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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모로코

모로코 아가디르: 행복, 한손, 버스, 쌍둥이, 장미궁전 (여행 176일째)

2017년 1월 10일 화요일

모로코 마라케시(مراكش) - 아가디르(أگادير)

[1] 아침: 왠지 일어나기가 싫지만 똥도 싸야 하고, 충전도 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니, 꾸물꾸물 일어난다. 자... 먼저 똥을 싸고 (어제부터 먹은게 거의 없는데 나오는 걸 보면 신기하다. 며칠이나 굶어야 안 나올까?) 후다닥 샤워를 하고, 옥상에 올라가 멋진 아침 햇살도 맞고 (수건을 말리고), 아침 식사를 달라고 하기 위해 주방으로 갔다. '행복'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물빠진 스키니진을 입은 남자애 사이드(Sa'id, سعيد‎)가 빵을 구워준다고 해서 주방에서 구경하며 기다렸다. 아침 식사가 포함된 호스텔이어서, 주방은 나처럼 음식을 기다리는 손님들과 음식을 준비하려는 직원들이 뒤엉켜 어수선했다. 수염을 기르고 올빽머리를 한 검은 옷의 매니져가 소란통을 보더니 약간 화를 내며 사람들을 주방에서 쫓아냈다. 

[2] 터프가이: 로비에 앉아 아침밥을 기다리면서 한국 사람을 하나 만났는데, 나에게 아침밥이 포함된 거냐고 물어본다. 강인한 첫인상에서 아는 운동선수 형이 떠올랐다. 이 남자가 옆에 앉은 백인에게, 앞으로 케냐, 남아공, 탄자니아 등을 여행할 계획이라는 것, 정부기관에 취직해 마지막으로 여행하는 중이라는 것, 서강대에 다녔던 것 등을 말하는 것을 무관심하게 듣고 있는데... 알고 보니 이 남자 오른손이 없다. 뭉툭하게 끝나는 오른팔을 보고 나니 갑자기 사람이 달라보인다. 나중에 대화를 조금 나누었는데, 알래스카에서 남미의 끝까지 10개월 동안 히치하이킹으로 여행했다고 한다. 여기서도 사하라 사막에 투어 가이드 없이 텐트만 가지고 들어가서 며칠 지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도 며칠 후에 사막 마을에 들어가 헬프엑스(helpx)를 시작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정보를 공유해 주기로 하고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하하... 이런 사람이나, 재혁이가 말했던 UDT 출신의 팬티 안입고 다니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 어찌 지금까지 몰랐던 것일까. 그저 관심이 없었던 걸까?

[3] 아가디르행 버스: 12시 30분 아가디르행 버스에 올라 눈을 감고 시간을 보낸다. 뒷자리 서양 여자와 어떤 남자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커튼 너머 창밖으로는 만년설이 덮인 산맥이 보인다 (마라케시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처럼 도시 남쪽으로 산맥이 병풍을 치고 있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양떼... 아, 양떼! 양떼와 염소떼 사이에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하지만 목동은 결국 자기가 돌보는 짐승들을 도살하거나 팔아 넘겨야만 하는거지?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간식거리 가격을 보니 유럽이나 아이슬란드에 비해 훨씬 싸다. 안심이 된다... 지낼 곳만 있으면 모로코에서 여유롭게 2-3개월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옆에 앉은 친절한 모로코 아저씨로부터 타구니트(Tagounite, تاكونيت, 며칠 후 갈 예정인 사막마을)에 가는 버스 시간과 가격 얘기도 들었다. 여차저차 아가디르에 도착해서 길고양이를 구경하며 나빌리와 살리마를 기다린다. 

[4] 쌍둥이 자매: 나빌라와 살리마는 대학생 때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한국으로 한 학기 교환학생을 왔던 아이들인데(네덜란드에 가려고 했으나 비자를 못받아 한국으로 정했음) 한국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국에 돌아와 2년 동안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나중에 나도 같은 석사과정을 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 같이 한국어-프랑스어 언어 교환도 했다. 나빌라와 살리마는 머리 좋고(대학원에서 항상 톱), 매력적이고, 성격 좋은 부잣집 딸들이다! 뿐만 아니라 영적(종교적)인 성숙함도 지녀서, 예전부터 정말 좋아하는 친구들이다(만날때마다 두 친구에게 놀림을 당하지만). 몇 주 전부터 모로코에 갈 예정이라고 예고를 했고, 가난한 여행을 하고 있으니 재워주거나 잠깐 일하면서 지낼 곳을 찾아줄 수 있냐고 부탁을 했는데, "아가디르에 오면 3일동안 돈 한푼 쓸일 없이 관광시켜줄테니 걱정말고 오라"는 답변을 받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일이라고 강조했다. 고마우면서도, 내가 그동안 뭐 해준것도 없으면서 뻔뻔하게 시간과 돈을 요구한 것 같아 심란했다. 

[5] 장미 궁전: 두 사람이 자동차를 끌고 터미널에 나타났다. 만나자마자 나를 갈구기 시작하지만, 다행히 밝은 얼굴이다. 차를 타고 두 사람이 예약해 둔 호텔로 갔다. 호텔 이름은 빨래 데 로스(Hôtel Palais des Roses)로 장미 궁전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어로는 근사한데 번역하면 싸구려 모텔 이름 같다. 나빌라, 살리마와 헤어지고 직원에게 여기 숙박비가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니 500-700디르함(6-8만원) 정도 된다고 한다. 마라케시 호스텔의 10배가 되는 가격이다. '3일동안'이라고 딱 잘라 제한을 잡아놓은 것 때문에, 2박인지 3박인지 알쏭달쏭 했는데, 체크인할 때 보니 3박이다. 이것 때문에도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내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너무 좋은 대접을 받아 감사하면서도 우울하다. 이 친구들도 나를 전혀 대접할 필요가 없는데... 그만큼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베풀고 친절할 수 있기를.


마라케시에서 아가디르행 버스타는 곳 주변.

생각보다 빨리 아가디르에 도착했다.

고양이를 구경하며 나빌라와 살리마를 기다린다.

장미궁전 호텔. 과분하게도 너무 좋은 숙소에 묵게 되었다.

호텔 뒷마당으로 나가면 바로 해변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