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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영국

영국 옥스포드: 온실 빗방울, 산책, 존재, 이븐 바투타 여행기 (여행 195일째)

2017년 1월 29일 일요일

영국 옥스포드(Oxford) / 하루 종일 비

[1] 온실: 온실 천장에 떨어지는 빗소리. 빗방울 수천 개가 무작위로 유리에 부딪히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타닥타닥 일정하고 규칙적인 리듬이 느껴지는 건지. 데이브 영감님은 팔이 아프다며 온실 소파에 누워 깜빡깜빡 졸고 있다. 저렇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늙어가는 아빠의 모습이 겹쳐진다. 영감님은 비틀즈(1960)와 스타워즈(1977)의 출현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에게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먼 훗날 나도 노인이 되어,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에게, 포켓몬(1996)과 해리포터(1997)의 시대에 살았던 얘기를 들려주게 될까?

[2] 산책: 영감님과 강을 따라 산책을 했다. 작년인가 재작년 5월에 다리에서 뛰어 내렸다가 죽은 10대 소년 얘기를 들었다. 오늘같이 춥고 우중충한 날에 정말 잘 어울리는 얘기였다. 조정 연습하는 학생들, 헤엄치는 백조 부부, 새 혹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여자, 떼지어 산책로를 지나가는 거위 무리, 갈매기들, 여름에는 시끌벅적하다는 (지금은 한산한) 맥주집(Isis Farmhouse), 수문(Iffley Lock)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온실에 앉아 유리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3] 존재: 저녁으로 돼지고기, 그레이비(양파 등을 볶고 난 기름에 옥소[Oxo] 큐브 소스를 녹인 물과 밀가루를 함께 끓여 만듦), 감자, 당근, 완두콩을 먹었다. 돼지고기에서 고기 비린내가 나지만 (돼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었다. 내가 돼지고기 먹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아는 영감님은, "지난번에 사고 남은 거라서 요리한거야. 앞으로 돼지고기는 사지 말아야겠어"라고 변명하듯이 말했다. (평소에 요리하시는 닭고기나 생선도 싫어한다는 것은 모르시나 보다.) "나"의 식단을 고집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면, 단지 빗소리와, 종이 위를 스치는 샤프펜의 사각사각 소리와, 중국 아이들 그림이 수놓아진 식탁보와, 밀크티의 따뜻함만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면, 채식에 집착하지도 않겠지.

[4] 이븐 바투타 여행기: 알란 와츠<불안이 주는 지혜(Wisdom of Insecurity)>를 끝내고, 이븐 바투타<여행기>를 읽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눈썹과 수염을 밀어버려서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오던 여자로부터 벗어난 수행자, 어떤 대구도자, 수피즘, 예수와 아브라함(모로코에서 무하메드가 얘기해준 것과 똑같은 내용이다), 목욕탕 화부 후솨이브 이야기, 하이에나와의 싸움, 15일간 걸어서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것 등등... 영국을 떠나기 전에 이 책을 처분하려고 옥스포드 한인 교회 위치를 찾아봤으나 너무 멀리 있고 비도 와서 가지는 못했다.

수문(Iffley Lock)을 지키는 갈매기들

영감님이 자주 누워 계시는 온실 소파

영국인과 중국인 옥스포드 학생들이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으나 둘 다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영감님의 오디오 장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