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일주/러시아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밤의 광장과 카츄사 (여행 56일째)

2016년 9월 12일 월요일 오전 러시아 모스크바 다샤네 집


[등장인물] 

다샤: 카우치서핑 호스트. 18살 학생이고 주말에는 식당에서 일한다. 

나티샤: 다샤와 함께 사는 친구. 바에서 일하고 있고 말을 재미있게 잘한다. 

리자: 다샤와 함께 사는 친구. 조그맣고 하얀 도시 여자. 스타벅스에서 공부하는 걸 좋아한다.


1. 전날 밤, 거실에 있는 다샤의 침대 옆에 에어 매트리스 침대를 설치해 잠자리에 들었으나, 옆에 사람이 있어서인지 서로 신경쓰이고 불편해 새벽 늦게까지 잠이 들지 못한다. 다샤가 잠을 못자고 있는게 느껴지고, 그게 느껴지니까 나도 왠지 미안하고 민감해져 잠이 들지 않는다. 몸을 조금 움직이면 에어 매트리스에서 삐걱 삐걱 소리가 나서, 마음대로 뒤척이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누워 있는다. 오늘 아침에 학교에 간다고 얘기를 들어서,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샤, 나티샤, 리자 아무도 일어나지 않더니 결국 아무도 학교에 안 가는 분위기다. 나티샤만 10-11시 쯤 방에서 나와 화장실에 들어 갔다 나왔다 하며 준비를 하더니 인사도 없이 나간다. 어제 그렇게 재미있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던 나티샤가 이렇게 무심하게 가버리니 좀 섭섭하다.


한참 늦게 일어난 다샤와 리자가 둘이서 러시아어로 얘기를 하는 걸 옆에서 조용히 들으며 앉아 있는다. 다샤는 약간 덩치도 있고 터프한 느낌이 드는데 반해, 리자는 창백한 얼굴에 체격도 조그맣고 조용하고 여성스럽다. 까맣고 도시적인 옷을 맵시입게 입어 차도녀 느낌이 나면서도 드세 보이지 않고 병약한 모습이어서, 뭐랄까 같은 반에 있는 여자아이들의 동경이 될 것 같은 아이다. 


학교를 땡땡이 쳐서 여유로운, 늦은 아침이다. 하지만 18살 다샤의 방방 뛰는 마음은 이 단조로운 아침과 하루하루가 참을 수 없이 지루하다.


"나도 너처럼 다 내팽개치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 유럽을 가든, 아시아를 가든, 어디든 가는거야. 진짜로 가는거야. 못 갈 이유가 없잖아? 생각해봐, 나 다음주에는 인도네시아에 있을 수도 있어. 그리고 전화를 거는거야- 안녕 엄마! 나 자카르타야."


꿈 꾸듯이 말하던 다샤가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가져오더니, 표지 안쪽의 백지에 편지를 써 달라고 한다. 음... 내가 아시아 사람이라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고른건가? 한글로 편지를 써 주겠다니까 한글로 쓰고 영어로 번역도 해 달란다. 초대해 준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다샤도 자유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짧은 편지를 적는다.


다샤의 집에서 시작된 하루. 거실 식탁에서 아가씨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다. 아가씨들이 뭘 먹거나 마시고 접시와 컵을 치우지 않고 내버려 둔게 많아서 어린 딸들을 홀로 키우는 아버지마냥 설거지도 해준다.


다샤네 집 창 밖으로 보이는 동네 풍경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편지를 적어 준다.


2016년 9월 12일 월요일 오후 러시아 모스크바


[등장인물]

파리다(Farida): 모스크바의 두 번째 카우치서핑 호스트.


