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莊子) - 그림으로 쉽게 풀어쓴 지혜의 샘
장자 (지은이), 완샤 (엮은이), 심규호 (옮긴이) | 일빛
[1] 목차
- 소요유: 중심 사상은 지인무기(至人無己), 신인무공(神人無功), 성인무명(聖人無名)이다. 고야산의 신인처럼 운기를 타고 비룡을 몰면서 사해 밖을 노니는 것이다.
- 제물론: 중심 사상은 천지와 나는 함께 태어나고 만물과 나는 하나가 되는 “천지여아동생, 만물여아위일 (天地與我同生, 萬物與我爲一)”이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물은 통하여 하나가 된다.
- 양생경: 중심 사상은 포정해우(疱丁解牛)에서 볼 수 있다시피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다. 심재(心齋), 좌망(坐忘) 등이 그 방법이며, 근본은 ‘연독이위경(緣督以爲經)’이다.
- 인간세: 중심 사상은 복잡하고 다양한 세상사를 접하면서 외화(外化)하되 내적으로는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논대도: 중심 사상은 대도는 무소부재하다는 것과 진인, 지인의 경계에 이르고자 한다면 개인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정치관: 중심 사상은 천하는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무위(無爲)함으로써 무불위(無不爲)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내용
- 꿈속에서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가 자신과 나비조차 구분하지 못했던 철인은의 가장 큰 몽상은 진흙탕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자유를 만끽하는 거북처럼 되는 것이었다. 난세에 태어나 한때 일했던 칠원의 하급관리직을 내던지고, 남들이 다가갈 수 없는 아득한 우주의 꼭대기에서 냉정한 눈으로 세상을 관조하였다. 그가 꿈꾼 것은 천하 만물이 가장 합리적인 생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 평생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소박하게 살았으며, 수신양성과 청정무위를 주장했다. 세상이 혼탁하다 하여 은거한 그는 황작재후의 상황에서 세상과 다투지 않았으며, 삶이 자유롭지 못하다 여겨 솔성(率性: 천성을 따르다)을 강조했다. 그는 정신적인 소요(逍遙) 속에서 편안할 것을 주장하며, 외적인 역량에 의존하지 않고 자아를 성취하고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자 했다.
-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장자는 말한다. 逍遙游! 아무데도 의지하거나 거리낌 없이 자유롭고 自在하면서 그야말로 노니느 것이다. 大鵬처럼 높은 곳에 뜻을 두고 구만리 하늘로 날아오르고, 許由처럼 천하를 준다고 해도 받지 않으며, 고야산의 신인처럼 운기를 타고 비룡을 몰면서 사해 밖으로 노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는가? 장자는 말한다. 지인무기, 신인무공, 성인무명이라고.
- 곤붕의 비상은 끝없는 세계, 소요유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경계를 상징한다.
- 허유가 천하를 받지 않았다는 말은 공명이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무명’과 ‘무공’의 정신적 경계를 의미한다.
- 고야산의 신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세파에 밀려 갈팡질팡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소요한다. 이는 사사로운 마음, 공명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인은 무기, 즉 사사로운 마음이 없다고 한 것이다.
- 거대한 나무가 있다. 줄기는 울퉁불퉁하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를 댈 수 없을 지경이다. 사람들은 크기만 크고 쓸모가 없다고 불만을 품는다. 그러자 장자가 말한다. 왜 아무 것도 없는 드넓은 들판에 나무를 놔두고 그 밑에서 한가롭게 노닐지 않는가?
- “만약 천지 본연의 모습을 따르고, 육기의 변화를 파악하여 무궁한 경계에서 노닌다면 무엇을 의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지인은 사심이 없고, 신인은 공적이 없으며, 성인은 명성이 없다고 일컫는 것이다.”
- 진정으로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자연의 본성에 따라 움직여야만 한다. 육기의 변화에 따라 무궁한 경계에 진입해야만 한다. 이런 무궁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의지하는 것, 기대는 것이 없을 수 있다. 기대지 않으면 아무런 제한이나 속박이 없어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이를 일러 지인, 신인, 성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이런 이들처럼 될 수 있을까?
- 무기는 주관적 자아를 버리고 자연적 본성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자아가 없으면 만물을 따라 변화할 수 있으나, 일단 자아가 있으면 집착을 하게 된다. 집착으로 인해 나는 세계에서 고립하여 세계와 대립하게 되고, 나와 대립하는 것에 속박당하게 된다. 인간의 모든 충돌은 자아의식으로 인해 발생한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자신의 이익과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로써 우환과 번뇌가 싹튼다. 그렇게 때문에 자아를 잊어야만 삶의 고통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다.
