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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지 오웰의 1984와 설국열차 (Snowpiercer, 2013)

 

1984설국열차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영화 설국열차를 비교 분석)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하는 행위는 진실하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않다. 장자는 "궁수가 그냥 즐기려고 활을 쏠 때는 재간이 아낌없이 발휘된다. 청동으로 된 상을 받으려고 활을 쏠때는 신경이 예민해진다. 그리고 금으로 된 상을 받으려고 활을 쏠 때는 과녁이 두개로 보이기 시작한다" 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계산된 웃음, 칭찬을 받기 위한 선행, 사진을 찍기 위해 하는 여행 등 모든 2차적 목적이 있는 행동들에는 순수함이 결여되어 있다. 병아리가 달걀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보며 자연의 무한한 신비와 감동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하지만 방학숙제로 그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해 기록해야하는 아이는 그런 감동을 느끼기 힘들 것이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라고 말하는 사진작가의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1984를 읽으면서, 그리고 설국열차를 보면서의 나의 마음 상태가 그러했다. 각 작품의 심오함을 느끼면서도 그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 그 순간에 머물 수가 없었다.리뷰를 작성하기 위해 글을 읽고 영화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리뷰를 작성하는 것에 의무감을 느끼고 있고, 이 글을 작성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러한 숙제가 없었음에도, 이 책과 영화를 개인적으로 각각 접하고 머릿속에 그 연관성들이 그려져 어떠한 영감이 떠올랐다면, 다른 것을 제쳐두고라도 리뷰를 작성해 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리뷰를 작성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합리화시켜야 할까? <이중사고>를 해야 한다. 내가 이 리뷰를 진심으로 쓰고 싶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윈스턴이 끝내 진심으로 빅 브러더를 사랑하게 되고 말았듯이, 어떠한 제도적 권위 때문이 아닌 나 자신이 진심으로 이 글을 쓰고 싶기에 쓰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진실한 리뷰가 아닐 것이다. 과녁이 두개로 보이는 지금, 과녁이 하나라고 자신을 속이며, 힘겹게 나는 몇 가지 주제에 대해 논의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공포이다. 나는 왜 이 글을 쓰고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나는 이 글을 진심으로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학교의 상대평가제도에 맞춰 점수가 매겨지기 위해, 꼬리칸의 아이들처럼 억지로 끌려 나온 글이고, 곧 줄자가 이 글들을, 어떤 아이가 희생양이 될 지를 정하기 위해, 샅샅이 재단할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이것이 부당함을 알고 있다. 학교 교육으로 배울 수 있는 것들은 인터넷 상에서도 무료로 배울 수 있고, 학교 학위는 돈으로 구입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구입한 석사 학위가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마치 한국은행에서 찍혀나오는 오만원권 지폐처럼, 학위들도 찍혀나오고 있고, 학위를 가진 사람들의 수는 많아지지만, 이것은 지폐와 마찬가지로 내재적 가치를 갖지 못한 껍데기일 뿐이고 인플레이션이 생길 뿐이다. 책상을 만들기 위해 나무에 못질을 할 때, 좋은 디자인의 황금을 입힌 못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못은 못의 역할만 할 수 있으면 된다. 학위는 못에 디자인을 하고 금칠을 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왜 나는 그 학위를 위해 여전히 이 글을 쓰고 있는가? 두렵기 때문이다. 마치 경비병들의 총에 아직도 총탄이 가득한 것 같아보이고, 밖에 얼어붙어 있는 7인 처럼 되기도 싫고, 지금 텔레스크린을 통해 감시하고 있는 감시자의 눈에 띄어 지적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는 이 리뷰를 작성하지 않고 그로 인해 석사 학위를 받지 못하더라도 삶에 지장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최고의 대학에서 학위를 받지 않더라도 똑같이 살아 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도 똑같이 살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논리를 벗어난 우리의 감정은 뚜렷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이중사고를 통해 논리는 잊혀지며, 잊혀졌다는 사실도 잊혀진다. "할 줄 아는 일도 없는데 학위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취업을 하게 되면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있는게 낫지 않을까? 성적이 낮은 것보다는 높은게 좋지 않을까?" 라고 끊임없이 귀에서 속삭이는, 혹시나 하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막연한 불안감과 더불어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의무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내 의무야. 내가 하기 싫더라도 사회를 위해서 해야만 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잘 하고 있잖아"라는 속삭임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더 똑똑하고 나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오브라이언이 골드스타인의 이론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당의 오류와 거짓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듯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있지만, 그들 역시 모두 충실히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그러니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라는 속삭임이 있다. 이 거대한 사회는 나라는 일개의 존재보다 압도적으로 큰, 무궁무진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사회가 그러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한 마리의 개미에 불과한 나는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겸손히 시스템의 방식에 따라야 한다. 그러니 겸손히 리뷰를 작성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리뷰를 작성하지 않으면 교수와, 클래스메이트와, 대학원에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이 의무감과 충성심의 대상은 누구인가? 이 충성심의 대상은 이 글을 읽는 어떤 사람도 아니요, 교수도 아니요, 클래스메이트도 아니요, 대학원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시스템 그 자체이다.

