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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노베 잠키: 배우와 극작가 (여행 106일째)

2016년 11월 1일 화요일

슬로바키아 노베 잠키(Nove Zamky)


배경음악: The Calling - Wherever You Will Go


아침에는 라스타의 아버지와 볶은 양파와 파프리카, 빵을 먹었다.


점심으로는 주키니(애호박)를 갈아 만든 수프, 두부, 샐러드를 먹었다.  


그야말로 먹고 노는 시간이다. 관광할 만한 곳도 없는 작은 도시여서 어디 나갈 필요도 없다. 정말 좋은 가족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는 호스트는 오랜만이다.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의 알리 가족, 러시아 모스크바의 파리다, 중국 시닝의 치준과 있을 때처럼 마음도 몸도 편하다. 게다가 돈 쓸 일도 없다! 슬로바키아에 입국 하고 나서 2.1유로짜리 기차표 산 것 외에는 돈을 한 푼도 안썼다.


오후에는 라스타와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강변을 따라 쭈욱 달려 내려가다가 잔디밭 벤치에 앉아 레몬 맥주를 마시고, 바나나를 먹고, 저글링 연습을 했다. 그야말로 태평천하다. 같이 사진을 찍고 잡담을 나눴다. 


"여긴 여행객이 거의 없어서 카우치서핑 신청이 오면 다 받아줘. 아마 지금까지 딱 한명만 거절했을건데 이유는 기억이 안나. 그런데 카우치서핑으로 아무리 손님을 많이 받고 후기글(리퍼런스)이 쌓여도 소용없어. 요청을 수십개 보내도 모두 거절당하거나 답변이 없는 경우가 있거든. 그런데 리퍼런스가 단 하나도 없는 내 여자친구가 요청을 보내면 한번에 승낙을 받더라고. 그래서 같이 여행할 땐 내 계정을 안쓰고 여자친구 계정을 써." 라스타가 카우치서핑에 대해 말했다. 


"푸하하하! 그런데 여자친구 계정으로 요청을 보내고 네가 같이 가도 되는거야?" 내가 물어봤다.


"이런 식으로 메시지를 보내는거지. '안녕하세요! 친구랑 여행을 다니는 중인데 이틀동안 묵을 곳이 있나요?' 절대로 '남자친구랑 여행하고 있는데'라고 하면 안돼." 라스타가 대답했다.


하하하. 머리를 잘 쓰는군. 확실히 여자 여행자는 카우치서핑을 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남자 집주인 입장에서는 여자 여행객이 온다면 좋다고 반길 것이고, 여자 집주인 입장에서는 남자 여행객이 온다면 위험할 수 있으니 여자 여행객을 더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여자 여행자 입장에서는 그만큼 더 위험성도 높겠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나는 남자 여행자여서 그런 걱정이 별로 없지만, 가끔씩 카우치서핑이나 히치하이킹이 너무 안 될 때는 여자 여행자가 부러울 때도 있다.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라스타 아버지가 주키니로 호박전을 해 주셨다. 라스타 어머니는 회사에 가서 늦게 돌아오신다고 했다. 와인을 마시며 호박전을 먹고 쉬었다.


거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들이 마음에 든다. The CallingWherever You Will Go 같은 옛날 팝송도 나오고, 요즘 팝송도 나온다. 음악을 들으며 핸드폰과 전자책을 가지고 놀았다.


저녁에는 라스타와 함께 바에 갔다. 라스타의 친구인 데니스마릭을 만났다. 모두 노베 잠키 출신인데, 데니스는 어제 같이 농구하러 갔던 친구이고, 마릭은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서 배우로 일을 하고 있다. 슬로바키아 공중파 방송 일일연속극에 조연으로 출연중이어서 꽤나 유명하다는 마릭은 얼굴에 미소가 붙어있는 잘생긴 금발 청년이다. 시원한 슬로바키아 맥주를 한잔씩 시켜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배우의 삶은 어때?" 내가 물어봤다.


"좋아. 그런데 난 배우보다는 감독일 때가 더 좋아." 마릭이 대답했다.


"무슨 감독? 감독도 하는거야?" 내가 다시 물어봤다.


마릭이 웃으며 대답했다. "응. 돈은 일일연속극 배우로 벌고 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감독도 하고 있어. 지난주 토요일에는 연극 감독을 했어. 데니스, 라스타, 너희들도 왔었지?"


"어떤거였지? 난 그때 다른 일이 있어서 못갔을거야." 데니스가 말했다.


"연극은 무슨 내용이었어?" 내가 물었다.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 지옥에 앉아 있어. 그런데 이 지옥은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리는 뜨거운 불구덩이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방이야. 단지 이 세 사람은 방에서 나갈 수 없고 영원히 함께 있어야 할 뿐이지. 하지만 각 사람은 타인의 존재로 인해 지옥을 경험한다는 내용이야. 사르트르(Sartre)의 '출구 없는 방'(Huis clos)이라는 연극이야." 마릭이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연기와 실제의 삶과 그 사이의 경계... 연기를 하는 마릭, 감독을 하는 마릭, 여기서 지금 맥주를 마시는 마릭은 모두 같은 마릭일까?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말했던 "너는 극작가의 바람에 의해 결정된 그러한 인물인 연극에서의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이 생각난다. 우리 모두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부자 역할, 가난뱅이 역할, 주인 역할, 손님 역할, 선한 역할, 악한 역할. 그리고 마릭은 오늘 맥주값을 내는 역할까지 훌륭하게 마쳤다.


집에 가는 길에 나에게 나이를 묻는다. 28살이라고 대답하니 놀라며 17살 정도로 보인다고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기억은 6-7년이 지나면 대부분은 잊혀 버린다. 나는 내가 태어났던 순간과 어린시절이 정확히 몇 년 전인지 기억할 수 없다. 단지 사진과 계산을 통해 알 뿐이다. 그렇다면 만약 실제 내 나이에 대한 기록(주민등록번호, 사진 등)과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스스로가 17살이라고 생각하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피터팬처럼, 짐승들처럼, 나이를 세지 않고 그 순간에 살면 그게 바로 영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어린아이 방 같은 라스타의 방.


냉장고에는 자석과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라스타의 아버지가 맛보라며 슬로바키아 독주(Bylinovka)를 한잔 따라 주셨다.


야채를 잔뜩 갈아 만든 주키니 수프.


길거리의 쓰레기 더미.


라스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파란 들판을 달렸다.


초점은 안 맞았지만 잘 나왔다.


저글링공, 바나나, 레몬 맥주.


시티 센터.


슈퍼마켓에 잠깐 들렸다. 자전거 자물쇠가 없어서 밖에서 자전거를 지키는 동안 라스타가 장을 봐 왔다.


환경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새로 나와서 같이 봤다. 라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오는 다큐인데, '비건'에 관한 내용이 안나와서 라스타도 나도 약간 실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