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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옷가게, 라 보까, 박물관 (여행 290일째)

2017년 5월 4일 목요일

 

[1] 23시. 베로니카집. 

 

와, 확실히 밤이 긴 문화다. 스벤이랑 베로니카에게 한국 라면을 끓여주고 싶었는데 둘 다 귀가를 안해서 홀로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미술관에서 가져온 팜플렛의 그림 몇 개를 오려 내고 나머지는 버렸다.

 

파라과이에서 카우치서핑 호스트를 하나 찾았다. 역시 작은 도시를 노리면 성공률이 높다.

 

[2] 오전에는 세비네 옷가게에 갔다.

 

정말 오래 걸었다. 가는 길에 상점, 좌판, 상인들이 없어서인지 꽤 지루했다. 공원에 잠시 들러 쉬려다가, 괜히 모기에만 뜯기고 다시 큰길로 도망쳐 나왔다.

 

길가의 중국인 가게에서, (이상하게 값이 싼) 10페소짜리 딸기잼 쿠키 한 봉지를 샀다. 쿠키를 하나씩 꺼내 먹는 재미에 모든 지루함과 잡념을 잊고 걷다가, 어느새 번화가에 있는 세비네 가게에 도착했다. 이 주변에는 한국 전자제품점, 한국 교회, 한국 옷가게가 있었고 한국인도 많이 보였다. 옷가게는 별로 안 컸는데 직원은 다섯명이나 있었고, 세비의 엄마 아빠는 가게 안쪽 사무실에 계셨다.

 

“어서 와라. 커피 마실래?”

 

세비의 아버지가 반겨 주셨다. 직원이 타온 맥심 커피를 마시며, 아버지가 물어보시는 이런 저런 질문에 답했다. 아버지는 이민 1세대여서 한국어가 유창했다. 반면 한국어를 못하는 2세대 자녀들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큰 아들 세비가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어학공부를 보냈던 것이고, 그 때 나와 세비가 알게 된 것이다.

 

“세비, 형 데리고 나가서 좋은 곳 구경도 시켜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줘라. 저녁도 집에 와서 같이 먹고.” 

 

[3] 버스를 타고(1인당 6.5페소. 세비가 카드를 찍어줌) 한시간 쯤 꾸벅꾸벅 졸다가 라 보까(La Boca) 지역에 도착했다.

 

강변을 걷다가 조그만 박물관(Benito Quinquela Martín Museum)에 들어갔다. 박물관에서는 배와 항구와 선원들을 거칠게 그린 유화, 옥상 노천에 전시된 조각품, 화가가 살았던 알록달록한 방을 구경했다. 전시품 중 가장 좋았던 건 일제히 하늘로 솟는 듯한 모습의 나무 조각들이었다. 처음엔 뭔지 몰랐는데 세비가 선수상(船首像)이라고 알려줬다. 은은하게 색깔이 입혀져 있어서 더 예뻤다.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무료 엽서를 몇 개 집어왔다. 툴리판(Tulipan)이라는 마가린 상표의 복고풍 광고가 특히 예뻤다. 세비가 선물이라며 화가의 그림 엽서를 몇 개 사줬다. 정말 좋은 녀석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특별한 관심을 주지 않았던 아인데, 알고 보니 나이에 비해 아주 의젓하고 쿨한 아이다.

 

어두워져 가는 라 보까의 멋진 풍경. 알록달록한 글씨체의 간판과 화려한 건물들. 예쁜 기념품들.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엠빠나다와 샌드위치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잠시나마 탱고도 구경했다. 엠빠나다에 뿌려 먹으라고 나온 일회용 케찹과 마요네즈가 남아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4]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탔다. 택시비가 200페소 넘게 나왔다. 이것도 세비가 내줬다. 하루 종일 따라 다니며 땡전 한 푼 내지 않아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세비네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신 만두국을 배 터지게 먹고, 세비가 선물이라면서 건네준 비싸보이는 알파호르도 먹었다. 둘세 데 레체 맛. 살살 녹는다.

 

식후에는 세비 방에서 책 구경을 했다. 무소유, 마당 깊은 집, 엄마를 부탁해, 사랑을 주고 갈 수만 있다면,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