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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세르비아

세르비아 니시-크랄레보: 사루만의 탑과 참새 광장 (여행 91일째)

(2016년 10월 16일 저녁. 이전 글에 이어서...) 

피자 사건으로 실망감과 약간의 울분으로 속이 꽁해 있었는데, 일기를 쓰다보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때 밀로시로부터 자신의 스승인 스리 친모이의 책을 선물 받으면서 마음을 풀기로 했다. 비싼 피자를 샀지만, 결국 나는 신세를 지고 있는 식객 아닌가! 이미 깜깜해진 저녁인데, 밀로시의 여자친구 두냐의 어머니 집에 가자고 한다. 아무리 쉬고 싶어도, 집주인이 어디에 가자고 하면 내색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따라가는게 좋다. 따라가 보면 나쁜 경우도 별로 없고. 


밀로시는 두냐 어머니 집에 가는 것이 무지 싫은가보다. "자, 이제 우리는 악의 소굴로 가는거야. 싫다! 그녀는 사루만! 악마! 고통의 시간이 오는구나! 잘 견뎌 보라구." 밀로시가 격렬하게 투덜거린다. 실제로 만나본 엄마는 좀 수다스럽고 산만하기는 하지만 밀로시가 사루만 취급하는 건 좀 심했다. 지하 창고에서 뭐를 날라 달라고 해서 밀로시와 같이 머슴 노릇을 좀 하고, 조그맣지만 맛있는 케이크와 퐁퐁 냄새가 나는 차 한잔을 얻어 먹었다. 조그맣고 어두컴컴한 방에는 세계 곳곳의 여행지에서 사온 기념품, 그림, 조각들이 가득했고, 주인처럼 정신없는 개가 한마리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두냐의 엄마는 나에게 호감을 보이며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더니, 내 대답은 듣기도 전에 다른 말을 쉬지 않고 했다. 또 말을 시켜 놓고는 듣지도 않고 TV에 정신을 빼앗겼다가 거기 나오는 이야깃거리로 화제를 돌리는 것이 은근히 밀로시와 비슷하기도 했다. 


세르비아의 기차 이야기와, 밀로시의 고향 크랄레보(Kraljevo) 얘기가 나왔다. 두냐의 엄마가 여기 와서 일하면서 며칠 지내다 가도 된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왠지 더 이상 깊이 엮이면 피곤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일 기차를 타고 크랄레보로 가는 걸로 정했다.


2016년 10월 17일 월요일


밀로시 집에서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떠날 준비를 시작한다. 먼저 무엇보다 중요한 똥을 처리한다. 이렇게 아침을 시작해야 하루 종일 화장실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뒤를 물로 깨끗하게 닦을 수 있으니 찝찝함이 없다. 씻고, 짐을 싸고, 외투를 입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설 준비가 끝났다. 아직 이른 새벽이어서 깨우기가 애매하다. 조용히 떠날 것인가, 아님 자고 있는 집주인을 두들겨 깨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떠날 것인가! 매일 새벽에 명상한다던 밀로시... 왜 자고 있는 것이냐. 잠이 깊게 든 밀로시 방문을 한참 두드려 깨워 작별하고, 집을 나선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이른 아침의 니시. 밀로시의 집부터 기차역까지는 약 1시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다. 25디나르(280원) 짜리 빵을 하나 입에 물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다. 강을 따라 걷다가, 니시 요새의 성곽과 시티센터를 지난다. 


멋진 하늘! 서울에서도 매일 이런 하늘을 볼 수 있다면.


누구를 위하여 나는 나뭇잎을 줍는가?


맑은 공기 속에서 더 선명해 보이는 니시 요새.



맑은 새벽 공기와 영롱한 하늘 아래에선 이런 네모진 건물들도 멋지다.





기차 시간까지 아슬아슬하다. 와이파이가 없는 상태에서 갤럭시 노트2의 구글맵을 켜고 GPS를 켜두면, 한참 뒤에 현재 위치가 잡히는데, 이렇게 급할때에 위치가 잡히지 않아 마음이 급해지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는 건물이 보이길래, 여기인가보다 하고 들어갔는데, 전혀 상관없는 건물이었다. 아마도 보건소나 관공서가 아니었나 싶다. 급한 마음에 노인 한분을 붙잡아 기차역을 물어보니 길을 따라 더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주신다. 다행히 출발 10분 전에 기차역에 도착, 급히 표를 끊고 열차에 올라탔다. 좌석은 있는데, 내부는 기차라기보다는 전철 같다.


졸기도 하고, 풍경 구경도 하고, 느릿느릿하면서도 내리기 싫어지는 기차 여행. 편하게 앉아 있으니 스르륵 졸음이 온다. 중간에 이름모를 시골역에서 내려 열차를 한번 갈아타고 또 한참을 달려, 4-5시간만에 쌀쌀한 크랄레보에 도착했다. 


서있고 싶은 풍경.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서서 기차를 보내는 시골역의 철도원.


기차를 한번 갈아탄다.




차창 밖으로 휙 지나쳐 앞으로 평생 못보게 된다는게 아쉬운 시골 풍경.


크랄레보에는 전날 카우치서핑 요청만 몇개 보내놓고 아무런 결정도 없이, 하지만 별 근심도 없이 왔다. 물가가 싼 동유럽이지만, 관광객이 우글거리는 장소가 아니어서 5달러짜리 공용 객실 같은 것은 없다. 그렇다고 2-3만원정도 하는 보통의 게스트 하우스나 호텔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하루 식비가 1-2천원인데 어떻게!), 카우치서핑을 못하면 영락없이 해먹 칠 곳을 찾아야 한다.


기차에서 내려 무작정 시티 센터를 향해 걷는다. 가는 길에 슈퍼에서 싸구려 빵을 잔뜩 샀다. 맨 빵을 뜯어 먹으며, 물을 한모금씩 마시며, 지도를 보고 찾아간 시티 센터. 날씨가 흐려서 왠지 우중충한 광장과 커다란 동상, 배낭이 무거워 몸을 좀 쉬게 하고자 벤치에 앉는다. 비가 내렸다가 막 그친것처럼 혹은 이제 곧 내릴 것처럼 칙칙한 날이다. 싸구려 초코바를 먹고, 빵을 뜯어 먹으며 바닥에 흘리자 어느샌가 참새들이 십여마리 모여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다. 빵 가루를 뿌려주자 열심히 쪼아 먹는 참새들이 귀엽다. 시티 센터에는 미약하지만 무료로 쓸 수 있는 와이파이가 잡힌다. 잘 잡히지 않아서 여기 저기 신호가 센 곳을 찾아 움직였다. 와이파이가 잡히자, 전날 새벽에 보내 놓은 카우치서핑 요청이 수락되었다는 메시지가 와 있다! 기대도 안했는데 신기하다. 이렇게 아무런 '확실함'이 없더라도 무턱대고 목적지를 잡고 가보면, 대궐같은 집에 개인 욕조 딸린 침실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머물 곳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 불가리아의 플레벤도이렌치에서도 그랬고, 지금 여기서도 그 마법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신비롭게 시작된 만남일수록 더 흥미진진한 일들이 생긴다. 크랄레보라는, 며칠 전만 해도 이름조차 모르던 이 작은 도시에서도, 평생동안 잊지 못할 일들이 있었지...


(다음 글에서 계속...)

이건 또 누굴 위한 나뭇잎인고...


크랄레보의 광장.


참새 친구들 안녕?



친구도 없고, 맥주도 없지만, 싸구려 초코바가 있어서 행복한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