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일주/영국

영국 옥스포드 헬프엑스: 파트너십, 마사지, 작업, 자석 답안기 (여행 191-192일째)

네 눈길을 기만의 세계에서 돌려라.
그리고 오관의 유혹을 물리쳐라.
오관은 너를 기만할 것이다.
오히려 너 자신 속에서,
자아를 망각한 너 자신 속에서
영원한 인간을 찾아라.

- 부처의 금언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2017년 1월 25일 수요일

영국 옥스포드(Oxford)

[1] (09:35) 어젯밤 자기 전 데이브 영감님이 기분이 별로라고 해서 이유를 물어보니, 첫째로는 추워서, 둘째로는 내가 내향적이어서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잠이 안 들어 한시간에 한 번씩 시계를 확인하며 불편하게 밤을 새웠다. 잠을 설쳤다고 해서 아침에 피곤해지지는 않았지만, 어제와 무드가 달라진 영감님을 보고 있자니, 먼 옛날 여자친구 기분 맞춰주던 생각이 나며 급격히 피곤해진다. 떠나고 싶다. 하지만 떠나려는 생각은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에 매달리는 마음이다. 영감님이 약간 사춘기 소녀처럼 굴어도, 친아버지나 친할머니라고 생각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자. 얼마나 외로울까.

[2] (19:25) ~라고 생각하며 10시간 전에는 좋은 마음으로 일기장을 닫았다. 그리고 실제로 오전에는 영감님 기분을 맞춰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영감님이 툭툭 던지는 날카롭고 빈정거리는 말들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마음은 벌써 이곳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아온 '나'라는 허상의 구축물 때문이겠지. 어쨌거나, 명상센터에서 만난 존경스러운 분들과는 달리, 이 영감님은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많은 평범한 노인이다. 나에게 처음 보낸 메시지에서 영감님이 자신을 '불교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Buddhist-Christian)'이라 소개했기에, 자비와 관용의 사상을 가진 현자일 것이라고 기대를 했는데 실망이 크다. 영감님이 여기저기 설탕을 왕창 뿌려먹는 것을 볼 때마다, 나이만 잔뜩 먹은 어린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왕자가 여러 행성에서 각종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욕망과 허영심을 관찰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영감님의 '파트너십(partnership)'에 대한 집착도 부담된다. 파트너십은 동업자 관계를 뜻하기도 하고 동성간의 혼인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영감님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는 여성과 파트너십을 가졌고, 그 여성과 헤어진 후에는 두 명의 남성과 파트너십을 가졌다고 한다. 영감님의 알쏭달쏭한 성적 지향성은 내가 판단할 부분이 아니지만, 나에게 파트너십에 관한 얘기를 계속 꺼내는 것이 이상하고, 경계심을 유발하는 도를 넘은 스킨십이 불쾌할 때가 있다. 지금까지 가져온 '독신'에 대한 경건한 이미지가 산산히 부숴지고 있다. 독신을 하려면 수도원에 들어가자.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신의를 지키며 살자.

[3] 오늘은 작업이 없는 날인줄 알았는데, 창문 닦기, 청소, 장보기, 설거지 등 평소와 다름 없이 일했다.

[4] 저녁에 명상을 마친 후에는 영감님과 함께 산책을 다녀왔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침대에 눕자마자 마사지를 해달라고 한다. 귀찮음과 언짢음과 기북함이 뒤엉킨 상태에서 대충 안마를 해주고 있는데, 영감님이 "나는 누가 마사지를 할 때 그 사람 생각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아. 너는 지금 정신이 흩어져 있어" 라며 마사지 시범을 보이더니 다시 해달라고 한다. 글쎄... 이 영감님... 좋은 테스트다. 내 인내심의 한계를 재는 좋은 시련이다. 말없이 대충 좀 더 해주고 대충 끝내고 눈을 감았다. 이날 밤도 한시간에 한 번씩 깨며 불편한 잠을 잤다. 그래도 공항 노숙보다는 낫다.

뭐든 마음먹기 나름이니 영감님의 좋은 점도 생각해 보자. 말을 먼저 걸어오는 경우가 많고, 자전거를 잘 타고, 건축과 집 수리를 할 줄 안다. 깔끔하고, 규칙적으로 명상하고, 철학에 관심이 많고, 자연과 산책을 좋아하고, 새들에게 먹이를 준다. 영감님이 오랜 기간 동안 금전적으로 돕고 이민을 도와준 네팔인들도 몇 명 있다. 자꾸 파트너십 얘기를 꺼내고, 이상한 심리테스트 같은 것을 시켜서 그렇지 근본은 좋은 사람이다. 남은 시간도 평화롭게 잘 맞춰주며 지내자.

1번집 주방

1번집 온실. 아침이나 저녁에 앉아 있으면 새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2017년 1월 26일 목요일

영국 옥스포드(Oxford)

[1] 오늘 작업은 주방 청소, 설거지, 2층 벽 수리 보조, 조리기구 청소, 다림질, 커튼 달기, 장보기 등이었다. 헬프엑스 프로필에서는 주 16시간 작업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왠지 하루 16시간 일하는 기분이다. 그래도 영감님이 끔찍히 사랑해 주시니 잘 참아보자.

[2] 6개 답안(네, 아니오, 절대적으로, 아마도, 재시도, 친구에게 물어보기) 중 하나가 무작위로 선택되는 영감님의 자석 답안기를 이용해 문답 놀이를 했다. 영감님의 질문인, 내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마도'라는 답변이 나왔고, 나의 질문인 내가 7월에는 한국에 돌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네'라는 답변이 나왔다. 신기하군.

1번집 창고

1번집 2층 영국 하숙생의 방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는 조용한 학생인데 나와 같은 책을 읽는다는 것을 알자 연민과 동지애가 생긴다.

2번집 거실

1번집 온실의 자석 답안기. 질문을 하고 가운데 추를 힘껏 돌리면 답변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