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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포르투갈

포르투갈 리스본: 신트라, 페나 궁전, 호까곶, 크리스마스 파티 (여행 159일째)

호카 곶(Cabo da Roca)

2016년 12월 24일 토요일

포르투갈 리스본(Lisbon) - 신트라(Sintra) - 호카 곶(Cabo da Roca)

[1] 누가 바람을 넣었던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바람을 넣은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와 친척형은 (리스본은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아침 일찍 신트라로 향했다. 신트라는 리스본에서 약 30km 거리이고, 거기서 또 20km 정도만 가면 '세상의 끝'이라는 호까 곶이 있기 때문에 겸사겸사 간 것 같다. 지도상에서 보면 신트라에는 이런저런 관광명소가 많은 것 같았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갔다. 

[2] 네비를 따라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길이 점점 좁아졌다.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하고 좁은 벽돌길이어서 아주 낭만적이었으나 자동차가 적응하기는 힘든 곳이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는 자동차가 답답할 뿐만 아니라 도시 미관도 해친다. 자동차의 빤질빤질한 표면이 어울리는 곳은 한정적이다. 오래된 작은 도시나 맑은 자연 풍경에는 녹아들 수 없다. 

[3] 좁은 길을 따라 헤매다가 어찌어찌 헤갈레이라 별장(Quinta da Regaleira)을 찾았다. 작지만 주차할 공간(R. Trindade Coelho)도 있었다. 담장 밖에서만 봐도 풍기는 오라가 확실히 달랐다. 뭘 알고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어서 들어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고요하다. "이거 문 닫은거 아니야?" 친척형이 말했지만, 나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입구를 찾아서 "여기 열렸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주차한 곳은 출구 주변이어서 속보와 구보로 오르막 커브길을 올라갔다. 길이 너무 좁고 외져서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기분은 안 들었다. 닫혀있는 철문이 하나 더 보였지만 여기도 입구는 아니었고, 거기서 언덕길을 더 올라갔다. 의심스럽게 쫓아 올라오는 형을 두고 먼저 후다닥 올라갔다. 이어진 돌담 끝에는 마지막 철문, 진짜 입구가 있었지만 이것 역시 굳게 닫혀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여서 문이 닫힌 것이었다. 우리처럼 헛걸음을 하고 입맛을 다시는 관광객들이 몇몇 보였지만 많지는 않았다. 

Quinta da Regaleira (Source: Wiki Commons)

Quinta da Regaleira (Source: Flickr)

담장 밖에서 본 헤갈레이라 궁전. 햇살도 좋고 다 좋은데 문이 닫혔다. 돌로 밧줄을 조각한 섬세함.

헤갈레이라 별장의 돌담 앞. 세테아이스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다.

Quinta da Regaleira

[4] 여기까지 온게 아까워 조금 더 올라가 보았다. 근처에 세테아이스 궁전(Seteais Palace)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헤갈레이라 별장에 비하면 아주 소박해 보이는 곳이라, 꿩 대신 메추리 정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건물도 유네스코(신트라 문화경관)에 이름이 올라 있는 나름 역사적인 곳이었다. 지금은 호텔 건물로 쓰이고 있는데 1박에 40-50만원 정도 하는것 같다.

Palacio de Seteais, en Sintra (siglo XIX) (Source: Wiki Commons)

난간에서는 정원(Jardins do Palácio de Seteais)을 내려다 볼 수 있다.

[5] 신트라의 다른 관광지로는 페나 국립 왕궁(Parque e Palácio Nacional da Pena)과 무어인의 성채(Castelo dos Mouros)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이기 때문에 여기도 문이 닫혀 있을 것 같았다. 그리 큰 기대없이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페나 궁전을 찾아갔다. 그런데 어째 차들이 무지 많은 것이 예감이 좋았다. 입구 주변으로 가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근처의 주차장은 자리가 없어서 산을 조금 더 내려가 산림욕장 같은 곳에 주차를 하고 입구로 왔다. [페나 궁전 입장권], [페나 궁전과 무어인의 성채 콤보 입장권] 등이 있었다. 티켓 자동 발권기가 있어서 카드로 바로 구입할 수도 있었다. 은근 성채에도 가보고픈 욕심이 있었지만 친척형의 냉철한 판단으로 페나 궁전 입장권만 끊었다.

