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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모로코

모로코 헬프엑스: 최후의 1인, 적막함, 무하메드, 금성 (여행 182일째)

2017년 1월 16일 월요일

모로코 타구니트(Tagounite, تاكونيت) 부근

[1] 최후의 1인: 간밤에는 소피가 집을 나가는 시간에 맞춰 일어나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잤다. 대여섯 차례 잠에서 깨서 시간을 확인하며, 이상한 꿈들을 꿨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새벽의 냉기에, 얇은 침낭 속에서 몸을 웅크려 떨며, 잠이 들거나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새벽 일찍 떠나는 소피를 전송했다. 이제 남은 방문객은 나 하나뿐이다. 무하메드도 늦어도 오늘은 돌아가야 한다고 하니, 이제 약간 어색한 사이인 집주인 아흐메드와 하루 혹은 이틀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된장찌개처럼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최고의 아침식사

당나귀 마차

[2] 구덩이 파기: 땅 파는 일은 힘들다. 같이 일하는 사람도 없고, 작업을 지시하는 사람도 없을 때는 더 힘들다. 땅을 파면서 (내일 할 일까지 조금 남겨두었다) 여기서 하루를 더 묵을지, 하루 일찍 나와서 와자잣(Ouarzazate/Warzazat, وارزازات)에 들렀다가 마라케시로 갈지, 영국으로 넘어가면 루튼 공항(Luton Airport)에서 밤을 새고 옥스포드(Oxford)로 갈지 등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고민들을 쉼없이 했다. 그러다가 삽도 곡괭이도 내려놓고, 새파란 하늘과 대추야자 나무들을 그저 바라보며, 얼굴 여기저기 달라붙는 파리를 쫓는다.

뭐에 홀린 듯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을 찾아온다.

개미 구멍

[3] 적막(寂寞): 아침에 소피가 떠날 때는 같이 떠나고픈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낮이 되고, 해가 뜨겁게 내리쬐고 바람도 잔잔하니, 점심을 굶고 있음에도 그저 만족스러워서, 하루쯤 더 이 고요함을 누리고 싶어진다. 집안에는 파리들이 윙윙거리는 소리, 닭들과 토끼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순식간에 마르고 있는 빨래 소리만 들릴뿐, 사람의 기척은 없다. 어디로 가도 이 적막함, 무(無), 언젠가 마주해야 할 죽음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다. 오직 신에게로 회귀하는 수밖에. 투르게네프의 "파우스트"를 읽고 있다. 주인공이 베라에게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어주는 내용이다. 1850년이라...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도 금방 마른다.

점심 메뉴도 아침 메뉴와 비슷하다.

무하메드의 터번

부패하지 않는 아기 동물

[4] 마을: 약간 주눅이 든 상태로 마을에 다녀왔다. 다른 사람과 같이 다닐 때는 괜찮았는데, 혼자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니 약간 부담이 된다. 우연히 무하메드를 만나서 언제 돌아가냐고 물어보니 원래 오늘 갈 예정이었지만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걸까? 미안한 기분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된다. 

자전거가 보인다.

타구니트 풍경

[5] 귀가길: 무하메드와 헤어진 후에는 버스표를 사고, 귀가하는 학생들의 놀리는 듯하면서도 관심이 묻어나는 웃음소리와 인사와 시선을 받으며 마을을 벗어났다. 해가 넘어가니 금새 공기는 쌀쌀해지고, 사방은 깜깜해졌다. 어둠 속을 걷자니 돌아오는 길이 멀게 느껴지기도 했고, 보이는 건물들 중 어느 곳이 우리 건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어 불을 켜고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다.

마을 외곽의 폐허

[6] 무하메드: 마을에서 돌아온 무하메드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고 먹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무슨 일을 했냐고 물어보니, 사막 관광 가이드, 구멍가게, 옷장사, 페인트칠, 서빙, 공사장, 대리석 가공 등을 했다고 한다. 그 중 어떤 일이 가장 좋았냐고 물어보니, 6개월 동안 가게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게 제일 좋았다고 한다. 대학교는 돈이 없어서 끝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언젠가 한국으로 초대해 대접하고 싶다. 

간소하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주방. 왼쪽의 알록달록한 통은 빵바구니.

[7] 금성: 수다스럽게 펜을 놀려, 이 조용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과 광경과 사람들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싶은 욕심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 이 순간의 조용함과 평화로움을 즐기고, 잊혀질 것들은 잊혀지게 내버려 두고 싶다. 눈부시게 빛나는 금성은 서쪽 하늘로 넘어가고 있고 그 뒤를 화성이 따른다. 다른 별들도 제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밤하늘을 빛내고 있다. 아주 작고 희미한 별들까지도.

[8] 이름: 이번 여행에서 만난 세 여인의 이름. 베라(Vera)는 진리, 나빌라(Nabila)는 고귀함, 살리마(Salima)는 건강함을 뜻한다. 여행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이런 보석들이기를.

핸드폰 카메라에도 잡히는 금성

다시 추위와 어둠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