2. 오후 1시쯤 되어 다샤, 리자와 함께 다샤의 집을 나와 전철역으로 향한다. 모스크바에 등록되어 있는 수많은 카우치서핑 호스트. 그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거나 거절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다샤도 친구들과 논의를 거쳐 하룻밤만 승락해 주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다른 호스트 파리다의 집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파리다가 학교에 있을 거라고 해서, 뚱뚱한 파란색 가방을 메고, 유니버시티(University, Университет) 전철역으로 향한다. 너무 멀어서 걸을 수는 없고 50루블을 내고 전철을 타야 했다. 전철역에서 나와 파리다를 기다린다. 와이파이도 없고, 문자메시지(SMS)는 전송 실패가 되는 경우가 많아서 전화를 건다. 현지폰이 아니고 로밍폰이라 전화비가 부담되어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를 거는데, 파리다가 유니버시티 역이 아니란다! 알고보니 수업이 일찍 끝나서, 내가 있던 곳으로 마중을 나오며 메시지를 보냈는데, 나는 다샤의 집에서 나오며 와이파이가 끊겨 그 메시지를 못 받은 것이다. 이렇게 엇갈려서 서로가 서로를 찾아 반대쪽으로 갔다가, 다시 모스크바의 중심부 아르바트스카야(Arbatskaya) 역에서 만나기로 한다.


파란 가방을 알아보고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드는 파리다. 첫인상부터 긍정적이고 넘치는 에너지가 느껴져서, 나도 덩달아 에너지 레벨이 올라가고 자연스럽게 말이 많아진다. 파리다네 집이 있는 곳은 미티노(Mitino, Митино)역 근처로 모스크바 중심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는 가야하는 끝자락이다. 서울에서 의정부나 일산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 한참 동안 전철을 타고 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파리다는 스포츠 관련 의료에 관심이 있는 의사이고, 이제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운동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배드민턴은 프로급이라고 한다. 러시아 연방의 다게스탄 공화국(The Republic of Dagestan, Респу́блика Дагеста́н)에서 온 레즈긴인(Lezgins)이다. 레즈긴인은 러시아에 약 50만명 아제르바이잔에 약 20만명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민족이다. 파리다의 고향 마을은 아제르바이잔 국경과 가까워서, 걸어서 국경을 넘어가 본 적이 있다고 한다.


3. 전철에서 내린 후에 파리다의 집으로 걸어간다. 조용하지만 높은 아파트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는 동네다. 같은 방향으로 걷던 꼬마 하나가 나와 파리다가 영어로 대화하는 걸 듣더니 하! 웃으며 뭐라고 말을 한다. 파리다에게 물어보니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어를 해야지 왜 영어를 하는거야"라고 했단다. 파리다는 당돌한 꼬마에게 약간 화가 나서, 뭐라고 러시아어로 대답한다. 그리고 나에게 푸념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렇게 꽉 막혀있는 면이 있어. 어린 아이도 저렇게 폐쇄적인데, 모두가 저런 식이면 누가 러시아에 오려고 하겠어? 물론 러시아어도 중요하지만 영어는 국제적인 언어여서 다른 나라 사람과 소통할 때 필요하잖아."


파리다는 채식인(vegetarian)이어서 오랜만에 맘 편히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었다. 감자, 양파, 이름 모를 녹색 채소를 볶은 요리와 오이, 토마토, 오렌지, 바나나를 잔뜩 먹는다. 또 향기로운 차까지 대접받으니 참 좋다. 행복하다.


4. 저녁에는 다시 전철을 한참 타고 모스크바 중심부에 있는, 강변의 공원으로 간다. 오크트야브르스카야(Oktyabrskaya, Октябрьская)역에서 내렸던 것 같다. 공원을 가로질러 강변으로 나가니 달리기 하는 사람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등 각종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파리다가 길에서 땅콩을 한 봉투 사더니 나눠준다. 맛있길래 냠냠 집어 먹으니까 파리다가 좋아한다. 


"맛있지? 그렇게 내숭 안 떨고 잘 먹는 사람이 좋아." 


