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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러시아

러시아 모스크바: 박람회, 우주, 세 아가씨 (여행 55일째)

2016년 9월 11일 일요일 러시아 모스크바


[등장인물]

다샤: 카우치서핑 호스트. 18살 학생이고 주말에는 식당에서 일한다.

나티샤: 다샤와 함께 사는 친구. 바에서 일하고 있고 말을 재미있게 잘한다.

리자: 다샤와 함께 사는 친구. 조그맣고 하얀 도시 여자. 스타벅스에 가서 공부하는 걸 좋아한다.


1. 아침 일찍 체크아웃 해야 된다는 압박감에 오전 7시쯤 일어나 치킨 파이와 챡챡(чак чак), 컴포트(компот, 쥬스)를 먹고(올가와 보바에게 받은 음식들) 10시까지 주방에서 숙소 관리하는 청년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어제 아침에 봤던 사람들을 식당에서 다시 본다. 사람들이 이것 저것 각자 아침을 해 먹고 차를 끓여 먹는데, 나도 음식을 먹고 있음에도 갓 요리한 파스타, 밥, 스프 냄새를 맡고 있자니 군침이 돈다. 사람들이 꼼지락 꼼지락 뭐를 하다가, 주방에 왔다갔다 하다가, 꾸물꾸물 대다가 한참이 되어서야 나간다. 나도 관리인 청년이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길래, 11시쯤 짐과 침대를 다 정리하고 가방을 방 안의 책상에 올려 놓은 후 건물을 나왔다. 여자 분 두 분은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나가고, 남자들 몇 명은 나와 같이 11시쯤 나왔는데, 아저씨 한 분은 계단을 올라 호스텔 밖으로 나오자 마자 요란하게 구토를 하신다. 이렇게 늦게 나가는 걸 보면 분명 직장에 가는 것 같지는 않고, 또 전혀 관광객들 같아 보이지도 않고, 이 사람들은 또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걸까. 


밖으로 나왔지만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어디로 가서 시간을 떼울까 하다가, 지도에서 본 슈퍼 마켓 아샨 시티(Ашан Сити, Auchan, 프랑스계 슈퍼마켓)로 향한다. 거리가 얼마정도인지 짐작할 수가 없어서 걱정도 조금 되었는데, 걷다보니 금방 도착한다. 가는 길은 날씨가 우중충하고 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아 춥고 으스스하다. 건물에 들어가니 먹을 것이 가득하고, 밝고, 춥지도 않다. 다만 물이 새는 신발을 양말도 없이 신고 있어서 발바닥은 항상 축축하고 찝찝하게 젖어 있다(나중에 보니 여행객들은 기본적으로 등산화를 신고 다니는데, 양말을 안 신어도 되겠다는 짧은 안목으로 샌들형 신발을 신고 왔다). 슈퍼마켓에서 텐트나 매트리스가 있나 살펴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식료품을 둘러보니 다시 중국에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매우 싸다. 음료수도 10루블(200원)부터 있고(물론 같은 용량이지만 100루블인 것도 있다), 빵도 가장 큰 것이 60-80루블(1200원), 난이 25루블, 작은 빵은 5-8루블(100원)로 떠돌이 여행자에게도 부담이 없다. 이렇게 보니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호스텔 값 300루블(약 6000원)이 어마어마하게 큰 것으로 느껴진다. 300루블이면 이틀, 사흘은 먹을 수 있는 돈이다. 그리하여 한참 동안 마트를 돌아다니며 값싼 놈들만 찾아 95루블(1800원)에 티백 20개, 커다란 난, 전부터 먹고 싶었던 쿠키, 카자흐스탄에서 알리의 엄마가 차려주시던 부블리카(Bublik), 500ml짜리 크바스(квас, kvass, 알코올이 미량 포함되어 있는 맥콜 비슷한 러시아 음료)를 구입한다. 그러고 나서 무료 화장실, 무료 와이파이를 즐기며 3층 영화관 옆에 앉아 남은 챡챡(чак чак)을 마저 먹는다.


2. 마트를 나와 북쪽의 텔레비전 타워(Ostankino Television Tower)를 기준 삼아 걷는다. 우중충한 모스크바이지만 그래도 먹을 것이 잔뜩 생긴 것이 행복하다. 아이들이 놀이기구를 타며 놀고 있고 엄마가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고 있는 작은 공원에서 군것질 거리를 조금 먹고, 이제 그만 돌아갈까 하다가, 여기까지 온 김에 좀 더 북쪽에 있는 박람회장(All-Russian Exhibition Center, Выставка достижений народного хозяйства, ВДНХ, VDNKh)에 가보기로 한다. 


