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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영국

영국 옥스포드 헬프엑스: 모닝티, 이야기 박물관, 죽음과 불안 (여행 193일째)

네가 여태까지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 오히려 비난했던 사람, 나에게 악한 짓을 한 사람을 사랑하도록 노력하라.
만일 네가 그리할 수 있게 된다면 너는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멋진 기쁨의 감정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2017년 1월 27일 금요일

영국 옥스포드(Oxford)

[1] 모닝 티: 일어나자 마자 데이브 영감님이 차를 끓여달라고 하신다. 우선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인다. 물이 끓는 동안 주전자를 준비하고 머그컵에 우유와 설탕과 사카린을 적당량 넣는다. 우유는 1.5 센티미터 정도, 설탕은 두 세 스푼, 사카린은 한두 알. 너무 많아도 안되고 너무 적어도 안된다. 물이 끓은 후에는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조금 부어 한 번 헹궈낸 후,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2분 30초에서 3분 정도가 적당하다. 너무 진해도 안되고 너무 연해도 안된다. 모닝 티를 영감님 입맛에 안 맞게 준비하면 하루가 피곤해지는 수가 있다.   

[2] 청소: 아침에는 영국학생(잭) 방의 온수기 커버가 제대로 닫히지 않는 것을 수리했다. 그 후에는 오전내내 주방 찬장(위 칸, 가운데 칸, 아래 칸)을 청소했다. 찬장의 각종 식기들을 꺼내고, 세제를 푼 물에 스펀지를 담갔다가 짠 후, 거친 녹색 부분으로 내부를 닦았다. 오래 된 스펀지에서 녹색 부분이 떨어져 나와 닦을수록 더러워지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대체로 깨끗해졌다. 특히 더러웠던 아래 칸(거미도 많고 바퀴벌레 시체도 많았다)은 많이 나아졌다. 거미는 죽이지 않고 살려뒀다.

[3] 시내 나들이: 점심으로 수프와 치즈 토스트를 먹고, 2번집(유니온 스트릿)에 들렀다가, 영감님을 따라 시내에 나갔다. 날씨는 좀 따뜻해졌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리멍텅했다. 영감님은 나를 데리고 문구점에 가서 엽서를 골랐다. 영감님 사촌 누나의 생일이란다. 영감님이 고른 엽서는 3.75파운드였다. 초코렛이 0.3파운드, 다이제가 0.45파운드, 빵이 0.35파운드인데... 엽서가 너무 비싸다. 그 다음에는 우체국으로 가서 엽서 부치는 것을 봤다. 모든 일이 끝난 후에는 영감님이 나를 이야기 박물관 카페(Story Museum Cafe)에 데리고 갔다. 푸근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영감님이 좋아하는 라떼를 두 잔(5파운드) 시켜 마셨다. 

이야기 박물관 카페

[4] 대화: 슈퍼마켓에 유통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할인 품목을 사러 나가기 전(쿠키와 비스킷을 샀는데 정말 싸다), 데이브 영감님이 습관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느끼기 위해, 매일 동일한 습관들을 반복하고 있어." 그렇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과 규칙에 맞춰 일어나고, 명상하고, 차를 마시고, 씻고, 음식을 조리하고, 청소하고, 산책하며, 애써 내면 깊숙히 자리잡은 불안함을 외면하려 한다. 영감님은 옆집에 살던 린다와 모리스 부부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남편인 모리스는 위장암 판정을 받았지만 병원에서 의미없는 치료를 받는 대신 집에서 죽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어느 날 모리스가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린다는 데이브 영감님에게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모리스는 데이브의 팔에 안겨 죽었다. 데이브는 모리스의 죽음을 지켜보며, 엠뷸런스를 기다리며, 린다를 위로하며 몇 시간을 그 자리에서 보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새 영감님은 눈 안쪽이 축축해지며 감성적이 되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며,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현실에 대해 털어 놓았다. 영감님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지난 한 주간 추위와 팔의 통증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을 때가 있었지만, 네가 있는 동안 마음이 평화로웠어. 진심으로 네가 돌아왔으면 좋겠어. 브라질에 가야 한다면, 거기에 있는 동안 천천히 생각해줘. 한국이 그리우면 한국에 갔다가 돌아와도 좋아"-라고 말했다. 그동안 이 노인의 외로움은 모른체하고, 기분 나빴던 것들을 마음에 담아두며, 도망가 다시는 안 돌아올 마음을 품고 있던게 참 미안하다. (그동안 몇 번 욱해서 나가고 싶었지만, 영국 숙박비가 너무 비싸고, 헬프엑스에 안 좋은 평이 달릴까봐 참고 있었다.) 거실의 벽과 가구를 관찰하며 음악을 듣고 앉아 있었던 덕에 데이브 영감님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겼고, 한 인간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그와 공감할 수 있었다. 영감님 방에 걸려 있는 엄마와 찍은 사진을 보면 어찌나 아름다운지... 인간이 인간을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