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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세르비아

세르비아 크랄레보: 집시가족, 학교수업, 시골집 (여행 92일째)

(2016년 10월 18일 이어서...)


보이칸이 여자친구에게 커피를 배달하러 떠난 후, 혼자 남아 한국에 대해 세르비아 학생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안쪽 방에 있던 보야나가 부른다. 


"심심하면 여기 들어와 있어, 거기 춥잖아." 


담배연기가 가득한 방으로 들어가니 검정 머리를 뒤로 빤질빤질하게 넘긴 아저씨가 큼직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한다. 아저씨와 보야나는 하시시를 피우고 있었다. 셋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왠지 모르게 프랑스인들과 함께 있는 기분이다. 그러다가 어린 방문객이 왔다. 16살짜리 집시(로마니)소녀다. 보야나가 여성이나 집시의 인권에 관련된 일을 하며(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강연을 함. 세르비아 문학을 전공해 이전에 스투데니차[Studenica,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수도원이 있음]에서는 교사였음), 돌봐주는 집시 아이들이 이곳에 종종 방문한단다. 집시소녀가 있는 동안에 보야나는 하시시(담배에 넣어서 피움)를 피우지 않았다. 


"아무리 겉치레라고 해도, 이 애들한테는 내가 담배나 마약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눈앞에서 그러면서 어떻게 상담이나 조언을 해 주겠어?" 집시소녀가 떠나고 다시 담배를 꺼내 피우며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보야나가 말했다.


집시소녀는 의무교육 때문에 학교에 억지로 다니고 있는데, 또래 애들보다 낮은 학년 수업(초등학교)을 듣고 있고, 거기까지만 마치면 더 이상 안 다닐거라고 한다. 집시소녀와 같이 사는 이모는 (집시들은 주거할 공간이 많지 않아, 열명이나 스무명 이상이 한 집에서 지내며 개인 방이나 사생활 같은 것은 없고, 모든 물건과 생활을 공유한다고 함) 여덟번째 애를 임신했단다. 


첫번째 집시 손님이 가고 다음으로 온 집시엄마는 22살인데(한국이었으면 아직 어린애다), 큰 애가 다섯살이고, 뱃속의 애를 포함해 아이가 4명이란다. 서너살 되어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와 첫돌도 안 지난 듯한 조그만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임신중이면서도 담배를 계속 피웠다. 웃으면서 귀여운 세살 딸래미의 뺨따구를 계속 때렸다. 보야나에 의하면, 집시 사회에서는 '아동 폭력', '아동 인권' 같은 개념이 없다고 한다. 꼬마 여자아이도 쪼그만 동생을 손으로 툭툭 때렸는데, 아마 보고 배운거겠지? 그래도 아이들이 너무 예쁘다. 갓난 아이를 넘겨 받아서 안고 있으며, 칭얼대지 않게 흔들어 주었다. 


"나는 30분 이상은 절대 못 봐주는데, 넌 인내심이 대단하구나?" 


보야나가 칭찬을 해준다. 하지만 나라도 이렇게 몇시간, 하루 종일, 일주일, 한달, 일년을 하라고 하면 꽁무니를 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순간만큼은 (어제 고양이를 안고 있을 때처럼) 너무 행복하다.


아침 일찍 마당을 돌아다니는 아기 고양이.


세르비아 지폐. 100디나르 권에는 니콜라 테슬라의 초상이 있다.


아기 집시


딸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 집시


박물관 앞에서 보이칸을 만나기로 했다. 한국에 대해 무엇을 얘기할지 곰곰히 생각해 봤지만 결국 구체적인 내용을 정하지는 못했다. 보이칸도 수업이 있을 때만 학교에 가면 되기 때문에 (하루 종일 학교에 있어야 하는 한국 선생님들과는 다름) 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나타났고, 나와 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가 너무 예뻤다. 약간 긴장되는 마음으로 보이칸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아직 수업시간이어서 아무도 없는 복도에 앉아서 기다렸다. 쉬는시간 종이 치자 아이들이 우르르 교실에서 나왔다. 머리를 빡빡 민 동양 남자를 본 아이들의 호기심이 폭발했다. 복도가 가득 차도록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이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고, 인사하고, 시끌시끌 소리지르고 떠든다. 압도될 정도로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군중을 뚫고 들어간 교실에서도 마찬가지. 보이칸이 진행을 맡았기 때문에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수업은 어렵지 않았다. 


"이 사람은 한국에서 왔단다. 너희들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니?" 


보이칸이 질문하자 많은 아이들이 "강남 스타일!"을 외치며 손으로 춤을 흉내낸다. 보이칸이 아이들에게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묻는다. 몇몇 똘똘한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지 열심히 대답한다. 교실의 컴퓨터로 지도를 띄워 한국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자, 그럼 한국에는 어떤 도시들이 있을까? 한국의 수도는 어디일까?"


