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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러시아

러시아 모스크바 - 우크라이나 키예프 행 버스 (여행 57일째)

2016년 9월 13일 화요일 러시아 모스크바


[등장인물] 

파리다(Farida): 모스크바의 두 번째 카우치서핑 집주인


1. 어제 새벽 2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오늘 아침 6시에 일어난다. 나는 여행을 다니고 남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정신적인 긴장 때문에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게 일상이 되었지만, 파리다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이렇게 보내는지... 정말 에너지와 삶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 대단하다. 어젯밤 한참 동안 삶던 옥수수와 어제 파리다에게 사주었던 케이크를 아침으로 먹고, 타이밍을 잘 계산해 화장실에서 똥도 싼다. 집주인보다 빨리 일어나면 먼저 싸고 씻으면 되지만, 이렇게 집주인이 부지런한 경우에는 타이밍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첫째, 집주인이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타이밍에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 있으면 민폐이므로, 집주인이 화장실 사용을 마쳤다고 판단이 서면 그 때 사용한다. 둘째, 오늘처럼 집주인이 집에서 나갈 경우, 나도 같이 집에서 나가야 하므로, 집에서 나가는 타이밍에 화장실에서 꼼지락 거리다가 집주인의 일정을 지체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는게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오늘 같이 집주인이 부지런한 경우는 좀 무리였다.


파리다와 함께 아파트 건물을 나서자 맑고 파란 하늘이 보이지만 바람이 조금 분다. 나는 오늘 오후에 우크라이나 키예프(Kiev)로 가는 버스를 탈 예정이고 파리다는 아침부터 학교에 간다. 파리다가 오전에 어디에 갈 예정이냐고 묻기에 별 계획이 없다고 하자, 짜리즈노(Tsaritsyno, Царицыно)에 있는 예카테리나 여름 궁전을 추천한다. 얼마전 우연히 무료입장일 때 가봤는데 너무 예뻤다고 한다. 아마 셋째 일요일, 내가 우주 박물관에 무료 입장했을 때 파리다는 그곳에 갔었던 것 같다. 전철에서 헤어지고, 파리다가 추천해 준 곳으로 가기 위해 짜리즈노 역(Metro Tsaritsyno, Метро Царицыно)에서 내린다. 


2. 파리다 집에서 나올 땐 맑더니 전철 역에서 계단을 타고 밖으로 올라오니 춥고 하늘은 우중충하다. 밖으로 나오자 마자 길에 누워 있는 노숙인이 보인다. 추울 것 같다. 나 역시 추위에 떨며 공원을 돌아다닌다. 9월의 러시아는 춥다. 따뜻한 옷과 신발이 없으면 더 춥다. 공원에는 러시아 사람보다 중국 사람이 더 많다. 단체 관광객들이다. 다리를 지나 궁전(Grand Palace, Большой дворец)에 도착하니 중국 아줌마들이 한국 아줌마들처럼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정말 우중충한 날씨였다) 사진을 찍고 계신다. 우울한 회색빛 하늘 때문에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궁전에서 더 뒷쪽으로 들어가니 숲이 나온다. 으슬으슬하고,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숲. 커다랗게 자란 나무들이 오래된 숲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쭉쭉 뻗어 있고, 시간을 죽여야 하는 여행자는 바람 피할 곳을 찾아 숲길을 헤맨다. 박물관 입장 시간인 오전 11시가 되어, 궁전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인 듯한 유리건물을 통해 지하 매표소로 내려간다. 혹시나 오늘도 무료이지는 않을까 살펴보지만, 사람들이 350루블씩 내는 걸 보고는, 화장실을 사용하고 기념품 가게 구경만 하고 다시 나온다. 추위 속, 우중충한 길을 걸어 전철역을 하나 지나 대형 마트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와이파이, 화장실, 앉을 곳이 있는 커다란 쇼핑몰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런 곳은 없었고, 큼직한 가게를 하나 찾았다. 값싼 상품만 골라서, 빵 큰 것 두개, 1.5리터짜리 향긋한 배맛 음료, 초콜렛 한 봉지와 커다란 부블리카, 쿠키를 150루블(약 2800원)에 산다. 배낭에 먹을 것들을 담으니 좀 무겁지만 이제 굶을 걱정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맨 빵과 과자같은 것만 먹다 보니, 파리다가 해주던 맛있는 음식이 그리워진다.


3. 다시 전철을 타고 버스 터미널을 찾아간다. 모스크바에 와서 전철을 총 8번, 400루블어치 탔는데 3일 무제한 승차표가 400루블이니 무제한 표를 사도 될 뻔했다. 한 번 타는데 50루블(약 920원)이니 한국에서보다는 싸지만 러시아 물가(빵값)에 비하면 꽤 큰 금액이다. 버스 터미널은 메트로 3호선(파란선) 동쪽 마지막 역인 슈첼코브스카야(Shchelkovskaya, Щёлковская) 역 근처에 있다. 버스 티켓은 에코라인(www.ecolines.net)을 통해 25유로에 구입했는데, 티켓에 나와 있는 주소대로 찾아왔지만 아무래도 불안하다. 매표소에 있는 뚱뚱한 러시아 아주머니에게 프린트 된 표를 보여주자 "슈토?(Что?, What?, 뭐?)"라며 짜증난다는 눈빛으로 쳐다본다. 더 이상의 의사소통을 시도하려는 마음이 수그러든다. 이 쌀쌀맞음에 마음이 상하고, 미운 마음도 들지만 러시아어를 못 하는 내 잘못이기도 하고, 러시아 사람들이 차가운 걸 내가 어찌하겠나. 이 터미널이 맞는 듯 하니 어떻게든 버스를 타고 우크라이나로 가겠지.


