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읽기를 권함
야마무라 오사무 저 / 송태욱 역
[1] 느낀점
훌륭한 책이다. '속독법', '책 1만권 읽기' 등 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을 권하는, 안 그러면 뒤쳐지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하는 세상에서, 이 책은 품위 있게도 천천히 읽기를 권한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상투적인 구절이기 때문인지, 이 말을 어떻게 독서에 적용해야 할 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책은 양식을 먹듯이 읽어야 한다. 음식을 빨리 먹거나 과하게 먹으면 맛을 음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음식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한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연애편지의 답장을 읽을 때처럼"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책을 읽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진정으로 작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많은 책을 읽고 싶은 욕심에, 천천히 읽으라는 충고는 쉽게 잊혀진다. 그럴때면 이 책을 생각하자.
[2] 책 내용
23 천천히 읽어도 된다. 오히려 천천히 읽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의 선택이다. 결연히, 지독파로 살기로 작정해도 된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책은 향락하기 위해서도, 스스로 배우기 위해서도 또 그것을 비평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읽어야 한다. 플로베르는 이렇게 말했다. “아아! 이들 17세기 사람들! 그들은 그 얼마나 천천히 읽었던가!
25 엔도 류키치, <독서법> “대충 읽으면 읽을수록 뇌수가 나빠진다.”
신문, 잡문 또는 그 밖의 책을 남독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 사람들의 눈동자는 흐트러져 있다.
26 헨리 밀러 <나의 독서>
여기서 나는 억누르기 힘든 충동에 쫓겨 하나의 공짜 충고를 독자에게 바친다. 이런 것이다. - 될수록 많이가 아니라 될수록 적게 읽어라!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엄밀하게 자신의 행복에 득이 되는 것, 보람 있는 일만을 하는 기술을 배우는 일이다.
32 읽는다는 것이 인간의 행위 가운데 하나인 한, 걷는 것이나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체 리듬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시각이나 지각의 미묘한 작용처럼 관련되어 있을 테고, 또 깊숙한 곳에서는 호흡의 상태 같은 것과도 관련되어 있으리라.
NHK<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 생물학자 모토카와 다쓰오. 코끼리와 생쥐를 비교하면 심장 박동이건 혈액 순환 사이클이건 코끼리가 생쥐보다 열여덟 배나 긴 리듬으로 살고 있다. 그것을 설명하면서 생물학자 모토카와 다쓰오는 메밀국수를 먹는 장면을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사용했다. 우선 열여덟 배 빨리 돌리기로 재생한 움직임이 코끼리가 본 생쥐의 움직임과 같다고 한다. 젓가락을 대자마자 메밀국수는 뱃속에 들어가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다음으로 열여덟 배 천천히 재생해 본 움직임이 생쥐가 본 코끼리의 움직임이라고 한다. 젓가락으로 메밀국수를 집은 채 거의 멈춰 있는 것 같다.
살아가는 리듬이 다르면 세계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 이 세계가 드러나는 방식이 전혀 달리 보인다고 모토카와 다쓰오는 말한다.
35 일상의 행동 중에서는 아무래도 책을 읽는 리듬만큼 애매모호한 것이 없지 않을까? 그냥 내버려두면 무엇이든 빨리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이 사회이다. 그래도 걷는 것이나 먹는 것 등은 너무 부자연스런 속도로 하면 신체 기관이 거부 반응을 보여 제어할 수 있지만, 책을 빨리 읽는 것은 그렇지가 않아서 막을 수가 없다.
48 다카하시 신키치 <너무 탐하는 욕망>
“도중에 내던지는 일은 하지 않는 편이며, 책장을 뛰어넘지 않고 끝까지 읽는 편이다”
책을 놓을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말 그대로 나는 <죄와 벌>을 다 읽을 때까지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우치다 로안이 번역한 것으로 영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도 우치다 로안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한테 빌린 것이었는데 작은 글자가 빽빽이 들어찬 자그마하고 상당히 두꺼운 책이었다.
