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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불가리아

불가리아 헬프엑스: 마로니에와 흑해 (여행 72일째)

2016년 9월 28일 수요일 불가리아 

다보빅 - 제너럴 토셰보 - 흑해 - 도브리치


[등장인물] 

기테: 헬프엑스 호스트. 덴마크 출신 50대 여성. 플레밍과 부부. 

플레밍: 헬프엑스 호스트. 덴마크 출신 50대 남성. 기테와 부부.


1. 아침에는 기테와 함께 약 7-8km 정도 떨어진 소도시(town)로 나간다. 인구 약 7000명의 작은 도시로, 우리말로 하면 '읍(邑)' 정도 되겠지만, 조그만 구멍가게 하나 있는 다보빅에 비하면 문명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도시의 이름은 제너럴 토셰보(General Toshevo), 즉 토셰보 장군이라고 하는데, 스테판 토셰브(Stefan Toshev)라는 1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불가리아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토셰보로 가는 길에는 커다란 밤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 길이 있다. 기테와 밤을 줍기로 한다. 이 밤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주웠던 밤처럼(링크참조: 우크라이나 키예프) 먹을 수 없는 밤이지만, 기테가 빨래를 할 때 밤을 갈아서 세제 대신에 쓸 수 있다고 한다. 먹지도 못할 밤이지만, 역시 인간의 유전자에는 채집본능이 새겨져 있는지, 밤을 줍는 재미가 있다. 이미 잔뜩 담았는데도, 줍고, 줍고, 또 줍고, "저기까지만, 저기까지만," 하면서 밤을 줍는다. 밤 껍데기에는 가시가 고슴도치처럼 빽빽히 솟아 있는게 아니라, 복어처럼 약간 듬성듬성 나있다.


이렇게 생겼다. 알고 보니 밤이 아니라 마로니에(horse chestnut) 열매라고 하는데, 독성이 있어 먹지 못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토셰보 마을에 도착한 후에는 벽을 노랗게 칠한 채소가게에서 장을 본다. 채소가게에서 어떤 불가리아 아주머니와 기테가 친구가 되었다. 기테는 불가리아어를 못하지만, 불가리아 아주머니가 영어를 더듬더듬 조금씩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불가리아 아줌마는 자신의 딸이 영어를 잘 한다며, 다음을 기약하고 서로 번호를 교환한다. 기테도 새로운 친구가 생겨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 사이 나는 집에서 가져온 유리병과, 동전을 챙겨서 우유를 사러 간다. 신기하게도 우유 자판기가 있는데, 종이팩이나 병에 나오는 게 아니고, 병을 갖다 대고 용량을 선택하면 자판기에서는 액체만 나오는 것이다. 위생상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자원을 절약하는 좋은 방법이다.


토셰보의 채소가게. 조그만 마을의 조그만 가게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토셰보 풍경.


쓰레기통 구역에는 주인없는 개들이 얼쩡거리고 있다.


아직 어려보이는 고양이도 있다.


2. 집에 돌아와 보니, 플레밍이 어떤 이유에선지 기테에게 약간 화가 나 있다. 기테가 오전부터 농담을 툭툭 많이 던졌는데, 그런 식으로 아무 생각없이 말하는 것과, 장을 보러 간 주된 이유가 커피를 사오는 것이었는데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밤을 줍는다던가) 본래 목적을 잊어버렸다는 것 등... 그래서 둘이 대화를 좀 하고 나서야 상황이 좀 정리된다.


기테가 싸준 , 토마토, 오이바나나와, 플레밍이 어디에선가 찾아 준 수영복 바지를 챙겨서 차를 타고 바닷가로 출발한다.  다보빅에서 동쪽에 있는 흑해(Black Sea)에 가기로 했는데, 기테는 오지 않고 플레밍과 나만 가기로 했다. 가는 길은 역시나 아름다운 가로수 길이다. 전봇대도, 전깃줄도, 신호등도, 가드레일도, 어떤 건물도 없이 파란 하늘 아래의 나무들 사이로 쭉 뻗은 길. 햇살은 따뜻하고, 별로 대화하고픈 생각도 없어서 눈이 스스륵 감기고 졸음이 온다. 풍력 발전소가 많이 보인다. 이 길을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나 도보로 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그만큼 길과 풍경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도착한 흑해의 해변은 두 개의 절벽 사이에 위치해 있어 물이 잔잔하고 바람이 적었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높은 절벽 사이의 조그만 해변'은 아니었다. 주변에는 동굴이 몇 개 있었는데, 묵을 곳이 없을 때 이런 곳에서 밤을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동굴 안은 쓰레기로 지저분하다. 바닷물은 매우 맑고 투명하다. 물이 새파랗고 파도가 치고 있는 방파제 바깥 쪽을 구경한 후, 물이 잔잔한 해변으로 돌아와 수건을 깔고 누워서 햇볕을 받는다. 그러다가 플레밍을 따라서 물 속으로 들어갔는데 물이 생각보다 훨씬 차갑다. 바람도 쌀쌀해서 몸을 덥히기 위해 물속에서 바둥바둥 몸을 움직여 본다. 물이 순간 따뜻했다가도, 갑자기 차가운 물이 흘러오며 수온이 바뀐다. 차가운 해수를 온몸으로 느끼며, 플레밍이 해주는 얼음 뚫고 수영하는 얘기, 사우나 얘기 등을 듣다가, 물에서 나와 한숨 고르며 따뜻한 태양 아래에 엎드려 몸을 말린다. 기분이 최고다. 그렇게 엎드려 잠깐 잠이 들었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플레밍은 일어나 앉아 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수건과 물통을 들고 차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기테가 싸준 비스킷과 야채를 먹으며 아름다운 가로수길을 달린다.


도브리치(Dobrich)에 있는 빵집에 잠깐 들른다. 도브리치는 인구가 약 9만명으로 다보빅, 제너럴 토셰보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다. 빵집에 있는 빵들이 모두 '멋져' 보인다. 하나씩 다 먹어보고픈 생각이 든다. 갑자기 도시에 정전이 와서 슈퍼마켓이 닫는 바람에 커피와 맥주는 못 사고 집으로 돌아온다. 다보빅에 있는 집까지 전기가 나가 있다. 같이 케이크를 먹다가, 전기가 돌아오고 나서 커피를 마시고, 햇살을 쬐고, 저녁으로는 빵과 각종 치즈, 버터를 먹는다. 설거지를 하고 마당으로 나와 앉아서, 해가 막 떨어지고 별들이 막 밝아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흑해를 향해 간다. 나무 사이로 좁은 길만 뚫려 있는 풍경이 좋다.


흑해의 한 해변가에 도착. 날씨가 추워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한 가족이 보인다.


우크라이나에 있을 때도 한번 봤던 흑해지만, 이렇게 해변가에 오니 느낌이 다르다.


방파제 바깥 쪽은 파도가 거칠다.



안쪽은 물이 잔잔하고 투명하다.


해변가에 엎드려 가만히 시간을 죽인다.



집으로 돌아왔다. 검정개가 '카일라'였는지 '펄'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