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일주/헝가리

헝가리 에스테르곰: 꽃다발, 파이프 오르간, 타우 십자가 (여행 104일째)

2016년 10월 30일 일요일

헝가리 에스테르곰


배경음악 듣기(새창):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왈츠


서머타임이 끝났다. 


핸드폰 시간에 서머타임 해제가 자동으로 반영되는 줄 모르고 시간을 바꿔 놓아서, 아침 7시 10분에 일어난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8시 10분이었다. 전날 새벽 늦게까지 <전쟁과 평화>를 봐서 그런지 꽤나 늦잠을 잤다. 침대에서 나와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가보르 아저씨와 같이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일요일. 독실한 카톨릭 교회 예수회 신자인 가보르 아저씨는 차를 타고 에스테르곰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예수회(jesuit) 교회에 간다고 했다.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굳이 나를 데려가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나는 혼자서 에스테르곰거대한 바질리카를 구경하러 가기로 했다.


파랗고 노란 아침이다. 평화로운 일요일 고요한 길거리. 자동차 엔진 소리, 공사장 드릴 소리, 핸드폰 가게의 소란스런 음악 대신, 하늘 소리, 강 소리, 나무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만 도시를 조용히 울린다. 길을 따라 바질리카 쪽을 향해 걷는데, 중절모에 긴 코트를 입은 할아버지가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앞에서 걷고 계신다. 노인과 꽃다발과 노란 나뭇잎과 파란 하늘과 낮게 떠오르는 태양. 너무나 맑은 풍경이다.


'일요일 아침부터 꽃을 들고 어디에 가는 걸까? 하늘나라에 가신 할머니 묘지에라도 가는 걸까?'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호기심도 생겨 가만히 할아버지를 따라가 보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묵직하고 느릿하게 바질리카 방향으로 걸으시는 할아버지. 바질리카의 왼쪽에 뚫린 아치를 통과해 대성당 뒷편 노란 낙엽 장판이 깔린 공터로 들어간다. 할아버지가 멈춰 선 곳은 누군가의 묘지가 아닌 성모상 앞이었다. 새로 준비해 온 꽃을 잠시 옆에 내려 놓고 오래된 꽃들을 화분에서 꺼내 쓰레기통으로 가지고 가신다. 난 근처에 서서 할아버지가 꽃을 교체하는 작업을 가만히 지켜 보았다. 할아버지가 꽃다발을 들고 걷는 모습이 너무도 비장해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궁긍했는데, 매주 이렇게 관리를 하시나 보다. 이 성모상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걸까. 자못 진지하게 헌화하는 할아버지.


꽃다발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할아버지.


비장한 모습으로 코트를 휘날리며 바질리카 방향으로 걷는다.


이름모를 성모상 앞에 꽃다발을 바치는 할아버지.


대성당은 높은 언덕에 지어져 있어서 도나우 강과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건물 안에 들어가 구경하다가 앉아서 쉬고 있는데, 어느 순간 미사가 시작되어 버렸다. 도중에 빠져나가기가 힘들게 되어버려서 별수없이 10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예배를 함께 드렸다. 헌금 주머니를 든 봉사자가 오면 사람들이 돈을 넣는데, 손이 들어갈 때마다 "땡그랑, 땡그랑" 동전 소리가 난다. 다들 동전으로 헌금을 하는 것 같다. 나도 다행히 주머니에서 동전을 몇 개 찾아서 주머니에 돈을 넣었다. 만원, 오만원, 십만원 씩 봉투에 이름을 적어 내는 한국 교회 헌금과 대조되는 소박한 동전 헌금이 마음에 든다. 


예배 내용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예배가 끝나고 주변 사람들과 인사하며 악수를 했다. 그리고 시작된 파이프 오르간 연주... 세상에서 들어 본 연주 중 이렇게 강력하고, 격렬하고, 감동적인 연주가 있었던가? 사람들이 주루룩 뒷편 2층의 파이프 오르간 쪽을 보며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연주 후의 박수 소리... 아, 그 연주가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듯, 그 연주가 끝나 버릴 걸 알면서도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대성당 밖으로 나와 거리 연주가가 리코더 두 개로 현란한 연주를 하는 것을 듣는다. 이 리코더 연주자도 솜씨가 만만치 않다. 리코더 두 개를 물고 양손으로 연주하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다. 리코더로 이를 수 있는 거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 듯 하다. 대성당 정문의 거대한 기둥들 사이에서 리코드 연주를 가만히 듣다가, 약속시간이 되어 나타난 가보르를 만났다.


고고하게 흐르는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의 국경선과 두 나라를 잇는 다리.


바질리카에서 내려다 본 풍경.


에스테르곰 바질리카의 돔. 내부 디자인은 다른 카톨릭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크기는 확실히 크다.



괴이하다는 평과 아름답다는 평으로 갈린다는 대성당 뒷뜰의 석상.


두건을 쓴 익명의 남자(anonymus)가 간판에 걸려 있다.


가보르 아저씨와 강변으로 내려왔다. 에스테르곰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재발견하고 있는 아저씨.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그리고 아름다운 에스테르곰의 산책로.


에스테르곰 시의 문장인듯 하다.