나는 풀밭에서 배를 깔고 읽고 있었다. 아직 백 쪽 정도 남아 있었다. ... 마지막 한 글자를 다 읽을 때까지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작은 글자가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만큼 해가 지는 것을 저주한 적이 없다. 전신으로 엄습해 오는 밤을 밀어내고 읽기를 계속했다. 아무래도 도중에 그만둘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영혼이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았을 테지만, 이걸로 보면 번역이 서툴다거나 잘못된 번역은 큰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며 원작자의 정신이 연소 되었는가 아닌가가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노파를 죽인 라스콜리니코프의 최후가 어떻게 될지 확인하지 않고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59 우선 모든 책은 대체로 첫 열 쪽 정도까지 정독할 필요가 있다.
첫 부분을 독파한다면 저자의 어구나 단어의 사용 방법, 이야기의 틀 따위를 알게 되니까 점점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첫 열 쪽을 정독하면 다음 열 쪽은 빨리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다시 그 다음 열 쪽은 더 빨리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처음 읽을 때는 시간이 걸리는 듯 하지만 결국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어떤 것에 붙어있는 종이를 벗길 때, 한 가운데서부터 벗겨서는 잘 벗겨지지 않는다. 끝부분부터 벗겨야 전체가 술술 벗겨지는 법이다.
65-66 앙드레 지드
지금 막 전쟁과 평화를 다 읽었다. 여행을 떠난 날에 읽기 시작해서 여행 마지막 날에 다 읽은 것이다. 내가 이렇게 책 안에서 많은 생활을 한 예는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언제였던가, 그 유명한 동굴 안에 들어갔으면서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내 생각은 마차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쇼펜하우어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경치를 보기 위해, 그리하여 독서가 중단된 것에 나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1891년 여름)
72-73 “맑게 갠 겨울 아침, 일어나 나뭇가지의 고엽이 물처럼 흐르는 아침 햇살에 씻기는 것을 보고 있는 동안, 시간이 지나간다.”
요시다 겐이치에게 독서라는 것은, 물론 소중한 일이긴 하지만 생활 속에서 반드시 최고의 일은 아니다. 그것도 알게 된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고 저물어 밤이 찾아온다. 그렇게 돌고 도는 시간과 함께 독서가 있고 그것이 시간을 즐기기 위한 일이라고 해도, 생활 속에서 그러한 일은 꼭 독서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시간 죽이기란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생각한다. 시간만 잡아먹는 책이나 독서법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렇기는커녕 날이 밝아 아침이 되고 날이 저물어 밤이 오는 그런 시간과 함께 있으며, 그 돌고 도는 시간을 ‘잡아먹는’ 것이 생활의 지혜이다. 예사로운 생활의 예사로운 지혜이다. 게다가 그것은 독서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식탁에 앉으면 식탁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아침 일찍 마당에 서면 마당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면 일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77 식사 시간에는 차분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밥이 된지 무른지, 국이 짠지 싱거운지 알맞게 된 건지, 무슨 생선을 조렸는지, 신선한지 묵은 건지 상해 가는지, 그런 일들이 모두 명약관화하게 마음에 비치듯 온 마음으로 식사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아케치 미쓰히데가 잎으로 싼 찹쌀떡을 잎도 벗기지 않고 먹어 버린 일 같은 것은, 바로 미쓰히데가 오랫동안 천하를 거느릴 수 없음을 말해준다고 평한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81 가와카미 히로미 <현대한국단편선>의 서평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아내의 상자>라는 작품에서 여자가 냉장고에서 갈치를 꺼내 굽는 묘사였다. “생선 굽는 그릴에 물을 넣고 가스에 불을 붙였다. 좀 있다가 갈치를 뒤집었다.” 이 문장만으로 나는 조용히 책을 덮고 잠시 동안 멍한 상태였다.
왜.
왜냐하면 나와 너무 똑같았으니까.
똑같다는 사실에 놀라는 자신 안에 ‘나 외의 사람들(물론 같은 일본 사람들이라도)은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는, 까닭 없는 배타 의식이 있었다는 사실이 멍한 나에게 쑥 내밀어졌던 것이다. 생선을 굽기 위해 그릴에 물을 넣고, 좀 있다가 뒤집는다는 것의 예사로움이 나를 찔렀다.
