 들러서 한바퀴씩 돌아보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멀리까지 뻗은 도시를 내려다 보았다. 이제 오늘 할일은 다 했구나! 내려오며 바닥에 설치된 조명 쪽을 보니 무당벌레 시체가 잔뜩 있었다. 밤에 불빛을 따라 왔다가 여기에 붙어서 죽어버린걸까?

 

 

공원 입구에서부터 도시 전체가 내려다 보인다.

 

 

유치원 아이들이 낙엽을 줍고 있었다.

 

 

황홀한 숲길.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나뭇잎들.

 

 

전망대에 올라왔다.

 

 

 

 

무당벌레 시체가 많았다.

 

데이빗과 약속이 있어서 오후 3시까지 부다페스트 시내로 돌아가야 한다. 전망대에서 부터 숲길을 지나쳐 다시 공원 입구로, 그리고 언덕배기에 있는 동네로, 기찻길과, 다리로, 3시간 동안 걸어온 길을 다시 걸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기나긴 6시간의 걷기도 (8시 45분부터 2시 45분까지, 편도 13km) 일기장에 적으려니 딸랑 한줄이구나. 예전에 알마티에서 걷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전글 보기카자흐스탄 알마티: 호수 탐험 (여행 32일째)] 이런 경험들 덕분에 걷기에 자신감이 생기고 한계를 조금씩 늘리게 된다. 그리하여 내일은 20km 정도를 걸을 계획이다. 아무래도 난 히치하이킹 보다는 하이킹을 좋아하는 듯하다. 말이나 당나귀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돌아가는 길. 계단에 오래된 낙엽과 새 낙엽이 뒤섞여 있다.

 

 

이 가게 간판도 너무 예쁘다. 가게를 차린다면 꼭 이런 간판을...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나우 강까지 돌아왔다.

 

3시에 데이빗과 '할머니 햄버거 가게'에서 만났다. 가게 이름은 마리카 네니(Marika neni)인데 데이빗과 친한 백발 할머니가 혼자 운영하시는 곳이다. 데이빗이 할머니 공과금 납부 등 심부름을 하고, 잘 챙겨드려서 항상 데이빗에게 햄버거를 공짜로 주신다고 한다. 덕분에 나도 공짜 햄버거를 얻어 먹게 되었다. 햄버거가 크고 가격도 저렴해서 인기가 많았다. 파트타임으로 채식을 하고 있는 데이빗과 나를 위해 할머니가 특별히 호빵맨 머리만한 야채 버거를 만들어 주셨다. 천천히 즐기고 싶었는데 데이빗은 일이 있다고 급하게 먹는다. 결국 데이빗을 먼저 보내고 나 혼자 조금 더 먹다가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인터넷을 하고 노느라 시간이 금방 갔다. 혼자만의 자유시간! 지난번 했던 요리를 복습하고, 과일을 손질해서 쥬스를 만들고, 커피 마시고 띵가띵가... (아주 행복해!) 어찌 그리 빨리 지나가 버렸는가, 행복한 자유시간! 데이빗은 밤 늦게 돌아왔다. 부다페스트 마지막 밤. 이제 곧 작별의 시간이다. 일주일 동안이나 이렇게 대접을 해주어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진 더보기2018/05/09 - [사진첩] -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