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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불가리아

불가리아 헬프엑스: 알파카 빗질과 파란 털모자 (여행 69일째)

2016년 9월 25일 일요일 불가리아 다보빅


[등장인물]

기테: 헬프엑스 호스트. 50대 후반 여성. 플레밍과 부부.

플레밍: 헬프엑스 호스트. 50대 후반 남성. 기테와 부부.


1. 아침 7시 47분. 약간 냉기가 남아있는 캐러밴 안. 햇살과 개짖는 소리, 새소리, 닭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울리는 평화로운 시간이다. 어쩌면 러시아의 시골마을과도 비슷하지만 산책을 한 번 해본 결과, 이쪽 사람들이 훨씬 덜 심각하고, 덜 쑥스럽고, 더 친근한 것을 느낀다.


아침이 밝았다.캐러밴 내부는 그래도 따뜻하지만 밖으로 나오니 공기가 차다.


아늑하면서도 공간이 충분한 캐러밴 내부.


2. 아침에는 라마(알파카)털 카딩(carding, 소모梳毛, 빗질공정)을 한다. 기테는 뜨개질이 취미인데, 털실을 기우는 것 뿐만 아니라, 만드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영국이나 호주 등의 목장에서 양, 라마, 토끼 등의 털을 구입해서, 물에 담가 놓는 작업, 말리는 작업 등을 직접 한다. 그 후 짧은 털은 걸러내고 긴털을 가지런하게 하는 작업이 지금 하고 있는 카딩이다. 기테가 가지고 있는 고풍스러운 기계를 탁자에 고정한 후, 엉켜있는 털을 조금씩 기계에 넣으면서 손잡이를 돌린다.

카딩 머신(carding machine) = 소모기(梳毛機, 빗질기)

내가 기계를 돌리는 동안 기테는 파랗고 하얀 양털과 토끼털로 모자를 만든다. 그렇게 기계를 돌리고, 얘기를 나누면서 오전을 보낸다. 앞집의 조안나 할머니가 마당에서 키운 포도를 한 가득 담아 오셔서, 카딩 머신 돌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가신다. 

그동안 플레밍은 겨울이 오기 전 집에 설치할 난로를 찾으러 시내에 나가지만, 원하는 것을 못 찾고 돌아온다. 그러다가 오후 1시 정도부터 낮잠 자는 시간(시에스타, siesta)이 있다. 정말 느슨하고 여유있는 하루다. 부부가 낮잠을 자는 동안, 나는 구름 사이로 가끔씩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마당에 앉아 듀오링고(Duoling)로 공부도 하고, 플레밍이 빌려준 책(불가리아의 역사와 문화)도 보고, 신난 강아지처럼 마당을 뛰어다니기도 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 그렇게 쉬다가 오후 3시부터는 자리를 실내로 옮겨, 플레밍이 만들어준 카페라테를 마시며 오전에 하던 카딩을 마무리한다. 기테가 작업이 끝난 털뭉치를 저울에 올려 보더니, 총 160g을 카딩했다고 알려 준다. 


겨울을 대비해 준비해 놓은 장작. 어떻게 장작을 패야 나무가 잘 말라서 난로의 효율이 올라가는지 플레밍이 열정적으로 설명해 준다.


앞집 조안나 할머니 집에 놀러온 꼬마들.


뭔가 장난을 치고 있다. 나중에 보니 호박을 따서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기테는 그걸 보더니 화가 났다.


플레밍이 빌려준 불가리아의 역사와 문화 책. 수많은 민족이 먼 옛날부터 거쳐갔던 땅이어서 그만큼 다양하고 많은 유적과 유물이 있다.


3. 그 후에는 저녁 식사(파스타) 준비하는 것을 보조한다. 코울슬로(coleslaw) 샐러드를 만들 때, 양배추를 잘게 잘 썰었다고, 기테가 칭찬을 많이 해준다. 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탁자와 의자를 놓고, 야외에서 맛난 파스타를 양껏 먹는다. 그리고 나서 다같이(기테, 플레밍, 개 두마리, 나) 산책을 나선다. 

이 마을의 친근함은 전에 있던 러시아 타타르스탄의 시골 마을보다 한층 진하다. 불가리아, 그리고 나중에 다른 동유럽 몇몇 국가들에서도 본 문화인데, 이곳에서는 죽은 가족의 사진고인을 기리는 문구를 인쇄하고 코팅해서 집 대문 앞, 전봇대, 가로수 등 마을 곳곳에 붙여 놓는다. 기테는 마을의 집들을 지나며, '이 집은 얼마에 내놓은 집, 저 집 얼마에 내놓은 집' 이라며 부동산 매물 정보를 알려 준다. 마을에는 내놓은 집이 태반이고, 빈 집도 많다. 마을 중심지의 우체국이나 큰 상가였던 건물은 폐허가 되어 있다. 

산책 후에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플레밍과 기테가 나에게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핀잔을 준다. 러시아에서 헬프엑스를 할때, 올가보바는 일을 많이 한다고 좋아하고 고마워 했는데(링크: 러시아 헬프엑스), 이렇게 일을 많이 한다고 핀잔을 받으니 너무 감사하다. 플레밍과 기테는 나의 노동력이 필요한게 아니라, 그저 젊은 여행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 주고,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친구가 되어 주기 위해 호스트 해준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서는 1주일만 지내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일주일 뒤에 지낼 만한 곳도 알아 봐 준다.

4. 저녁에는 기테가 내 머리를 깨끗하게 삭발해 준다. 기테와 플레밍 둘 다 머리를 기르지 않고 바리깡으로 짧게 깎은 후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나 역시 두세달 동안 길러온 머리를 깨끗하게 정리할 기회 같아서 머리를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기테가 아침부터 하늘색과 파란색 털실로 짜던 모자를 선물 받는다. 이제 정말 일원이 된 기분이다. 기테가 내 머리를 보더니 티벳 몽크 같다는데, 보기 좋다. 헬프엑스(helpx)에 접속해 보니, 올가가 나에 대해 남겨 놓은 짧은 후기가 있다. 나도 그때를 생각하며 감사의 글을 남기고, 캐러밴으로 돌아와 드래곤 라자를 조금 읽다가 잠이 든다. 전날보다 따뜻한 밤이다.


파스타 만들기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산책


전에는 큰 슈퍼마켓 건물이었다는데 사람이 없어서 망하고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마을의 교회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