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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불가리아

불가리아 헬프엑스: 낱알 털기와 호수 (여행 78일째)

2016년 10월 4일 화요일 불가리아 롬치(Lomtsi)


[등장인물]

트레이시: 영국 출신 50대 여성. 헬프엑스(helpx) 호스트.

폴: 영국 출신 50대 남성. 트레이시의 남편.


1. 아침에 그레놀라(트레이시가 직접 만듦)를 먹고 옥수수 낱알을 턴다. 새들 사료로 쓰는 옥수수(maize)가 저장고에 잔뜩 쌓여 있는데, 말라서 낱알(kernel)이 옥수수대(cob)에 딱딱하게 붙어있다. 적당한 크기의 옥수수를 골라서 낱알 터는 기계에 넣고 기계에 달린 핸들을 손으로 열심히 돌린다. 그러면 낱알은 후두둑 밑으로 떨어지고, 빈 옥수수대(corncob)만 기계 위로 불쑥 나온다. 그러면 옥수수대는 따로 분류해 두고(토끼한테 주거나 태운다고 함), 다시 낱알이 달린 옥수수를 넣고 기계를 돌린다. 손이 거칠고 강해지는 기분이다. 


점심으로는 트레이시가 구워서 오븐에 넣어둔 을 꺼내, 먹을 만큼 잘라서 을 달라 먹는다. 꿀은 이웃집(불가리아 사람)에서 줬다는데, 평소에 보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아니고 딱딱하고 하얗고 불투명한 꿀이다. 빵에 발라 먹으니 달콤하고 맛있다. 트레이시가 냉장고에 있는 버터, 잼, 치즈 등 아무거나 꺼내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남의 집 냉장고를 뒤진다는게 꽤나 민망한 일이어서 항상 식탁위에 있는 꿀만 발라 먹는다.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너무 아름답다. 매일 아침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트레이시와 폴이 부럽다.


엉덩이가 간지러운 거위


풍경


2. 옥수수낱알을 털 때, 낱알이 기계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는 한다. 겁이 많은 오리와 기러기는 옥수수낱알을 쳐다만 보고, 내 눈치를 보느라 꽥꽥 뒤뚱뒤뚱 서성거리기만 하는데, 깡이 있는 수탉은 내 눈치를 보면서도 얼쩡거리며 낱알 흘린걸 주워먹고 후다닥 도망갔다가 다시 다가와 주워 먹는다. 우리도 이와 같아서... 깡다구 있는 사람이 더 차지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낱알을 많이 주워 먹든 쳐다만 보고 있든, 결국 굶어 죽는 새는 없고, 도살을 면하는 새도 없다. 


옥수수 낱알터는 기계와 떨어진 낱알을 노리는 수탉


저장고에 남아있는 옥수수. 사람은 못먹는 거라고 한다.


빵을 큼직하게 썰어 꿀을 발라 냠냠.



3. 자전거를 끌고 라스꼴까(разходка, 나들이라는 뜻. 불가리아 단어를 딱 두개 기억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다. 나머지 하나는 즈라스티 здрасти, 안녕)를 하러 나간다. 차도 사람도 없는 들판에서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지나가고 있자니, 윈도우XP 배경화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사진을 찍어도 찍어도 다시 찍고 싶어지는, 또 하나의 꿈에 그리던 풍경이다(중국 칭하이에서 느낀것 처럼). 다시 히치하이킹과 도보여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며, 야영을 해도 좋을만한 위치를 세심하게 살펴보게 된다. 호수 주변에서 소떼를 돌보고 있는 목동을 지나쳐서 노란 들판과 언덕으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저 멀리 보이더니, 오토바이를 타고 순식간에 다가온다. 그러다가 언덕에서 오토바이가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고 걸려 넘어지자 한참을 낑낑거리다가 다시 바로 세워 내쪽으로 온다. 수염을 기르고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다. 손짓을 하며 뭐라뭐라 말하길래 "라스꼴까"라고 말하니까, "라스꼴까!"하고 알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쭉 내려간다. 괜히 내가 사유지에 들어와서 문제가 된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트레이시가 호수에 가보라고 해서 온거니 괜찮겠지(나중에 들어보니 저 아저씨는 호수 보안관이고 사람들이 낚시를 못하게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다. 나에게도 아마 낚시를 한거 아니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호수 옆의 길도 없는 갈대 언덕을 자전거 바퀴로 밀어 붙이며 페달을 밟다가, 내려서 자전거를 끌고 걷다가 하며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고자 했지만, 가려는 방향이 진흙탕과 숲으로 가로막혀 있어 포기하고 다시 완만한 언덕을 올라, 소떼를 돌보던 목동이 있던 쪽으로 되돌아 온다. 멋진 풍경과 길에 고무되어 '좋아, 이렇게 시골길을 따라 옆 마을까지 갈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며 국도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도로를 달린지 얼마 되지 않아 오르막과, 옆을 쌩쌩 지나치는 트럭과 승용차들, 주민들의 관심 넘치는 시선을 못 이겨 금방 돌아온다.





호숫가의 소떼





보안관 아저씨가 끌고 온 오토바이





정말 아름다운 언덕이다.




언덕 너머에는 다른 소떼가 있었다.





도로 주변에 보이는 건물.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


멋있다. 이것도 오스만 양식인가?





동네로 돌아왔다.


5. 저녁에는 말레이시아 요리의 변형인 밥+소스+호두+고기요리와 아주아주 달콤한 설탕범벅 푸딩에 하얗고 달콤한 연유를 부어 먹는다. 푸딩은 퀸스(quince, 마르멜루. 모과 비슷한 과일)와 바삭바삭한 설탕 덩어리를 섞어서 만든다. 저녁을 먹으며 한국에 관한 몇가지 질문에 대답해주고, 나처럼 이곳에 머물던 카당이라는 대만 출신 여행자이자 헬퍼(helper) 얘기를 듣는다. 트레이시가 어떻게 이 친구를 받아주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서(헬퍼가 필요한건 아니었는데, 카당이 다른 사람에게 보낸 요청 내역을 보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받아줬다고 한다), 화장실 변기에 올라가 쪼그려 앉아서 변기를 부순 이야기와 10일간 지낸 이야기를 듣는다. 폴과 트레이시가 상당히 맘에 들어했는지, 아직도 페이스북으로 카당이 여행하는 내용을 전해듣고 있다는데 지금은 알래스카에 있다가 캐나다로 내려갔다고 한다.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누가 트레일러까지 딸린 자전거를 줘서 그걸 타고 다니고 있다고... 대만에 있을 때는 절에 들어가서 명상을 배웠던 모양인데, 그 덕분인지 아무 걱정이나 계획없이 여행해도 어떻게든 일이 풀리는, 우주의 도움을 받는 타입의 여행자였던 것이다(이런 종류의 여행은 <먼지의 여행>이라는 책을 보며 동경해 오고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들과 인물들을 알게 되는게 참 신비롭다. 나의 길도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4. 자전거 여행이 무척 성가실 수 있다는 생각에 보행자용 도로를 찾아보다가 E-paths(European long-distance paths)라는 유럽의 수많은 걷기 도로를 발견했다. (위키피디아 링크) "이거다!" 하는 생각이 번쩍 든다. 이거라면 여행경비 걱정 없이, 캠핑도 용이할 것, 넘치는 시간을 숭고하게, 내가 좋아하는 '걷기'라는 방법으로 보낼 수 있다. 하지만 걸어서 부다페스트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아직 텐트도 없고 매트도 없기에 어디서부터 이 걷기를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씩 힌트가 주어지니 참 좋다.


E-paths (출처: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