이 의무감은 어린시절부터 교묘하게 훈련되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수업시간에 지각하거나 결석을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수업을 못 듣는 바로 그 학생이다. 하지만 그 학생의 지각은 시스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되고, 그로 인해 처벌을 받는다.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는 자는 그 불복종이 다른 어떤 누구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처벌을 받는다. 우리는 삼성이나 현대에 취직해서 더 많은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만들고, 소비를 부추겨 매출을 올리는 것을 사회에 공헌하는 일이라고 하고,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하는 것은 사회에 해가 되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한 쪽이 사회에 유익하고 다른 한 쪽이 사회에 해로워서가 아니라, 시스템의 지속 여부에 유익하거나 해롭기 때문이다. 실제로 끊임없는 소비와 생산량의 지속적인 증가를 위해 똑같은 기능을 하는 물건들의 조금씩 변형된 버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의도된 폐기를 유도해 내는 행위를 "생산적"이라고 규정하는 것과, 그 무의미한 생산을 위해 쉴 새 없이 일하는 것을 근면이라 하는 것은, 6년치의 정보를 날조하기 위해 하루 18시간씩 구술기록기를 붙잡고 일하는 진리부 당원들을 생산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사회에 실질적인 유익함, 즉 더 풍부한 먹거리와 여가와 행복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시스템의 유지, 지속적인 매출의 증가를 위해 일한다. 어느 시스템에 속해 있든 마찬가지이다. 국제기구도 자선단체도 그 조직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된다. 지속적인 전쟁이 없이 영사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지속적인 반란이 없이는 열차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빈곤과 불평등이 없이는 국제기구도, 정부도, 자선단체도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시스템에의 순응이 사회의 실질적인 유익함과는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은 각 개인에게 의무감을 부여하여 시스템의 일부가 될 것을 강요한다. 당원에게는 당원의, 프롤에게는 프롤의, 1등석 승객에게는 1등석 승객의, 대학원생에게는 대학원생의 의무가 있다고 충분한 주입을 받으면 의무감에 의해 밤을 새워서라도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의무를 어기면 처벌을 받는다. 그 처벌이 오른쪽 팔을 잃는 것이건, F를 받는 것이건, 어떠한 처벌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처벌을 두려워한다.