82-83 다케다 유리코 <후지 일기>
아침, 점심, 저녁의 식단을 비롯하여 찾아온 사람들의 일, 받은 편지, 산 것, 놀러간 일, 변해 가는 날씨 이야기, 근처 사람들에게 들은 소문들, 개 키우는 이야기, 라디오 뉴스 등 날마다 일어나는 사건의 세부를 더없이 청명한 어조로 써나가, 세상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긍정적인 빛으로 행복하게 비춰지는 일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94-95 발터 벤야민 <음식물>
기껏해야 절도를 지키는 일로 식사의 즐거움 정도는 알겠지만, 식사에 대한 탐욕, 식욕의 평탄한 길에서 일탈하여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는 원시의 숲에 이르는 과정을 아는 법은 없다. 즐기면서 먹는 것보다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이 먹어치운 음식물의 내부 세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일임은 분명하다. 빵을 갉아먹듯이 모타델라를 갉아먹고, 쿠션 안을 마구 뒤적거리듯 멜론을 휘저어 먹으며, 포장지를 버스럭버스럭 소리나게 하면서 캐비아를 집어먹고, 한 덩이 에담치즈 때문에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음식물을 말끔히 잊어버리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101 오블로모프형 기질: 재능이 있으면서 무기력하고 의지가 약한 지식인의 전형을 말한다. 러시아 소설가 곤차로프의 소설 제목임과 동시에 그 주인공의 이름
109 수세에 몰린 기분으로 대답했던 나도 결국 너무 흥분한 나머지 “뭐야, 넌. 남자인 주제에 단팥죽을 세 그릇이나 잘도 처먹더구나” 하고 외치고 말았다. 농담이라면 어찌 되었건 간에 정면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평소에 숙지하고 있었는데. 도리에 어긋난 이 발언에 다치하라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이처럼 아랫입술을 내민 채 몸을 부르르 떨면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고 어느새 눈물을 짓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나도 해서는 안 될 말을 입에 담았다는 후회와 고통으로 눈물이 솟아날 것 같았기 때문에 “차라도 마시러 갈까?” 하며 일어섰다.
111 그러나 상식만으로 1만 쪽이나 읽는다는 것은 분명 불가능하며, 무엇보다 그 분량은 이미 상식을 넘어 허풍의 영역에 이르렀다고 해도 좋다. 1만 쪽을 매달 읽기 위해서는 상식 외에 계속해서 허풍을 즐기는 심적 에너지가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벤야민이 말하는, 새로운 풍경이 전개되는 ‘원하던 고갯마루’를 향할 정도의 에너지가 필수적인 것이다.
128-129 멀리 히토마루 신사를 바라보면서 선조들에게 “지금 교토의 우메하라 씨라는 논객에게 마구 두들겨 맞아 난처해하고 있습니다만, 조상들께서는 혹시 히토마루씨에 대해 전해들은 건 없을까요?” 라고 호소하는 부분 등은 웃음을 자아낸다.
그런 논쟁도 있는 것이다. 녹초가 되는 격렬한 싸움 중에도 양쪽 다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데쓰카 오사무의 만화에는 때때로 효탄쓰기라는 기괴한 생물이 등장한다. 모습은 표주박으로 흰자위가 많이 보이게 눈을 부릅뜨고 문어같은 입을 하고 있으며, 머리와 몸통에는 꿰매어댄 자리가 있다. 이 이상한 생물은 만화의 전개가, 예컨대 드디어 연애가 아름답게 성취될 때라든가 또는 전투 장면의 격렬함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만화 네모 칸의 구석에 갑자기 출현한다.
그것이 웃음을 유발한다. 자기 반성으로서의 웃음. “뻥이야” 하는 낯설게 하기.
131 한 글자 한 글자를 헤아려가면서 읽는다. 나 같은 사람에게 그 정도까지 하는 것은 일상적인 읽기 방식이 아니다. 옛날 누군가가 “이거다 하고 생각되는 책을 만나면 누구든 연애편지의 답장을 읽을 때처럼 읽는다”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각별한 책은 저절로 일상과는 다른 각별한 방식으로 읽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135 아내의 죽음을 경계로 결국 독서마저 ‘내용이 없으며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고 단언한 우에하라 센로쿠는, 그래도 역시 독서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독서는 오히려 과격한 일이 된 것이다.
137 법화경의 여래수량품에 있는 구절, 자아게
어떻게 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는 지혜가 들게 하여 속히 성불시킬 것인가. 자나 깨나 오매불망.
