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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독일 & 네덜란드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신터클라스, 자전거, 밀라노행 버스, 경찰 (여행 118-119일째)

2016년 11월 13일 일요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Utrecht)


배경음악: I Wanna Be Like You (Sim Gretina Remix)


아침 일찍부터 밖으로 나가려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다시 돌아와 앉아 있다. 베라, 아눅, 또 한명의 이름모를 친구는 네덜란드어로 수다를 떨고, 나는 근엄하게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지.


베라: 어제 신터클라스(Sinterklaas)가 왔다는데 구경갈래?


신터클라스는 네덜란드의 산타클로스 비슷한 존재다. 사실 산타클로스의 원조 격이라고 한다. 12월 5일은 신터클라스 데이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선물을 주고 받는 날이다. 5년 전 베라와 나타샤가 한국에 있을 때 신터클라스 데이를 함께 보낸 기억이 난다. 친구들을 잔뜩 모아서 게임을 하고, 선물을 교환하고, 베라 가족이 소포로 보낸 네덜란드 과자, 초콜릿, 사탕을 먹으며 술을 마시고 놀았다. 어제 바로 그 신터클라스 할아버지가 배를 타고 네덜란드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트레흐트에는 며칠 뒤에나 올 예정이고, 신터클라스를 보려면 기차를 타고 가야 해서 구경하러 가는 건 관뒀다.


베라: 신터클라스는 조그만 조수와 함께 다니는데, 조수[스와트 피트(Zwarte Piet, 검은 피터)]가 흑인이라 인종차별 논란이 있어. 우리끼리 그 얘기를 하고 있었어.


수백년 동안 아무렇지 않게 계속된 전통 문화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맞게 되는구나. 확실히 흑인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 있겠다.


행진하는 신터클라스와 스와트 피트들 (source: flickr)


Illustration from the 1850 book St. Nikolaas en zijn knecht (source: Wiki Commons)


아가씨들의 잡담을 지켜보다가 비가 조금 수그러드는 것 같아서 베라와 함께 네덜란드식 자전거(Dutch bike)를 한대씩 끌고 나갔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로 베라를 따라 열심히 페달을 밟는다. 


확실히 네덜란드는 자전거의 나라다. 자전거 도로가 이리저리 잘 뚫려 있다. 마음만 먹으면 옆도시 그 옆도시 그 옆도시까지 자전거 도로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수신호도 체계적이고 잘 지켜진다. 좌회전 할 때는 왼팔을 들고, 우회전 할 때는 오른팔을 든다. 


무심하게 팔을 들어 방향을 가리키는 베라의 뒷모습이 멋있다. 나도 어색하게 수신호를 흉내내며 베라를 따라간다.


: 한국에서는 도로에서 자전거 탈 때 헬멧을 쓰는데 여기에서는 아무도 안쓰네.


베라: 그런거 없어.


: 한국에서는 수신호도 안하는데 여기서는 다들 수신호를 하네.


베라: 수신호를 안한다고? 흠... 헬멧을 쓰는 이유가 있었군.


나란히 달리다가, 일렬로 달리다가, 대화를 하다가, 침묵에 잠겼다가 하면서 한참을 달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앞서가는 베라를 따라가는게 힘겹다. 안장에 가볍게 앉아서 페달을 밟는 베라는 쭉쭉 나가는데 나는 그 속도에 맞추려면 엉덩이를 들고 반쯤 서서 페달을 마구마구 밟아야 한다. 조금 따라잡았다 싶으면 다시 멀어진다. 경사가 없는 길도 평지를 달리는데도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다.


한때는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었고, 고물 자전거를 끌고 인천에서 대전까지 찻길을 따라 내려가 본 적이 있어서 나름대로 자전거를 잘 탄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여자애 페이스에도 못 맞추고 있는거냐.


: 베라!


베라: 응?


: 너무 빨라... 천천히...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베라가 속도를 좀 늦춰 줬으나 그래도 힘들다. 


헥헥... 어디까지 가는거냐. 결국 한번 더 베라를 부른다.


: 베라!


베라: 응.


: 더 못 가겠어... 집에 가자.


원래 베라의 계획은 자전거 코스를 돌고 나서 시내의 바에 갔다 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탈진할 만큼 지쳐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신터클라스니 바니 뭐니하는건 다 포기했다. 


베라가 끓여준 바나나 포리지를 먹고, 오후 내내 쉬었다.


저녁에는 베라와 함께 장을 보러 슈퍼마켓에 갔다. 한적한 길을 나란히 걸으며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고, 같이 장을 보고, 장 본 것을 들고 돌아오는 이런 사소한 일들이 그저 좋았다. 돈은 전부 베라가 냈다. 베라의 지갑은 내가 옛날에 생일선물로 보냈던 미키마우스 지갑이었다. 아직 그 지갑을 쓰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정말 좋다. 베라가 평생 이 지갑을 쓰면 좋겠다.


베라가 해준 저녁을 먹고, 시간은 흘러 밤이 되고, 잘 시간이 되었다. 내일은 떠나는 날이다.


아, 침묵의 시간마저 달콤했는데 잠깐의 꿈처럼 모두 지나가 버렸군. 



2016년 11월 14일 월요일

위트레흐트(Utrecht) - 밀라노(Milan)행 버스


아침. 베라와 아눅은 출근을 하고 나는 집에 홀로 남아 빵을 먹었다. 베라와 아눅에게 고맙다는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온다. 


밀라노행 버스 타는 곳을 향해 걷는데, 지금 여기 위트레흐트라는 도시를 걷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이고 우스워 허허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버스를 탄다. 버스는 앙트워프, 브뤼셀을 거쳐 룩셈부르크 어디에서도 잠깐 멈추더니 이름모를 프랑스 도시들을 지난다. 그러다 보니 밤이 되었다.


프랑스 어딘가에서 경찰 이십여 명이 버스를 둘러싸더니 버스에 올라타 내부와 승객들을 샅샅이 검사한다. 결국 모든 승객들이 짐을 들고 버스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리고 커다란 셰퍼드가 껑충껑충 뛰며 여기저기 헤집고 다닌다. 뒷자리에 앉아서 떠들던 모로코 느낌이 나는 남녀 둘이 체포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여자는 신발도 벗고, 가방도 열고, 경찰들에게 탈탈 털리다가 결국은 수갑이 채워진다. 체포된 남녀의 일행이었던 다른 남자 한명은 다시 버스에 타고 간다. 승객들도 기사들도 별일 없었다는 듯이 버스에 다시 오른다. 그리고 버스는 다시 간다. 밀라노에는 내일 새벽에 도착 예정이다.


슬로바키아의 나타샤가 동물들을 그려준 종이. 그 뒷면에 편지를 적었다.


예쁜 벽화.


멀리서도 잘 보이는 돔 타워 덕분에 나침반이 필요없다.








이 녀석이 바로 검은 피터다.




마지막으로 돔 타워를 돌아보고 위트레흐트와는 작별이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손에 손을 잡고 길을 건너는 유치원생들이 보인다.



브뤼셀에서 정차중인 밀라노행 버스. 이때는 얼마 뒤 바로 이곳으로 돌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


중간에 휴게소에 몇번 들렀다. 상점의 기념품을 보고 나서야 이곳이 룩셈부르크라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 어딘가에서 경찰에게 포위당한 버스. 승객만큼 많은 수의 경찰이 버스에 올라탔다.


경찰과 체포된 남녀를 두고 버스는 다시 밀라노를 향해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