숲을 통과해 널찍한 길로 들어서니, 아니, 이럴수가! 다양한 양식의 오래된 건물들과 우주왕복선이 들어서 있고, 화기애애한 가족들이 사이로 각종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기대도 안했던 곳에서 이런 멋진 느낌을 갖게 되니 오래전 숨겨놓은 돈을 우연히 찾은 기분이다. 고독함도 잊고 흥미로운 눈으로 사람들과, 건물과, 분수와, 무선 조종 자동차를 구경한다. 나오는 길에 보니 이미 늦은 오후인데도 박람회장으로 들어오는 인파가 가득이다. 동남쪽으로 쭉 걸어 나오니 우주박물관(Cosmonautics Museum, Музей космонавтики)이 보이는데, 우주선이 발사되는 모양의 탑도 멋지다. 얼마 전 모스크바에 왔던 대학 선배가 우주박물관에 꼭 가보라고 추천했으나 250루블이라는 거금(빵을 수십 개 살 수 있는 돈)을 입장료에 쓰는게 싫어서 갈 생각은 접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내부 구경이나 해보자라는 생각에 들어가 봤는데, 가만히 눈치를 보자니 사람들이 매표소에 가서 돈을 내지 않고 "스파시바(Спасибо, 고마워요)!"라며 표를 받아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세히 보니, 셋째주 일요일은 무료입장이라는 글귀가 있다. 오늘이 11일인데 벌써 셋째주라고? 달력을 보니 오늘이 세번째 일요일은 아니지만 셋째주에 있는 일요일이기는 하다. 좀 더 관찰을 하다가 용기를 내어 매표소에 가 물어보니, 무료입장이라며 표를 준다. 감격... 눈물... 감동 속에서 지구 최초의 우주인이 되어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심정으로 박물관 여기 저기를 돌아 보았다. 특히 우주 정거장이나 우주 비행선에서 우주인들이 찍은 사진과, 아폴로 11호의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우주복 진품이 인상 깊었고, 또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을 비롯한 수많은 우주인들의 사진을 보고는 홀로 감상에 빠진다. 사실 달 착륙이 조작이라던가 하는 음모론에 관심이 많았었는데, 실제 사진과 우주선과 우주복을 보고 나니 그런 의심이 사라지고, 지금까지도 앙숙인 미국과 러시아가 입을 맞춰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3. 돌아오는 길에는 음식 먹을 돈을 구걸하는 키 크고 젊은 남자 둘을 만난다. 그 중 한 명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데, 아까 산 빵, 쿠키와 부블리카를 주니, 설탕은 안 먹는다며 쿠키는 돌려준다. 구걸하는 사람들 중에는 음식을 받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가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음식을 받는 부류는 정말로 배가 고프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주머니를 뒤져 동전 40루블 정도를 꺼내 주니, 고맙다며 "굿 럭!"이라고 한다. 


체크아웃 시간이 지났는데 짐을 마음대로 두고 나와 약간 걱정하며 호스텔에 돌아 갔는데, 어제부터 항상 쌀쌀맞고 화난 표정이덧 관리인 청년이 체크아웃 할 때에는 악수까지 청하며 "굿 럭!"이라고 한다. 하하, 두 번이나 축복을 받았네. 이제 다시 배낭을 메고, 카우치서핑 호스트 다샤(Dasha)의 집을 향해 8km의 여정을 시작한다. 골목길을 지나, 건물들과 사람들을 지나, 철길을 건너서 공원(Sokolniki Park)으로 들어간다. 공원 한 편에 사람들과 똑같은 종의 커다란 털복숭이 개들이 수십 마리 있고, 메달과 트로피, 개사료가 잔뜩 보인다. 개 콘테스트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곳을 지나자 커다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울창한 숲이 나오고, 숲은 어둑어둑해진다. 지나가던 두 명의 남자 중 한 명이 뭐라고 말을 건다. 한참을 걸어 공원을 통과해 전시회장(Sokolniki Exhibition and Convention Centre)도 지나고, 생각보다 빠르게 공원을 빠져 나온다. 걷는다는 것,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죽여 나가는 것은 느리지만 확실한 효과가 있구나. 생각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아 가는 길에 있던, 찬송가가 흘러나오는 교회에 들른다. 주변 사람들을 따라 성호를 어설프게 긋고, 뜻은 알 수 없으나 너무 평화롭고 성스러운 아카펠라를 들으며 서 있는다. 


4. 어두워진 후에야 도착한 아파트. 다샤는 아직 집에 오지 않아서 한시간 정도를 벤치에 앉아서 기다린다. 아직 9월이지만 모스크바는 춥다. 양말도 없이 젖은 발로 다니면 더 춥다. 술에 취한 듯한 아저씨가 옆에 와서 앉더니 뭐라고 물어본다. "녜 즈나유(не знаю, 몰라요)"라고 외워둔 러시아어를 써먹는다. 핸드폰으로 오늘 찍은 사진도 보고,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조금 읽다 보니, 드디어 다샤가 도착한다. 나에게 늦을 거라고 카우치서핑에서 메시지를 보냈는데, 내가 확인을 못하고 전화를 걸자 일이 끝나자 마자 뛰어왔다고 한다. 다샤는 18살의 학생이고, 주말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밤 10시쯤 되자 다샤와 같이 사는 친구 나티샤와 리자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 나티샤는 바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말을 재미있게 잘하고 영어도 술술 잘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웃지 않아서 싫어. 항상 심각한 표정이야. 그래서 이런 농담도 있어. 모스크바에서 전철을 타면 모든 승객들이 정색하기 대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들 대회에서 1등을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내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자, "그런데 이거 정말이야! 다음에 전철을 타면 꼭 봐."라며 러시아 사람들의 무뚝뚝함에 불만을 표한다.