[6] 페나 궁전은 예뻤다. 관광객들도 많았고, 난간에서 예쁜 포즈로 사진을 찍는 한국인 아가씨들도 보였다. 나랑 친척형은 아직 갈 곳이 많았기 때문에 스윽 둘러보고 나왔다. 한시간도 안 있었던 것 같다. 좀 아쉽다. 

[7] 아까 차를 타고 페나 궁전 입구로 오면서 유럽인 아주머니 한 분이 캐리어를 끌고 산길을 걷고 있는 것을 봤었는데, 그 아주머니를 페나 궁전에서 한번 더 봤다. 우리가 한 바퀴 돌아보고 나가는 길에 아주머니는 언덕길을 올라오고 있었는데,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오느라고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상당히 비정상적인 광경이었고, 아주머니도 그 상황을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머니는 "악!" 소리를 내며 캐리어를 넘어뜨렸고 땅에 주저 앉아 숨을 헐떡거렸다. 근처에 있던 인도인 관광객 가족이 놀라서 다가가 괜찮냐고 물었지만 아주머니는 대답없이 거친 호흡만 계속했다. 여행 계획을 잘못 세웠거나, 만나기로 한 사람과 못 만났거나, 일행을 놓쳤거나, 무언가 꼬인것 같았다. 그 상황에서도 페나 궁전을 보겠다는 강한 집념으로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으나 결국 주저 앉고 만 것이다.

[8] 아주머니, 나와 친척형, 그리고 다른 관광객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일까. 차를 타고 먼 길을 와서 입장료를 내고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시각적 즐거움? 사진? 발도장? 어떤 목적을 갖고 온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이라고 해서 그냥 생각없이 온 것일까. 이곳에 방문한 후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좀 더 행복해졌을까.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The Arch of the Triton

화장실 타일도 이렇게 예쁘게 꾸며 놓으면 앉아 있는게 덜 지루할 것 같다. 모양은 찍어낼 수 있어도 색칠은 일일히 수작업으로 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궁전 뒷쪽. 사진찍기 좋은 테라스가 있다.

지금 보니 예쁜 타일 문양이 정말 많은데 사진을 잘 안찍어 놓은게 후회되는군.

테라스에서 본 풍경

구글 스트리트 뷰로 페나 궁전에 무료입장할 수 있다.

[9] 궁전을 나온 후에는 호카 곶으로 이동했다. 날씨가 좋아서 가는 길 풍경이 환상이었다.

[10] 호카 곶에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이기 때문에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망망대해. 수평선이 우주공간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다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쪽 끝이라는 타이틀만 있는게 아니라 경치도 상당히 좋았다. 아찔하게 높은 절벽에서 검은 파도의 하얀 거품과 이끼처럼 육지를 덮고 있는 녹적색 식물들을 볼 수 있었다.

호까곶 가는길

호까곶

절벽을 따라 걷고 싶은 만큼 걸어보자!

유럽 대륙의 최서단

세르비아 니시에서 밀로시에게 소개받은 스리 친모이(Sri Chinmoy)의 이름이 보인다!

[11] 호까곶을 본 후에는, KFC에 가고 싶다는 형을 위해 고속도로 주변의 쇼핑몰을 찾아갔다. 형이 KFC나 맥도날드에 가자고 할 때마다 내심 "나"의 식단을 배려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곤 했다. "나"의 중요성을 침해하는, "나"의 에고를 건드리는 일이기 때문일까? 나 스스로는 "채식"이라는 도그마에 빠져서는 안되고, "채식주의"로 자신을 규범화하면 안된다고 말하면서도 자아는 "내" 스타일을 갖고 싶어했다. 도대체 "내"가 뭔데? 무의식적으로, 기계처럼, 주변으로 다가오는 걸 다 쪼아버리는 닭처럼 반응하고 있었다.

