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ste, Sense of Taste or Allegory of Taste
서명: 지성개선론(지성교정론) - 지성의 교정에 관한, 그리고 지성을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가장 잘 인도해 주는 길에 관한 논문.
저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
역자: R. H. M. Elwes, 황태연, 강영계
[30]
(1) 이제 어떤 종류의 지식(인식, knowledge)이 필요한지 알았으니, 그런 지식을 얻는 방법을 제시해야 함.
(2) 제일 먼저 고려할 것은 여기에 무한한 역행이 없다는 것임. 즉, 진리탐구의 최선의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그 방법을 탐구하기 위한 제2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으며, 제2의 방법을 탐구하기 위한 제3의 방법 등 무한으로 이어지는 방법들이 필요하지 않음.
(3)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진리의 지식을 얻지 못하며, 어떤 지식도 얻지 못함.
(4) 물질적인 도구를 만들 때와 비슷함.
(5) 쇠를 다루기 위해 망치가 필요하고, 망치를 만들려면 다른 도구들이 필요하고, 다른 도구들을 만들려면 또 다른 도구들이 필요함. 이것이 무한히 이어짐.
(6)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에게는 쇠를 다루는 능력이 없다는 헛된 주장을 하게됨.
[31]
(1) 하지만 사람은 먼저 자연에 존재하는 도구로 불완전하고 간단한 도구부터 만들고, 좀 더 완전하고 복잡한 도구를 만들어 냄. 그렇게 점점 단순한 일과 도구에서 어려운 일과 도구로 나아가면서, 많은 일을 이룩하게 됨.
(2) 이와 같이 지성(intellect)도 본유의 능력으로 지적 도구들을 만들고, 그 도구들로부터 다른 지적 작업을 할 능력을 얻고, 그 작업으로부터 그 이상의 탐구능력을 얻음으로써 지혜의 절정에 이를 때까지 점진적으로 나아감.
[32]
(1) 이것이 지성(understanding)이 추구해야 할 길임은, 우리가 진리 탐구 방법의 본성을 이해하고, 더 복잡한 도구를 만들고 진보하기 위한 본유의 도구(natural instruments)의 본성을 이해할 때 알 수 있음.
[33]
(1) 참된 관념(idea)은 그것의 대상물(correlate, ideatum)과는 다름. 그렇기에 원과 원의 관념은 서로 다름.
(2) 원의 관념은 원처럼 원주와 중심을 가진 것이 아님. 신체(body)에 대한 관념도 신체 그 자체가 아님.
(3) 관념은 그것의 대상물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음. 즉, 관념이 형상적 본질(actual essence, essentia formalis)로 간주되면, 그것은 다른 상념적 본질(subjective essence, essentia objectiva)의 대상이 될 수 있음.
(4) 또 이 두 번째 상념적 본질도 그 자체로 보면 실재적이고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음. 이렇게 무한히 이어짐.
[34]
(1) 예를 들어 베드로라는 사람은 실재적인 것임. 하지만 베드로에 대한 참된 관념(the true idea of Peter)은 베드로라는 실체가 정신적으로 투사된 것이고, 그 자체로 실재적이며, 실제의 베드로와는 구분되는 것임.
(2) 베드로에 대한 참된 관념은 그 자체로 실재적이며, 그 자체로 존재하므로,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음. 즉, 또 다른 관념(두 번째 관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이 두 번째 관념은 베드로의 관념이 형상적으로 갖는 모든 것을 자체 안에 상념적으로 가짐.
(3) 그리고 이 베드로의 관념의 관념(두 번째 관념)도 그 자체의 특성이 있으므로 또 다른 관념(세 번째 관념)의 대상이 될 수 있음. 이렇게 무한히 계속됨.
(4) 이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음. '베드로'가 누군지 알고, '자신이 베드로를 알고 있음'을 알고, 또 '자신이 베드로를 알고 있음을 알고 있음'을 아는 것임.
(5) 이로부터 '실제의 베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베드로의 관념'이나 '베드로의 관념의 관념'을 이해할 필요가 없음을 명백히 알 수 있음.
(6) 이것은 우리가 '알기' 위해서,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알 필요가 없고,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음'을 알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과 같음.
(7) 삼각형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원의 본질을 알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음.
(8) 오히려 순서는 반대임. '내가 알고 있음'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함.
[35]
(1) 이로부터 확실성(certainty)은 단지 사물의 상념적 본질(subjective essence of a thing)이라는 것이 명백해짐. 즉, 우리가 형상적 본질(actual reality)을 파악하는(perceive) 방식(mode)이 확실성 자체임.
(2) 또 진리의 확신을 위해서 참된 관념을 갖는 것 외에 다른 표지(sign)가 필요하지 않음. 내가 알기 위해서는 내가 알고 있음을 알 필요가 없기 때문임.
(3) 또한 이로부터, 어떤 사물에 대한 타당한 관념(adequate idea) 또는 상념적 본질(subjective essence)을 갖지 못하는 한 아무도 최고 확실성의 본질을 알 수 없음이 명백해짐. 확실성과 상념적 본질은 동일함.
[36]
(1) 따라서 진리에는 표지(sign)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진정한 방법은 관념을 획득한 후 진리의 표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사물의 주관적 본질=관념)를 추구하는 순서를 가르쳐 줌.
[37]
(1) 방법은 필연적으로 추론(reasoning)이나 이해(understanding)와 관련되어야 함. 방법은 원인을 찾는데 있어서 추론과 동일하지는 않으며, 사물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더더욱 아님. 방법은 참된 관념을 다른 감각과 구분하고, 그것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얻어지는 분별력임. 방법은 특정한 규칙들을 보조로 삼고, 쓸데없는 정신적 소모를 피함으로써, 주어진 기준에 맞춰, 지성적인 것은 무엇이든 이해하도록,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임.
[38]
(1) 우리가 그 방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반성적 지식(reflective knowledge) 혹은 관념의 관념(the idea of an idea)으로부터이다. 그리고 관념이 먼저 존재하지 않으면 관념의 관념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미 존재하는 관념 없이는 방법이 존재할 수 없음.
(2) 그러므로, 주어진 참된 관념의 기준에 따라,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인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좋은 방법일 것임.
(3) 다시 말하면, 두 관념 사이에 존재하는 비율이, 사상과 상응하는 실재물(實在物, actual realities)의 비율과 동일하다는 것으로부터, 가장 완벽한 존재에 대한 반성적 지식이 다른 대상에 대한 반성적 지식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음.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존재로부터 주어진 관념의 기준을 제공하는 방법이 가장 완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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