143 작가로서 출발한 무렵 오자키 가즈오는 시가 나오야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시가 나오야의 문학에 압도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언젠가 시가 나오야와 자신의, 어쩔 도리가 없는 자질의 차이를 깨달았다. “시가 나오야는 강하고 늠름하게 자란 소나무 거목이다. 나는 그늘지고 척박한 땅에 휘청휘청 뻗은 팔손이나무 같다. 그러나 소나무도 나무고 팔손이나무도 나무다. 나는 내 나름대로 팔손이나무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오자키는 썼다.
152 만화의 ‘의미’나 만화가의 ‘의도’ 같은 것을 캐기보다는, 칸 안에 누가 보든 무샤노코지 사네아쓰가 그렸을 것 같은 연근 그림이 있고 그림 옆에는 “잘 씹어 먹자”는 식의 문구가 씌어있는 것을 알아챘다면, 오히려 그쪽이 재미있었을 것이다. 원래의 문구가 “잘 맛보는 자의 피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나니 더욱 재미있다.
155-6
뜰에서 일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지붕 위의 미치코를 향해 마을 건넸다. 그 대사를 인용한다. 마지막 두 줄은 아버지의 혼잣말이다.
미치코, 그 책 살까?
주문하면 돼. 다섯 권 살 테니까 가져다달라고 하면 되거든.
(미치코가 지붕 위에서 “괜찮아, 이제 다 읽었는걸.”하고 대답한다.)
좋아하는 책을 평생 가지고 있는 것도 좋은 거라고 난 생각하는데.
미치코, 책은 도움이 된단다.
책은 말이야, 많이 읽어야지.
창피한 일이지만 나이를 먹은 탓인지 아버지가 중얼거리는 마지막 두 줄은 내 눈물샘을 위태롭게 만든다. 지붕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이제 막 다 읽은 제5권의 판권 부분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미치코. 쓰릴 정도의 행복감이 퍼지는 장면이다.
대충 인생에서의 독서는 사회로 나가기 전의 독서와 사회로 나간 다음의 독서로 나누어볼 수 있다. 다음 달이 되면 미치코는 메리야스 회사에 취직한다. 책과의 일체감 안에서 나날을 보내는 행복한 독서도 이것으로 끝이다. <노란 책>의 마지막 장면에는 책을 반납한 도서관의 광경이 그려져 있는데, 그 광경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애절함이 스며드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170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등은 하루 한 장을 목표로 하여 4년에 걸쳐 화장실에서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천히 읽는 방식이었다고 해도 한가로이 느긋하게 읽는 것은 아니다. 저속으로 비행한다고 해서 조종사가 한가하게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어쩌면 고속의 비행보다 오히려 집중력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175 나한테는 그것이 기쁘다. 바로 지금도 책을 들고 있다. 그 책을 읽고 있다. 그런 생각이 솟아난다. 기쁠 때는 웬일인지 시간도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것 같다. 현실에서는 아주 짧은 한순간이어도 시간은 한없이 피어오르고 펼쳐지며 충만해지는, 그런 기분에 휩싸인다. 그것이 정말 기쁘다.
젊었을 적에는 독서를 하면서 그러한 감각을 가진 적이 없었다. 더 성급했었다.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어떤 책에 감동한 적은 있었어도 독서 자체에 감동하는 일은 없었다. 시간은 피어오르고 펼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흘러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지금은 확실히 독서의 감각이 달라졌다. 체감으로 알 수 있다. 언제쯤부터 알았을까, 그것도 알고 있다.
바로 천천히 읽게 되고 나서의 일이다.
향수享受할 때는 생쥐의 움직임이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원래 빠르다. 포도를 먹으면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한 알 두 알 차례로 입으로 가져가기만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미뢰의 감각이 작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으면서도 눈이 활자 위를 미끄러져 가기만 하는 경우가 있다. 책에서 보여야 할 풍경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들려야 할 울림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읽는 방식은 중요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 전력을 다해, 시간을 들여, 거기에 채워넣은 풍경이나 울림을 꺼내보는 것은 바로 잘 익어서 껍질이 팽팽하게 긴장된 포도 한 알을 느긋하게 혀로 느껴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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