[12] 저녁에는 승희와 주현이가 묵고 있는 호스텔(Sunset Destination Hostel)과 공동 운영되는 호스텔(Lisbon Destination Hostel)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파티에 다녀왔다. 우리 일행 말고도 다른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우리 일행이랑 섞였다. 나는 다른 테이블에 따로 앉아서 주변에 앉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내 앞자리에 앉은 스코틀랜드 출신 아만다는 스페인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뉴질랜드에서 온 통통한 아가씨는 수줍음이 많았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나이든 아주머니 두 분도 계셨는데, 한 분은 지금 이비자에서 살고 있었고 다른 한 분은 여행중이라고 했다. 브라질에서 온 페르디난도(Ferdinando)와 나탈리아(Natalia)도 있었다. 처음에는 커플인줄 알았는데, 대화를 하다 보니 성씨(Jung)가 같은 남매로 밝혀졌다. 페르디난도는 약간 소극적이고 부끄러움을 타는 반면, 나탈리아는 당당하고 존재감이 강렬했다. 나탈리아는 목소리나 골격이 약간 남성적이면서도 눈빛과 말투가 정말 매혹적이었다. 

[13] 처음에는 별 목적없이, 사람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주려 대화를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꽤 즐거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나중에 나탈리아가 예쁘다는 인식을 하면서 (그리고 남매란 것을 알고) 머릿속이 약간 복잡해지고 이런저런 계산을 하면서 (별다른 변화는 없었지만) 마음 속이 찝찝해졌다. 그러다가 한국인 여행자들이 있는 테이블로 옮겼다. 그동안 친척형은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신나게 수다를 떨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친척형이 사람들에게 내 자랑을 많이 했다. 한국인 중에도 예쁜 여학생과 잘생긴 남학생이 있었다. 남학생은 프랑스에서 유학중이었던 것 같은데 포르투에 갈 예정이라고 해서 친척형이 태워주기로 했다. 내일 아침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열두시 쯤 되어 호스텔을 나왔다. (아만다와 나탈리아가 다같이 술을 더 먹으러 가자는 제안도 하고, 관심을 많이 보여줬는데,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자리를 비운다음 헤어진 것이 마음속에 계속 걸렸다.) 

[14] 길에 침낭을 덮고 누워있는 사람과 그 곁을 얼쩡거리며 킁킁 냄새를 맡는 (먹이를 찾는?) 강아지가 보였다. 크리스마스에 진정으로 사랑을 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 사랑과 희생. 사랑과 희생... 우리가 아기 예수로 태어날 수 있는, 사랑을 베풀 기회가 저기에 누워 있는데. 또 다른 노인은 길가에 이것저것을 덮고 누워 있었다. 노인은 눈을 뜨고 있었다. 뜬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사랑의 한 마디와 따뜻한 차와 무엇이라도 줄 수 있으면, 우리가 묵고 있는 집으로 초대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우리가 '성냥팔이 소녀'를 읽을 때는 그 소녀를 동정하고 무정한 사람들을 욕하면서, 다른 모습의 성냥팔이 소녀들에게는 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 있는걸까. 캄캄하고 싸늘한 밤, 어떤 아저씨는 길에서 첼로를 켜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여자 한 명이 앉아서 가만히 연주를 듣고 있었다. 사랑.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가득하길. 오늘이라도 사랑이 가득했으면.

[15] 뒤통수의 가려움, 그리고 온 몸 이곳저곳의 가려움. 그것을 참지 못하고 긁적긁적하는 것이 현재의 느슨해지고 약하진 정신상태를 반영하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상황에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음식도 기름지고 단 것 위주로 먹어서 그런것 같다. 불과 몇 주 전 명상으로 깨끗하게 청소하고 닦은 정신이 어지럽혀지고 더럽혀지는 속도는 빠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