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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모로코

모로코 아가디르: 므사만, 서핑, 연금술사, 타가주트 (여행 177일째)

금속탐지기로 해변의 동전(혹은 금화)을 찾고 있는 할아버지

... 그러나 잠깐 동안의 행복한 사랑, 아름다운 경치, 교향악, 친구들과의 즐거운 만남, 목욕, 축구경기에는 그런 성향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여행길에 기분좋은 여관에 들러 원기를 회복하게 해 주시지만, 그 여관들을 우리 집으로 착각하게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C. 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중)

2017년 1월 11일 수요일

모로코 아가디르(Agadir, أگادير) - 타가주트(Taghazout, تاغازوت)

[1] 장미궁전(Hôtel Palais des Roses): 숙박비에 포함되어 있는 조식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다. 식당은 수영장과 해변을 향해 건물 서쪽에 있었다. 음식은 최고였다. 각종 빵, 과일, 시리얼, 쥬스, 커피 등 아침 식사 메뉴 뿐만 아니라 파스타, 샐러드,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었고, 한쪽에서는 직원이 크레페 같은 것을 불판에 튀겨주고 있었다. 이 크레페같은 음식(므사만, M'semen, مسمن‎)을 꿀, 초코시럽, 연유 등에 찍어 먹는데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나빌라와 살리마가 점심을 먹어야 하니 아침은 조금만 먹고 오라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은 비수기인지 음식을 먹는 손님보다, 요리하고, 정리하고, 안내하는 직원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직원들은 무척 친절했다. 정말 빠져나오기 싫은 달콤한 곳이다.

M'semen (Source: Wiki Commons)

M'semen (Source: Wiki Commons)

[2] 가족: 아침을 먹고 호텔 로비에서 와이파이를 잡아 가족과 통화했다. 할머니와 통화하면서, '할머니가 웃을 때마다 고놈의 병도, 고통도 좀 줄어들텐데'-하는 생각을 하고, 아빠와 통하하면서, 여기서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지 자랑하고, 엄마와 통화하면서, "자아"가 너무 커서 지난 여행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아직 갈길이 멉니다.

[3] 서핑: 통화가 끝나고 밖에 나가서 사람들이 서핑하는 걸 구경한다. 파도를 만나, 파도를 타고, 온몸과 정신력을 그 순간에 쏟아붓는 것. 파도타기는 춤과 같고, 스포츠와 같다(탁구가 생각났다). 어떻게 보면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이나 여행과도 비슷하다. 

호텔 객실의 장식

아가디르 해변

서핑하는 사람들

[4] 연금술사: 앱스토어에서 '감사일기'라는 아주 감사한 앱을 발견했다. 감사일기를 적으며 호텔 입구에서 나빌라와 살리마를 기다렸다. 두 명이 어제와는 다른 차(SUV)를 타고 나타났다. 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두 사람의 사무실로 향한다. 쌍둥이 모두 운전할 때 터프하다 못해 공격적이다! 내가 왜 이리 난폭하게 운전하냐고 묻자 여기는 각다귀판(dog-eat-dog)이라 생존하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된다고 한다. 

회사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설립한 회사의 이름은 미의 연금술사(The Beauty Alchemist). 한국 화장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회사다. 이제 막 시작해서 제대로 기반이 잡힌 것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벤처 정신이다. (돈많은 아버지에게 건물을 받아서 쓰기 때문에 임대료를 낼 필요가 없는, 상당히 리스크가 작은 사업이기는 하다.) 이름도 마음에 든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가 생각난다. 소설의 주인공은 스페인에서 모로코로 넘어오자마자 사기를 당해 탈탈 털리고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내가 화장품과 카탈로그를 구경하는 사이 두 사람은 내가 이틀 후 가서 만날 헬프엑스(helpx) 호스트에게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어봐 준다. 거기에 지내고 있는 사람은 몇명인지, 음식은 어떻게 나오는지, 며칠동안 지낼 수 있는지, 일은 무엇인지, 어떻게 만날지 등등... 아주 든든한 연금술사들이다.