동시에 시스템은 개인이 시스템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음을 가르친다. 우등칸에 있는 아이들은 교육을 통해 (얼어붙은 7인을 보며) 기차 밖으로 나갈 수 없음을 배우게 되고, 꼬리칸에 있는 아이들은 아예 바깥 세상을 볼 창문조차 갖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영사도 한편으로는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 외부에 대한 끊임없는 공포를 만들어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어를 통한 사고의 말살을 통해 당을 벗어난 삶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기차나 당을 벗어난 삶은 없다. 개인은 신성한 엔진과 당 안에서만 존재한다. 우리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시스템에 의해 시스템 밖에서의 삶은 불가능하다고 교육 받으며, 시스템 밖에서의 삶이 불가능하도록 팔다리가 잘리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북한, IS, 핵무기, 대량살상무기, 테러와 같은 위협에 대해 듣고 시스템의 절대적 필요성과 그 밖에서의 삶이 불가능함을 믿게 된다. 또한 규격화된 의무교육은 개개인을 잘 다듬어진 부품으로 전락시켰다. 분업은 개인이 만들면 하루에 20개도 만들지 못했을 핀을 한 사람당 수천개까지 만들 수 있도록 했지만(애덤 스미스, 국부론, 1장), 그 효율성은 노동 시간의 감소가 아닌 과대 생산으로 이어졌으며, 동시에 누구도 핀 하나를 만들 수 없게 했다. 노동자는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동시에 쉽게 교체가 가능한 시스템의 부품이 된 것이다. 농사, 야생동식물, 가축, 자연에 대한 지식 대신 의무교육이 지정한 수학, 영어, 공학, 컴퓨터를 배우고 자란 우리는 시스템에 대한 의존 없이는 쌀 한톨도 얻을 수 없고, 물 한 모금도 얻을 수 없는, 시스템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내릴 수 없는 기차에 탑승한 것이다. 윈스턴이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과 물건들을 찾아 헤매었듯이 산업화된 시대에서 자라난 세대도 영영 사라져 버릴 이전 세대의 지식과 텔레스크린이 비치지 않는 좁은 구석을 찾아 헤매게 될 지 모른다.

위의 몇 문단에서 이 리뷰가 쓰여지고 있는 이유가 어렸을 때부터 시스템 내에서 형성된 의무감과 그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경우 받게 될 사회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공포와 절대적으로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의 대응 방법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가장 전형적인 방법은 순응, 반항, 그리고 동화이다. 그리고 마지막 방법은 탈출이다. 아래의 그림(헌터헌터 9권 마지막 챕터 참조)을 보면 두 명의 소년이 도적단에 잡힌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처음에는 순응하고, 동화의 제의를 받고, 결국에는 그림에 묘사된 것처럼 반항하는 척 하다가 탈출을 해 버린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 그리고 다른 열차칸의 대부분의 승객들은 시스템의 구조나 원리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그저 순응한다. 그러다가 커티스를 포함한 일부 꼬리칸 승객들은 시스템에 반항을 하지만, 결국 그 반항조차 시스템 운영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는 동화의 제의를 받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다음 세대의 탈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아주 비슷한 과정이 1984에서도 반복된다. 대부분의 당원, 그리고 프롤들은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고, 물고기가 물 속에서 물을 인식하지 못하듯이, 그들 주변의 시스템, 매트릭스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윈스턴이나 줄리아가 소극적으로 반항을 하지만, 윌링턴씨의 다락방이나 골드스타인의 책, 과거를 부정하는 결정적 증거가 된 사진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반항 마저 시스템 운영의 일부였다. 윈스턴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2+2는 5라는 것을 거부하고, "그들이 우리의 마음 속까지 조종할 수는 없다"는 줄리아의 말처럼 일말의 진실함은 그의 마음 속에 담아두고자 발버둥치지만, 결국에는 당에게 동화되어 빅 브러더를 사랑하면서 죽음을 맞는다. 위의 두 사례와 1984의 차이점이라면 1984에서는 "탈출"이라는 방법이 불가능한 것으로 묘사되어 주인공이 그것을 시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리뷰를 작성하는 학생에게 이 프레임을 적용하면 어떻게 해설할 수 있을까? 학생은 자신에게 리뷰를 쓰게 하는 시스템에 대한 아무 생각없이 충실히 리뷰를 작성할 수도 있을 것이고(순응), 좀 더 과격하게 숙제를 하지 않는다거나 출석을 하지 않음으로써 반항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주어진 숙제에 대한 타당성을 믿어버리게 되고, 그것을 진심으로 수행하게 되고, 나아가 그것의 추종자가 되어,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같은 숙제를 내 줌으로써 완전히 동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에게 주어진 탈출의 방법은 무엇일까? 