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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헝가리

헝가리 에스테르곰: 황금빛 언덕 & 전쟁과 평화 (여행 103일째)

2016년 10월 29일 토요일

에스테르곰


(지난 글에서 이어서...)


지친 다리를 움직여 언덕을 오른다. 아... 그리고 언덕 위. 이 성취감과 감동을 어찌 표현할까. 그렇게 세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헤죽 웃음이 나왔다. 교회 종소리가 울리고 태양은 저물어가며 주황빛을 뿌렸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주었다. 더 이상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은,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고픈 순간. 마을. 낮은 건물들 사이로 뾰족 뾰족 솟아오른 교회의 첨탑. 산. 햇빛. 그리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언덕 위 하얀 교회(St. Thomas Chapel), 그리고 거대한 성당(Basilica of Esztergom). 그리고 도나우 강강 건너편 슬로바키아로 넘어가는 다리. 아! 아무리 적어봐야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길이 없으니 종이 낭비다. (만약 기차를 타고 바로 왔다면,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을 느낄 수 있었을까?)


언덕을 내려와 카우치서핑 호스트 가보르(Gabor)의 집으로 간다. 언덕을 올라갔다 오느라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백발이 섞인 중년 미남 가보르는 내가 도착할 시간에 맞추어 다과를 준비해 놓았다. 따뜻한 차와 달콤한 간식거리를 티테이블에 두고 우아한 티타임을 갖는다. 가보르에게 걸어오면서 느낀 감동을 어떻게든 전달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 그저 "에스테르곰 이스 쏘 뷰티풀! 릴리 뷰티풀! (에스테르곰 정말 예쁘다. 진짜 예쁘다!)"라고 말했다. 가보르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에스테르곰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야"라고 대답했다. 땀에 찌든 상태에서 깨끗한 방의 우아한 티테이블에 앉아 있자니 좀 불편하다. 약간 조용하고 어색하게 차를 마시고 과자를 먹다가, 샤워를 하고 방에서 조금 쉰다. 


가보르가 내어 준 방은 가보르의 아들이 쓰던 방이다. 아들은 지금 기숙학교에 들어가 있고, 가보르는 이 집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아들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방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방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가보르가 영화를 보겠냐고 묻기에 OK 했다.


"보고 싶은 것 있니?" 가보르가 가지고 있는 동영상 목록을 넘기며 묻는다. "음, 글쎄요..."


"<전쟁과 평화> 봤니? 이번에 BBC에서 새로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원작에는 못 미치지만 꽤 잘 만들었어." 가보르가 말했다.


"네! 저 톨스토이 정말 좋아해요. <전쟁과 평화>는 못 읽어봤는데 추천하는 사람이 많아서 항상 궁금했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럼 이걸 보자." 


그렇게 <전쟁과 평화> 1편이 시작되었다. 별 생각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내용을 정확히 따라가기 힘들었다. 한편이 끝나자 가보르가 "원 모어? (한편 더?)"라고 묻는다. "예스!"라고 대답하고 이야기는 계속 된다. 


드라마를 보다가 쉬는 시간에 가보르가 가지 요리를 준비했다. 요리를 먹으면서 드라마를 계속 본다. 그리고 이야기 속으로 점점 빠져 든다. "원 모어?" 가보르가 더 보고 싶어하는 눈치고, 나도 재미가 있어서 "예스!"라고 대답한다. <전쟁과 평화>의 내용은 막장 드라마 같으면서도 인상적인 장면이 정말 많았다. 증오, 사랑, 돈, 명예, 질투, 용서, 욕망, 우정, 의무, 후회... "원 모어?" 약간 피곤하긴 하지만 이야기는 계속된다. 벌써 연속으로 네 편째 보고 있다. 한 두 편만 보고 말 줄 알았는데. 밤은 점점 깊어진다. 이야기는 점점 고조되어 간다. 


"사실 오늘이 서머타임이 끝나는 날이어서 오늘 밤엔 한 시간이 더 생겨." 가보르가 말했다. 서머타임이 해제되면서 오늘 밤에 시간이 한시간씩 과거로 당겨지고, 오전 1시에서 한시간이 흐르면 오전 2시가 되는 것이 아닌 다시 오전 1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에 여유가 생기니 전쟁과 평화를 계속 보자는 가보르. 그렇게 6시간이 흘러갔다. <전쟁과 평화>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6시간에 압축된 그 모든 인상적인 이미지들이 두뇌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6시간 동안 이야기속 인물들은 경험하고, 사랑에 빠지고, 고통을 겪고, 나이를 먹고, 만나고, 헤어지며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난 6시간 동안 꿈을 꾸듯 그것을 지켜 보았다. 6시간 동안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다. 시간에는 참 신비한 구석이 있다.


가보르는 <전쟁과 평화>를 책으로도 이미 여러 번 읽었고, 드라마도 다시 보는 거라고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언이 "<전쟁과 평화>를 읽어라"였고, 가보르는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러시아에서 '보바'와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책은 어땠어요?"라고 물어보니 가보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건 읽어야해. 읽어보면 알꺼야.


세상의 어느 누가 한 권의 책을 이렇게 강렬하게 추천했던 적이 있던가? 전쟁과 평화는 꼭 읽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