가보르와 함께 점심식사 할 곳을 찾아 시내를 돌아다녔다. 일요일이라 문이 닫힌 곳이 많았다. 결국 찾아간 곳은 케밥(kebab) 가게. 되도록이면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시키고 싶었는데, 팔라펠(falafel)은 주문할 수 없다고 한다. 가보르 아저씨가 먼저 주문을 하길래, 까다로워 보이기가 싫어서 "저도 똑같은 걸로 먹을게요"라고 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가보르 아저씨가 제일 비싼 음식을 시켰던 것! 그리고 아저씨는 내가 계산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눈치였다. 쿨하게 거금 2000포린트(약 8000원)를 내고, 거스름돈을 기다렸는데, 두 명 분을 계산하니 돈이 모자라서 아저씨가 돈을 조금 더 냈다. 이런... 돈은 돈대로 쓰고 생색도 못내게 생겼다. 아저씨가 주문한 음식은 기로스(gyros)였는데, 고기가 많았다. 남길 수는 없으니 다 먹었지만, 영 찝찝한 선택을 해버렸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카페에 가자고 한다. 이번에도 커피를 사라는 강한 무언의 압력을 느낄 수 있었다. "달콤한 것 좋아하니?"라고 묻더니 케이크에서 눈을 못 떼는 아저씨. 결국  커피 두 잔과 아저씨가 먹을 케이크를 계산했다. 케이크는 아저씨 혼자 드셨다. 카우치서핑을 할 때 속이 상하는 게 이런 경우이다. 상대방의 호의(손님으로 받아준 것)를 순수한 호의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 완전한 공짜, 조건없는 사랑을 바라는 내가 오히려 이기적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걸까? 내가 돈을 내더라도, 아저씨가 '당연히 공짜 투숙객인 네가 돈을 내야 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으면 기분이 좋았을 수도 있는데. 러시아의 파리다, 카자흐스탄의 알리, 중국의 치준 같은 카우치서핑 호스트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풀어 주어서 오히려 내가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테스트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생각해보면 식당에서 음식을 확실히 안 고르고, 카페에 가는 것에 관해서도 확실히 의견을 표현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원한다면 '돈이 부담되어 식당에 가는 대신 재료를 사서 요리를 해주고 싶다'고 말을 할 수도 있었는데, 수동적으로 가보르 아저씨 의견대로 따라가기만 하고 이제와서 쓴 돈이 아까워서 '대가 없는 베풂'을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돈에 대한 집착과 돈 아끼기에 대한 집착은 곧 부끄러움으로 변한다. 아저씨가 살 것이 있다고 해서 되돌아간 에스테르곰 바질리카의 기념품 가게. 여기서도 아저씨가 선물을 고르는 동안 나는 '왜 사람들은 이런 쓸데없는 물건들에 돈을 쓸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쇼핑을 끝낸 가보르 아저씨가 봉투를 하나 건넨다.


"이게 뭐에요?"


"선물이야. 열어봐."


봉투를 열어보니 T자 모양의 나무 목걸이와 성모 그림이 들어 있었다. 


"이건 타우 십자가(Tau cross)라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프란치스코회(Franciscans)의 상징이야. 네 카우치서핑 프로필의 '좋아하는 영화' 중에 <브라더 선 시스터 문(Brother Sun, Sister Moon)>이 있는걸 봤어." 가보르 아저씨가 말했다.


<브라더 선 시스터 문>은 성자 프란체스코에 관한 영화인데, 큰 감동을 받아 몇 번을 되돌려 본 영화이다. 영화 속 젊은 프란체스코는 부와 명예를 쫓는 세속적인 사람이었지만,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온 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뒤바뀐다. 아름다운 여인, 친구들과의 유희, 빛나는 영예를 사랑하던 프란체스코는, 이제 작은 새를 쫓아다니고, 들판에 앉아 꽃을 바라보고, 노동에 찌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결국 프란체스코는 고뇌와 모순으로 가득 찬 안락함 대신 맨발로 빗속을 거닐며 구걸하는 삶을 택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든 소유욕와 집착을 내려놓고, 가난하지만 자유롭고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며 감동받던 남자는 도대체 어딜 가고, 케이크 값과 음식 값을 계산하고 있는 남자만 남아있는 걸까? 어째서 나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하게 성자의 잣대를 갖다 대는지.


내가 가보르 아저씨를 마음대로 판단하는 동안 아저씨는 나에게 의미있는 선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과 고마움이 뒤섞인 먹먹함 속에서 목걸이를 꺼내 보았다.


"목걸이에 매듭이 세 개 보이지? 이건 프란치스코회의 세 가지 서약인 청빈(poverty), 순결(chastity), 순종(obedience)을 뜻하는 매듭이야." 가보르 아저씨가 설명해 주었다.


타우 목걸이를 목에 걸고 매듭을 하나씩 하나씩 만져 보았다. 청빈, 순결, 순종... 이번 여행에서 이 세 가지만 얻어갈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기념품보다 귀한 선물이 될텐데. 지금 이 순간을 잊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마음 속에 가만히 매듭을 지어 본다.


160년 전에 완공되었다는 에스테르곰 대성당. 160년 전 이 언덕에 있었던 사람들도 지금과 같은 풍경을 보며 같은 아름다움을 느꼈겠지.


첫날 혼자 왔던 언덕 위 하얀 교회에 가보르 아저씨와 함께 왔다.


선물받은 타우 목걸이와 성모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