학교를 그만 둔다고 해서 학위, 취업, 결혼, 육아로 이어지는 시스템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것은 탈출이라기보다 헛된 반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1984와 설국열차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는 "희생"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플라톤의 기록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델피로 간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감옥에서의 1달간, 탈옥을 제의하는 친구들의 말을 거절하고 대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의 부조리에 순응하지도, 반항하지도, 동화되지도 않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죽음은 윈스턴의 철저히 굴종된 죽음과는 정반대이다. 당의 고문과 열차의 제한된 자원은 인간의 생존본능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내면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열차의 꼬리칸에서 커티스를 비롯한 남자들은 그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인과 식인을 저지르고, 애정부 101호실에서 윈스턴은 자신이 받을 고통을 줄리아에게 대신 가하라고 소리지른다. 영화 감독과 책의 저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라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겠는지. 너라면 너의 팔을 잘라 내놓을 수 있을지, 너라면 굶주린 쥐 떼가 얼굴 가죽을 파고 들어오는 것을 견뎌낼 수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잡아 먹고 서로를 밤나무 아래에서 파는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의 생존을 위해, 나의 직업과 나의 가족을 위해, 짐승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고, 남에게 모욕과 창피를 줄 수도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생존 경쟁이다." 진정한 자유, 우리를 얽어맨 시스템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에게 무언가 희생을 요구한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생명과 인간을 존중하는 자유, 재판관에게 자신의 마음 속 진실한 목소리를 말하는 자유는 모두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네 팔을 자르지는 못할지언정, 살인을 하는 대신 굶어 죽을 것을 요구하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 대신 고통을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고, 독배를 마실 것을 요구하며, 고통, 고뇌, 공포를 견뎌낼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탈출의 열쇠인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될 희생은 과연 무엇일까? 희생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커티스는 몇 번 자신의 팔을 자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줄리아와 윈스턴 모두 그들의 마음까지는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 다짐을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희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발생한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에서 커티스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톱니바퀴 사이로 자신의 팔을 집어 넣고, 커티스와 독고민수는 본능적으로 그들 자신을 희생하므로써 두 아이들을 열차로부터 탈출시킨다. 1984의 결말은 얼핏 보면 개인으로서는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감옥에 대한 패배감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희생을 통한 해방의 길은 작품의 중간 중간에 배치되어 있다. 윈스턴이 항상 꿈에서 보던 어머니와 동생의 희생, 그리고 한 어머니가 총구 앞에서 자신의 팔로 자식을 감싸안는 본능적인 희생의 모습은, 그 희생이 결과를 바꿀 수 있든 없든, 기록으로 남든 남지 않든간에 어딘가에 남아서 모든 억압과 공포에 대한 탈출의 씨앗이 될 것이다. 반면 우리는 시스템으로부터의 해방은 원하면서도 희생은 행하지 않는다. 환경보호와 인류애를 외치면서도 소비생활을 멈추려고 하지 않고, 지속가능성을 말하면서도 개발은 멈추려 하지 않는다. 사회의 불공평에 대해 말하면서도 고임금의 편안한 직장에 들어갈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는다. 교육시스템의 문제점과 무의미함에 대해 말하면서도 학벌과 성적을 위해 발버둥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부조리한 시스템을 영속시키고 있으며, 이곳에서 빠져나갈 자격조차 없는지 모른다. 야고보서 2장에는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한 의문이 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굶주리고 있는데, 그 형제에게 배부르고 평안하라 하면서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의문이다. 1984나 설국열차같은 책과 영화를 수 십 번 접하고 수 십 개의 리뷰를 적는다 하더라도 실제 생활에서의 변화가 없다면, 실제 생활에서의 희생, 불편함, 고통, 고뇌를 감수함으로써 부조리에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면, 시스템은 영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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