버스 시간표에 키예프(Kiev)라고 써있는 곳이 없어서 약간 당황하며, 매표소에 물어보는 것도 실패하고, 헤맸지만, 알고 보니 목적지가 오데사(Odessa, Одеса)이고 키예프는 중간에 서는 곳이라 그랬던 것이었다. 버스에 탄 후, 티켓에 적힌 내 자리로 갔는데, 금발의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자리에 가방을 두고 그 옆자리에 앉아 계신다. 그래서 티켓을 보여 주었더니, 뭐라고 말을 하지만 나는 러시아어를 못 알아 들으니 그냥 멍하니 서 있는다. 티켓을 보여주며 가방을 치워 달라고 손짓을 하니 신경질을 내면서 버스 기사에게 뭐라고 말을 하고, 버스 기사는 아주머니에게 뭐라고 대답을 한다. 나는 무슨 대화가 오가는 지 모른 채로 쟁취한 자리에 앉는다. 금발 아줌마는 경멸의 눈빛을 보내더니 다른 자리로 짐을 갖고 가 버리고, 덕분에 나는 두 자리를 넓게 쓰며 가게 되었다.


2016년 9월 14일 수요일 새벽 우크라이나 행 버스


4. 버스에 와이파이가 있어서 잠깐 썼는데, 그 이후로는 잘 안되고, 무료 음료(차와 커피)도 있는 듯 했으나 마시지는 못했고, 화장실도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말 한 마디 할 필요 없이 잘 앉아서 가다가 새벽 1시 반쯤 부터 러시아 국경을 통과한다. 짐 검사는 없었지만 국경에서 꽤나 오래 기다린다. 한국 여권에는 출국 도장을 찍기 전에 어디론가 나가더니 돌아와서 도장을 찍어준다.


우크라이나에 입국할 때에는 승객들 여권을 다 걷어 가더니, 나중에 나만 불러내서 영어로 몇 가지를 물어본다. 그러더니 사무실로 데려가서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다. 새벽 3시쯤 되었던 것 같다. 오래된 사무실 건물 안에 붙어 있는 지도와, 우크라이나 국기와, 어떤 높은 사람의 사진 같은 것을 구경하며 앉아 기다린다. 분위기 상 여기서 입국 거부가 된다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초조하지는 않았지만 약간은 지루하고 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 나를 데려온 제복을 입은 키 큰 경찰이 "췻- 췻-" 소리를 내서 나를 부른다. 다행히 도장을 찍어 버스로 돌려 보내 준다. 버스에 올라 타며 보니, 다른 여자 한 명도 러시아인 혹은 우크라이나인이 아닌지 한참을 밖에서 경찰들과 얘기하며 기다린다. 시간을 보니 새벽 3시 반. 이제 다 끝난 것 같으면서도 버스가 속도를 줄이거나 멈출 때마다 또 내려야 하나 불안하다. 이미 도장을 받았는데도,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는 꿈을 꾸며 비몽사몽간에 새벽을 달린다. 친절한 버스 여승무원이 건네 주었던 종이는 입국서류가 아니라 버스 탈 때 제출했던 버스 티켓이었다. 버스가 더 천천히 달려서 더 천천히 키예프에 도착하기를 바라지만 아침 7시쯤 되자 도착한다.


우울했던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끝났고, 우크라이나에서의 첫 하루는 다음 포스팅에 계속...


짜리즈노 역에 도착.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하늘은 꿀꿀해졌고, 공기도 차갑다. 길에는 노숙인이 누워 있고(사진 왼쪽), 사람들은 할 일을 찾는듯이 도로를 서성인다.


비둘기도 추운지 몸을 웅크리고 서 있다.


짜리즈노 공원의 다리. 예쁘게 만들어 놓은 다리지만 우울한 하늘 아래에서는 그저 우울해 보일 뿐이다.


성당 입구의 성모와 아기 예수 모자이크 장식



예카테리나의 궁전. 날씨 때문인지 그저 우울해 보이는 건물이다.



잿빛 하늘 아래에서 비둘기들이 이리 저리 날아다닌다.


중국 아주머니들이 소녀들처럼 발랄하게 사진을 찍고 계신다.


중국 사람이 대부분이던 궁전 주변


궁전 뒷편의 숲 길로 들어오니 쭉쭉 뻗은 나무들이 있다. 유모차를 끌고 가던 아주머니 한 분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다람쥐를 올려다 본다.


호숫가를 거니는 연인


우울한 날씨를 압도하는 따뜻한 풍경


슈퍼에 가니 한국 라면이 보인다. 언젠가 러시아에서 도시락 라면이 인기가 많다고 들어본 적이 있는데, 정말인지 도시락 라면을 팔고 있다. 31루블이니 약 580원... 이거 한국에서 보다 싼 것 같은데? 그 밑의 선반에는 장라면도 있다.


사람들이 심각한 얼굴 만들기 대회를 하고 있다는 러시아 전철 안 풍경


화면에 키예프가 뜨지 않아 한참을 걱정했는데, 오데사행 버스가 키예프를 경유하는 것이었다.


떠날 때가 되니 다시 맑아지는 모스크바


구름이 걷히니 우울함도 사라진다.


빵을 뜯어 먹고 있으니 와서 구걸하는 새


새들이 빵쪼가리를 주워 먹으려 잔뜩 모여 들었다


이제 우크라이나로 가자


가는길 풍경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