The Beauty Alchemist

[5] 타진(طجين, ṭajīn): 쌍둥이가 해변을 구경시켜 준다고 했다. 타가주트(Taghazout, تاغازوت)라는 서핑 마을이다. 타가주트에 가는 길에 작은 마을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어제 저녁에는 모로코까지 왔는데 이탈리아 음식을 사줘서 미안하다며, 오늘은 모로코 전통 음식인 타진을 사주겠다고 한다. 타진은 갈비찜 비슷한 요리인데, 꼬깔모자 모양의 뚜껑이 달린 특이한 냄비에 요리한다. 가게의 옥상 테라스에서 음식을 먹었는데, 옆집 식당 옥상과 붙어 있어서, 옆집 음식은 어떤지, 옆집에는 손님이 많은지 등을 볼 수 있었다. 치킨 타진을 시켰는데, 나는 아침을 잔뜩 먹고 와서 이미 배부른 상태였고, 두 사람도 많이 먹지 않았다. 음식이 아까워서 야채 위주로 열심히 먹었다. 

Tajine (Source: Wiki Commons)

Tajine (Source: Wiki Commons)

바나나 가게

점심 먹은 식당의 빈 콜라병

[6] 타가주트(Taghazout, تاغازوت): 식당을 나온 후에는 두사람이 과일 가게에서 바나나 수십개가 달린 한 다발을 1유로(11디르함)에 사줬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타가주트와 그 주변의 해변들을 구경했다. 타가주트 부근은 요즘 에코 빌리지가 많이 세워지고 있다고 한다. 슈퍼마켓에서 비닐봉지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환경보호에 관심이 많은 나라인 것 같다. 혹은 단지 관광을 위해 그런 이미지를 쌓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부근은 서핑으로 유명하고, 히피와 히치하이커들이 많다고 한다. 언덕에서 히피가 살고 있는 듯한 텐트도 보였고, 우리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차를 세우려는 히치하이커들도 보였다. 나빌라와 살리마는 절대 히치하이커를 안 태워준다고 한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여자 운전자의 입장이 이해되면서도, 히치하이킹을 해 온 입장에서는 씁쓸하다. 생각해보면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여자 운전자가 태워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직은 세상이 그렇게 안전하지는 않은가 보다. 

해변에서는 낙타와 고양이를 봤다. 둘 다 정말 멋진 생물이다. 무동력 고기잡이 배들도 보였다. 다시 차를 타고 나갈 때에는 주차요금을 받는 아저씨들에게 동전을 줬다. 두 사람 말로는 모로코의 최저 임금은 약 30만원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실제로 받는 임금은 30만원보다 낮다고 한다. 1박에 5만원짜리 호텔에 손님은 별로 없는데도 일하는 사람은 많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 관한 얘기도 했다. 아주 유명해서 이름은 들어본 여행자인데(두바이에 살 때 '이븐 바투타 몰'이라는 쇼핑몰이 있었음), 모로코 출신이라는 것은 몰랐다. '아가디르 근처의 모스크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한국 여자 이야기'와 '결혼하게 해주는 바위 이야기'도 들었다.

서핑 가게 앞에 앉아있는 개

조용한 서핑 마을

얼마전 페인트칠을 다시 했다고 한다.

무동력 어선

해변의 낙타 아저씨

버려진 빵

현관문 장식

이름모를 꽃

두번째로 갔던 해변. 돗자리를 깔고 음식을 먹는 가족들이 몇몇 보였다. 여름에는 훨씬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름모를 식물

거리의 아이들

[7] 선택의 순간: 나빌라, 살리마와 사막 마을에 가는 버스표를 미리 사러 터미널에 갔다. 버스는 야간 운행밖에 없었다. 12일 (내일) 밤에 출발하느냐, 13일 (내일 모레) 밤에 출발하느냐 고민이 되었다. 호텔은 어짜피 13일까지 잡혀 있고, 이곳 아가디르의 호텔 생활은 너무나 편안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나에게 언제 버스를 타겠냐고 물었을 때, 이 달콤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기 위해 13일 밤 버스를 타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12일 밤에 버스를 타겠다고 해버렸다. (두 사람은 버스비까지 내줬다.)

그리고 그 결정에 매우 만족한다. 신은 우리에게 쉬어갈 곳을 주지만, 그곳에 눌러 앉으라는 것이 아니라 다음 곳으로 나아갈 힘을 주기 위해서라는 말이 떠오른다. 호텔에서 여유나 부리자고 하는 여행이 아니다. 관람차를 타거나 악어 공원에 가려고 하는 여행도 아니다. 좋은 결정을 내린 것에 감사하다. 살리마의 카카오톡 프로필 메시지처럼 "신의 선택은 언제나 우리의 바람보다 아름답다(God's choices are always more beautiful than our wishes)."


저녁 해변의 남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