사실은 여행하면서 배고플 때가 많으니까, 오히려 먹을 때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된다. 한국에서 먹을 것이 풍족할 때에는 음식에 대한 집착도 없고 눈치를 볼 것도 없었다(누가 밥 한 숫가락 더 먹는다고, 밑반찬 하나 더 집어 먹는다고 눈치를 주겠는가 -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먹다 말고 버려둔 음식 접시들이 한가득이다).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친구네 집 밥을 얻어 먹을 일이 생겨도, 그걸 부담 지우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우리 부모님이나 그 윗 세대에서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여행자가 되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 얼마 되지 않는 소득의 많은 부분을 식료품 구입에 쓰는 사람들 집에서 밥을 얻어 먹게 되니, 먹는 일이 눈치가 보이게 된다. 그래서 파리다가 해주는 말과 건네주는 땅콩이 더 고맙다.


강변을 따라 걷고, 다리를 건너 구세주 성당 쪽으로 간다. 가는 길에 파리다가 가져온 카메라로 사진을 많이 찍는다. 나도 핸드폰 카메라로 아름다운 모스크바의 야경을 담아보려 하지만 빛이 적어 잘 나오지 않는다. 파리다가 계속 사진 모델을 시켜서, 힘빠진 아저씨가 맥없이 웃는 모양으로 사진을 몇 장 찍는다.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구세주 성당을 지나고, 얼마전 들어가지 못했던 붉은 광장을 지나, 성 바실리 성당으로 간다. 파리다가 하도 모델을 시키길래, 이번에는 내가 찍어주겠다고 카메라를 받아 들이밀자, 다양하고 재미있는 표정을 만들어 내는 파리다. 사진 찍히는 법도 한 수 배운다. 붉은 광장의 건물들에는 작은 전구들이 건물 윤곽을 장식하고 있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난다. 파리다는 붉은 광장에 오면 미소짓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이곳에 오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


파리다는 멕시코로 여행을 가서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는데, 멕시코로 가는 비행기가 쿠바에 잠시 경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제한된 구역을 빠져 나왔고,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서 예정에 없이 쿠바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택시 기사에게 소개를 받아 100달러를 주고 숙박할 곳을 찾았다는데, 무지 큰 돈이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게 짧은 시간 엉겹결에 방문하게 된 쿠바는 파리다의 마음 속에 아직도 꿈만 같았던 곳으로 남아 있다. 남자들은 모두들 잘생기고 여자들은 너무나 예쁜데, 까무잡잡한 피붓빛이 보통의 갈색이나 구릿빛과는 다른 초콜렛빛이었단다. 초콜렛빛 피부의 잘생긴 남자들이 백인인 파리다를 유럽에서 왔다고 생각해 "마드무아젤!(아가씨)", "마돈나(my lady)", "뷰티풀!"을 외치며 따라오는 것이다. 처음엔 좋았는데 하도 남자들이 끈질기게 따라오니까 "I am married(나 결혼 했어)!"라고 말을 했단다. 그랬더니 따라오던 잘생긴 남자가 씨익 웃고는 손가락을 흔들며, "노- 프로블레모(no problemo, 상관없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하 얘기만 들어도 참으로 재미있는 동네다.


(카츄사 음악 듣기)


붉은 광장과 성 바실리 성당 구경을 마치고 전철 역으로 가는 길, 주황색 가로등 빛이 이미 어두워져 행인이 뜸한 거리를 비춘다. 한편에 중년의 남자가 아코디언으로 카츄사(Катюша)를 연주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에서도 카우치서핑 호스트 알리와 함께 길에서 들었던 곡이다. 아코디언의 애절한 멜로디를 따라 노래하는 콧수염의 남자 옆에는 할머니 한 분이 음악을 따라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파리다가 "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야!"라고 말하며 다가간다. 주변에서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열정적으로 연주하며 노래하는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할머니. 조그맣고 주름진 할머니의 웃는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평화와 사랑과 진리가 담겨있는 듯하다. 파리다가 바닥의 모자에 동전을 몇 개 집어넣고, 옆에 서서 노래를 따라 부른다. 나도 옆에 서서 그 짧지만 영원한 행복의 순간에 잠시동안 동참한다.