"러시아인이 하도 안 웃으니까, 지난번에 저스틴 비버가 모스크바에 와서 이런 얘기를 했어. '러시아인은 잘 미소 짓지 않지만, 웃을 때는 진심이 담겨있다'라고." 


러시아에 온 후, 사람들의 무뚝뚝함에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고 있었는데, 이렇게 러시아인에 대한 농담을 러시아인에게 듣고 있자니 아쉬웠던 감정이 녹아든다. 그밖에도 나티샤가 해주는 얘기는 빵빵 터진다.


"지금 일하는 바에 60살 먹은 스위스 아저씨가 6일째 매일 와서 아메리카노를 시켜먹는데, 자기가 돈이 얼마 있다고 자랑을 하더니, 자기랑 결혼을 하면 뭘 사주고 어디에 집을 사고 하겠다는거야... 진짜 미칠 것 같아."


이렇게 나티샤와의 대화에서 웃음이 터지는 동안, 조그맣고 하얀 인형처럼 생긴 리자는 말없이 조용히 미소만 짓다가, 쓰레기 봉지를 밟아 넘어진다던가 하며 얼빵한 모습을 보여줘서 아주 웃겼다. 정말 재미있는 친구들이다. 차도 한 잔 대접 받고, 이것 저것 먹을 것도 얻어먹어서 나도 쿠키를 꺼내 나눠 먹는다. 


나티샤가 영어를 잘하고 얘기를 재미있게 해서 대화의 중심이 되자, 정작 나를 초대한 다샤는 소외가 되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카우치서핑으로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집으로 초대한 것은 처음이라는데, 친구들(나티샤와 리자)에게 시험삼아 한 번 초대해 보자고 설득해 준 은인은 다샤이다. 새벽 1-2시까지 얘기하다가 펌프로 에어 매트리스에 공기를 채워 넣어 잠자리를 만든 후 누웠는데, 잠이 잘 안온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매트리스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신경쓰이고, 옆에 있는 침대에서 자고 있는 다샤가 잠 못들고 뒤척거리는게 느껴져 서로 불편하게 밤을 새우는 기분이다.


아침에 갈 곳이 없어 시간을 떼우러 갔던 쇼핑몰. 


타타르스탄에서 선물 받은 챡챡을 꺼내 먹는다. 쇼핑몰은 따뜻하고, 와이파이나 화장실도 있고, 앉을 곳도 있어서 어느 나라에 가건 시간 떼우기는 최고다.


빵, 쿠키, 크바스, 부블리카 등 95루블(1800원) 어치 식량. 


따뜻한 커피나 차가 마시고 싶지만 커피 한잔에 100루블(약 2000원).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돈이지만 떠돌이 입장에서는 너무 비싸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9월이지만 날씨가 벌써 쌀쌀해 다들 두터운 복장을 하고 있다. 제대로 된 신발과 양말이 없어서 항상 축축하고 추운 기분이다.




박람회 장에 전시된 우주선








분수앞에 편한 자세로 앉아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 다정한 모습이 부러웠다.


박람회장에서는 이런 저런 행사와 전시가 있었다.


RC카로 경주를 하고 있는 선수들.


재미있게 구경하는 꼬마


통합러시아당(United Russia, Единая Россия)의 깃발을 꽂고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들. 러시아의 집권 여당이고 푸틴의 당이다.


박람회장을 빠져 나가는 길.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입장하고 있다.


박람회장 입구에서 동물 탈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박람회장을 나오자 우주박물관이 보인다.


많은 아이들과 가족이 박물관에 왔다. 오늘은 운이 좋게도 무료입장.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과 아폴로 11호에 탑승했던 마이클 콜린의 우주복. 미국 우주인의 우주복이 러시아에 기증되 전시되어 있는게 신기했다.


소비에트 연방 우주복


무중력 공간에서 장난스럽게 사진을 찍은 우주인들.




우주공간에서의 크리스마스


소비에트 연방 - 러시아의 역대 우주인들






긴긴 산책을 마치고 이제 숙소로 돌아간다. 


러시아 연방 깃발과 나란히 걸려있는 모스크바 깃발




통합러시아당(United Russia, Единая Россия)의 로고가 들어가 있는, 길에서 나눠주는 신문.



호스텔에서 짐을 챙겨 나와 다샤네 집으로 가는길. 철길을 건너 공원으로 향한다.


개 콘테스트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들 똑같이 생겼는데 어떻게 순위를 메기는지는 모르겠다.


똑같이 생긴 검정색 커다란 개가 수십 마리 돌아다니니 신기하긴 하다.




공원을 계속해서 걷는다.


트램이 지나간다.



다샤네 집 가는 길에 시간이 남아, 찬송가가 흘러 나오는 교회에 들어가 본다.


추워지는 가을 날씨. 길에서 사는 듯한 여자와 길을 가던 남자가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