보이칸이 질문을 하면 내가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아이들 중에는 보이칸의 통역 없이도 영어를 바로 알아듣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밖에도 음식, 무술(20년전 배웠던 태권도 노란띠 수준으로 시범도 보여줘야 했음) 등 보이칸의 수업 방향에 따라, 혹은 학생들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따라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와중에 '니콜라'라는 조그맣고 잘생긴 아이는 엄청난 산만함으로 교실을 시끄럽게 만들고 수업을 훼방놓았다. 보이칸이 "니콜라! 그만해!"라고 소리친 것만 수십번.) 아이들이 한글에 대해 알고 싶어해서 칠판에 한글 자음과 모음을 적고 그 밑에 어떻게 발음되는지를 알파벳으로 적었다. 그리고 어떻게 자음과 모음이 결합해 글자를 만들고, 어떻게 발음되는지를 설명했다. 지루할 것 같은 내용인데 많은 아이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수업이 끝나고, 어떤 아이가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서명을 해달라고 종이와 노트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들고 온 종이를 보니 칠판에 적힌 자음과 모음을 그대로 따라 적은 것이 보였다. 와... 이 예쁜 천사들...! 교실문 밖에서는 수업이 끝나고 나온 다른 반 학생들이 따닥따닥 붙어서 교실 안을 엿보고 있었다. 교실문을 나오면서 복도를 채운 아이들이 뻗은 손바닥에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악수를 해주면서 연예인처럼 학교 건물을 빠져 나왔다. 정말 멋진 경험이다. 많은 사랑.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에 대한 우리의 디폴트 값(기본값)은 사랑이다. 


학교 건물


알록달록 예쁘게 꾸며진 학교 내부



수업시간 조용한 복도.


교실 풍경



수업후 신나게 손을 흔드는 학생들. 너무 행복한 순간.


수업을 마친 학생들과 교문 밖에서 기다리는 학부모들.


수업이 끝나고 보이칸과 보이칸의 여자친구가 중국인 마트에 살 것이 있다고 해서 따라갔다. 이렇게 도시에 중국인이 있는걸 보면(중국인은 없는 곳이 없다), 동양인을 본다고 해서 그렇게 열광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학교에서는 왜 그랬을까? 마트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어젯밤 맥주를 사줬던 밀로시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아까 시내에서 날 봤다고 한다. 부모님이 사는 마을에 초대를 해줘서 한시간 뒤에 만나기로 했다. 


집 앞으로 차를 끌고 온 밀로시와 밀로시의 여자친구 타마라. 이미 해가 져서 어두워졌다. 마을은 도시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차를 타고 이삼십분 달려야 했다. 가는 길에 밀로시가 신기한 것을 구경시켜 주겠다더니 어두운 시골 길 한복판에 차를 세웠다. 자동차 전조등이 커다란 나무 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나무는 속이 비어 있었고 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성인들의 성화(聖畵)와 제단이 들어 있었다. 나무 성소는 그렇게 어둠속에서 신비로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밀로시 부모님 집에 도착해서는 설탕물에 절인 서양자두(플럼), 커피, 라끼아(독한 술)를 먼저 대접받았고, 식사로는 치킨, , 토마토 양념, 샐러드를, 후식으로는 케이크를 얻어 먹었다. 어제부터 너무 받기만 해서 줄게 없나 곰곰히 생각하다 보니, 조끼 주머니에 불가리아에서 벨리자에게 받은 자석이 떠올랐다. 냉장고에 도시 자석 모으는 것을 많이 봤는데, 이 집 냉장고에도 유럽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기념품으로 사온 듯한 자석들이 붙어 있었다. 자석을 건네 주자 밀로시가 정말 행복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꽉 껴안아 준다.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로 만들어진 빈집과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마을 이야기, 코소보 이야기, 수많은 모험 이야기들... 언젠가 누군가와의 이야기 꽃을 위해 머릿속에 남아 있기를.


(2016년 10월 18일 23:50) 

크랄레보. 아지트의 보야나 방. 라디에이터 옆 의자. 비 내림


비오는데 따뜻한 방에 아늑한 불빛 아래 앉아 잠들 준비를 한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점심에 보이칸이 말했던 것처럼, 기본적인 식음료와 지붕있는 집만 있으면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데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약간의 술이나 담배), 한국에서의 삶은 뭐 이리 복잡하고 바쁜건지. 빗소리가 너무 좋구나. 그리고 아기 고양이는 애처롭게 운다. (불가리아에서 라끼아를 잔뜩 마신 이후로 생긴) 허벅지 양쪽을 시뻘겋게 뒤덮었던 붉은 반점들이 이제 슬슬 사그라들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지난 90일동안 설사, 코막힘, 혓바늘, 몸살, 감기, 부상 등의 질병이나 사고 없이 지내온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지! (밖에서 몇번 밤을 보내고 빗속과 땡볕을 한참을 걸었음에도.) 게다가 90일동안 심심할 일도 없어서 (러시아에서 사포질 하던 때 빼고) 영화나, 책이나, 게임의 필요도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오늘만 해도 정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크고 싸고 담백하고 쫄깃한 빵


나무 성소


밀로시네 집 식탁과 냉장고


오늘은 거실 소파 대신 보야나의 방을 차지하고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