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일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라나도스 호스텔 → 베로니카 집
[1] 베로니카는 프리즈비 모임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고, 에이비엔비로 이 집에 머무르는 독일인(교환학생)은 밥을 지어 먹더니, 뭔가 또 요리하고 있다. 베로니카의 책장에 꽂혀있는 론리플래닛 콜롬비아와 중앙아메리카를 탐욕스럽게 읽다가 일기를 쓴다.
[2] 아침. 호스텔 조식으로 나온 빵과 잼, 초콜릿 시럽, 커피, 주스, 버터 등을 신나게 먹는다. 초코롤 두 개와 빵 8개 정도를 먹은 듯하다. 참 행복했음. 아침으로 이렇게 빵, 잼, 시럽, 버터만 주면 호텔 뷔페 이런 것 필요 없어요.
페이스북 메신저를 보니 베로니카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다! 이미 어제 나를 초대했던 것이다. 베로니카한테서는 연락이 없고, 세비와는 약속이 취소되어, 아르헨티나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호스텔이 마음에 들어서 오래 머무르려던 계획은 자동으로 취소되고, 베로니카에게 오늘 가겠다고 메시지를 보낸다.
체크아웃을 하려는데 페소가 없으니 어떡하나? 환전소를 물어보니, 호스텔에서 환전을 해준단다. 환율은 달러당 15.5페소이고, 콜롬비아에서 온 카운터 직원 말로는 좋은 환율이란다. 인터넷에서 확인한 환율보다 좋아서 옳다구나 하고 수락. 갖고 있던 108달러를 환전하고 숙박비를 낸다.
환전도 쉽게 잘한 듯 하고, 날씨도 맑다. 배낭을 메고 유럽풍 건물들 사이로, 어제와는 달리 활기찬 거리를 걷는다. 근처의 성당에 들어갔는데 햇볕을 정통으로 받은 보랏빛 스테인드글라스가 황홀하게 아름답다.
그러다가 플로리다 거리에 들어섰는데, 공식 환율이 적혀있는 환전소는 안 보이고, 거리에 서서 “깜비오!”를 외치는 환전꾼들만 무지 많다. 그 중 어떤 사람이 "16.45"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것 같다. 이게 시세라면 달러당 1페소, 거의 100페소를 손해 본 셈이다. 거의 만원에 가까운 돈! 이게 또 하루 종일 찝찝한 거다. 그걸 만회해야 된다는 생각에 뭘 사기도 아깝고. 하하 좀생이! 돈을 안 쓰는 것의 숭고한 의미(환경에 주는 피해를 줄이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벗어나겠다)는 이미 없고, 쓰고 싶은데 더 쓰거나 돈을 얼마밖에 안 썼다고 으스대기 위해 이러고 있는 것 아니냐! 그래서 내일 세비를 만나도 얻어먹을 생각이나 하고 있고. 통장에 500만원이나 있고, 현금이 100만원 있는 놈이, “아, 나 돈 아껴야 돼서 비싼 건 못 먹어,” 이런 말이나 할 생각하고 있고. 이런 내적 갈등을 겪으며, 멋진 날씨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걷는다.
5월 광장, 커다란 성당, 커다랗고 넓은 도로와 한없이 아름다운 골목길 저 너머 풍경. 햇살 아래를 걷는 사람들. 트럭에서 나눠주는 공짜 음료수. 오랫동안 배낭끈에 눌려 쓰라리는 어깨.
걷다보니 어느새 도착한 온세역과 볼리비아 대사관. 비자 신청에 관한 블로그 정보들이 다들 오래된 정보여서(2012~2016년 글), 106호가 아닌 101호였고, 여권 사본도 필요 없었다. 여권, 신청서, 사진만 있으면 OK였다. 암환전에 관한 얘기도, 환율 차이에 관한 것도 모두 다 옛날 얘기였다.
광장에서 파는 20페소 핫도그와 10페소 과자가 왠지 싸 보이지만, 정신 차리고 계산해 보면 아니다. 속지 말자. 아, 그리운 우크라이나여.
그렇게 걷고 걸어 좀 한산한 거리를 지나다가, 운이 좋게 대성당이 있는 곳에 왔다. 수위 아저씨가 닫혀있던 대문을 열기에 들어갔다. 앉아서 쉬고 있는데, 기타 치는 아저씨와 인솔하는 선생님을 따라 유니폼을 입은 꼬마 아이들 수 십 명이 노래하며 대성당에 들어온다. 아, 정말 아름다운 순간이었는데. 교회 내부에서는 빛이 약하면서도 조명이 사진을 공격해, 절대 괜찮은 사진이 안 나온다, 폰카로는. 아이들이 모두 떠난 후에는 계단 위로 올라가 본다. 아, 저 색유리로 들어오는 알록달록한 빛과 그림들은, 별빛의 아름다움이 카메라에 담기기를 거부하듯, 그저 현재 이 순간 두 눈에만 들어올 뿐이다.
[3] 4시가 넘어서 베로니카 집에 도착. 정말 반갑게 맞아준다. 아! 용기내서 페북으로 연락하기를 얼마나 잘 했는지. 천사 같은 베로니카. 브라질 해돋이 농장 얘기도 하고, 아르헨티나 생활 얘기도 했다. 2001년에는 1페소가 1달러였다는데 지금은 15-16페소가 1달러란다. 끊임없는 물가 상승에도 잘 오르지 않는 임금. 다행히 베로니카가 살고 있는 집은 가족 소유여서 월세 걱정은 없단다. 한국에 관한 얘기와 여행해 관한 얘기도 나눈다. 베로니카는 멕시코와 베네수엘라에 각 2년씩 살았고, 특히 베네수엘라는 제 2의 고향 같다고 한다. 아, 베로니카! 정말 좋은 사람이다. (해돋이 농장에서 처음 봤을 때는 괜한 경계심에 편견을 갖고 대했다.)
베로니카가 어제 일하러 갔던 행사장에서, 남은 엠파사도(만두 같은 빵)를 얻어 왔다고 먹으라고 한다. 맛있다(브라질 친구 아름이는 이걸 먹으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다고 했다). 법으로 직원들이 이런 음식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했다는데(한국도 마찬가지다. 먹고 배탈 나면 책임질 수 없다는 논리로), 베로니카에게 이런 음식을 버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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