5. 밤의 산책을 마치고 파리다의 집으로 다시 돌아와 파리다의 동거인들을 만난다. 야샤는 집주인의 아들인데 실제 나이보다 15년은 젊어 보인다. 이미 20년 동안 인도와 아시아를 여행했고, 요가와 명상을 가르친다. 역시 채식을 하고(파리다의 동거인들은 모두 채식인이다), 1년 동안 인도에서 사두(sadhu, 수도승)처럼 돈 없이 돌아다니다가, 싱가포르에서 웹디자인을 배워서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는 15년 동안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 등을 쉽게 여행 다녔다고 한다. 내가 중국과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로 왔다고 하니, 자기도 인도에 갈때, 카자흐스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육로로 인도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이야기를 해준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있었던 당시여서 러시아인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하는게 불가능 했었단다. 지금은 회사 업무를 자동화 시키는 관리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고, 비트코인에도 관심이 많아서 관련된 이야기를 해준다.


또 다른 동거인인 디나는 아주 예쁘고 키가 작은 러시아 여자아이다. 파리다랑 얘기할 때는 완전 말이 많고, 감정이 잘 드러난다. 디나도 역시 채식인인데, 누드 모델로 일을 할 때도 있고, 그림을 그리거나, 리복(Reebok)에서 일하며 스포츠 잡지에 글을 쓰기도 한단다. 아주 흥미로운 사람들이다.


밤 늦게까지 이야기 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다가 새벽 2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든다. 파리다의 방으로 갔는데, 파리다가 자기 침대를 나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바닥에서 자겠다고 한다. 설거지와 요리를 도맡아 하는 모습, 이렇게 잠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파리다의 겸손한 성품을 볼 수 있다. 물론 내 입장에서도 주인을 밀어내고 침대에서 잘 수는 없는 지라, 서로 침대에서 안 자겠다고 옥신각신 하다가, 둘 다 바닥의 한 쪽과 다른 쪽 구석에 자리를 깔고, 침대는 비워둔채 잠에 든다.


파리다를 만나서 파리다의 동네로 왔다. 집에 가기전에 슈퍼마켓에서 식재료를 조금 산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본 적이 없는데 러시아엔 벌써 무인 계산대가 들어서 있다. 이렇게 우리는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인가 아니면 기계에게 직업을 빼앗기는 것인가.


파리다가 대접해준 간단한 채식 요리


파리다 집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다시 모스크바 중심부로 나왔다. 이미 해가 떨어지고 있다.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Monument to the heroes of the film Officers (Памятник героям фильм­а Офицеры)


강변에 정박되어 있는 대형 선박의 객실에서 나오는 불빛이 아름답다.


정면으로 들어와 다시 보게 된 성 바실리 성당


파리다가 먹고싶어 하는 케이크를 사준다. 자기가 사겠다고 했으나 너무 얻어 먹기만 하는게 미안하고 고마워서.


파리다가 야식으로 요리해준 음식. 가지를 얇게 썰고 마늘에 볶아서 무언가를 둘러 쌌던 것 같은데... 구성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입에서 사르르 녹는 무지 맛있는 음식이었다.



아래는 파리다의 카메라에 담긴 사진들. 내가 찍은 폰카 사진들과는 질이 다르다.




내가 배에서 나오는 불빛이 멋있다고 폰카로 찍고 있으니까 화질이 더 좋은 카메라에 담아주는 파리다.



모스크바 강과 구세주 성당




이번에도, 아파트 건물에서 나오는 따뜻한 불빛을 폰카로 구질구질하게 찍고 있자, 파리다가 카메라에 담아 주었다.



파리다가 잡아낸 멋진 구도. 파리다는 아마추어 사진가여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면 금새 백여개의 '좋아요'가 달린다.



붉은 광장의 건물들


파리다는 붉은 광장에 오면 미소짓는 사람들이 많아 좋다고 한다.



성 바실리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