- 무공은 인위적으로 공업을 세우지 않음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말로가 좋지 않은 이들 가운데 공업을 세우기 위해 애쓴 이들이 적지 않다. 공덕을 세우고 업적을 쌓으려면 자연히 다른 이들과 투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결과 다른 이를 해치든지, 아니면 자신이 상하게 된다. … 공덕이나 업적에 무관심한 이는 서로 싸우는 이들 밖에서 노닐며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공덕이니 업적이니 하는 것이 무엇이랴? 명리를 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명성과 이익을 추구하면 반드시 몸을 상하게 된다. 전국 시대에 진나라는 여섯 나라를 정벌하여 천하 통일을 달성했지만 끝내 2대만에 망하지 않았던가!
- 무명은 명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성은 인생에 유해하기 때문이다.
- 유한한 영역에서는 크고 작음, 많고 적음, 나와 너를 구분한다. 그래서 영원히 더욱 크고 많은 이익에 얽매여 자유를 잃고 만다. 무궁의 경계 속에서는 크고 작음, 나와 너의 구분이 사라진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공명이나 이익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우리가 얻는 모든 것은 결국 무궁으로 되돌아간다.
- 소요유는 장자가 제시한 일종의 이상적인 경계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어떤 문제를 생각할 때 유효한 방법을 제공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실패에 직면하여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거나 아무리 애써도 도무지 풀리지 않는 난제에 봉착햇을 때, 모든 문제를 극단까지 몰아가보는 것도 괜찮다. 그리하여 혼돈 사상의 도가니 속에서 더욱 뜨겁게 끓어오르면, 오히려 맑고 깨끗하게 변하게 된다.
- 인생에는 허황된 일이 많다. 명성이나 이익도 알고 보면 허황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니 그런 것을 지나치게 염두에 두지 말고 내심의 자연스러움과 단순함을 보존해야만 한다.
- 이른바 명성이나 이익이란 것도 마찬가진다. 인식이 얕고 식견이 짧은 사람은 그것이 생명의 전부인 줄 착각하고 그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인생의 참됨은 실로 그러한 허황됨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성패나 득실을 초월해야만 마음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 명예는 이룩해놓은 업적에 대한 칭찬이자 보답인 반면, 일종의 책임이자 압력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명예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삶 자체가 왜곡된다. 만약 허영을 추구하기 위해 일한다면, 이로 인해 끊임없는 싸움 속에서 끊임없는 고통과 번뇌에 시달리게 된다. 업적을 이룩하여 명성을 얻으면 더욱 큰 압력과 책임이 뒤따른다. 그럴 때 명성을 포기하고 새로운 일로 뛰어든다.
- 도의 각도에서 본다면 대붕과 참새 사이에는 실질적인 구별이 없다. 대붕이 오히려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도가 무한하고 무시무종하다면, 대붕이 제아무리 높고 멀리, 그리고 오랜 시간을 날아간다고 할지라도 끝내 무한에 다가설 수 없다. … 장자가 볼 때 지식이란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따져본다면 대붕은 불행하다. 그의 불행은 자신이 지닌 역량이 막강하고, 또한 자신보다 더 막강한 존재를 알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 앞에 무궁한 우주가 있다는 것을 안다. 우주는 바라볼 수 있을 뿐, 끝내 다가설 수 없는 무한이다. 무한, 무궁의 우주 앞에서 그의 존재는 미미하기 그지 없다. 설사 아무리 오랜 식나이라도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 미미함 – 우리가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마땅히 모든 욕망을 버려야 할 것이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는 무대의 경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 장자는 만물이 근본적으로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비 꿈을 꿀 수 있다. 그러나 나비 역시 그를 꿈꾼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죽었을 때 오히려 항아리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생사가 본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뭇 사람이 한창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갑론을박을 할 때도 그는 여전히 침묵중이다. 대언은 논설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 깨달음을 얻은 후, 그는 삶 자체가 하나의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사람은 꿈속에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낙심하고, 번뇌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꿈을 꾸다 깨어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꿈인 줄 안다. … 그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논쟁도 결국 끊임없이 지껄이는 수다나 잔소리에 불과하며, 삶을 탐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그저 아름다운 꿈일 뿐이라고 말한다.
- 길은 사람이 걸어서 만들어지고, 사물의 명칭은 사람이 불러서 생겨난다. 가(可)하다면 가한 원인이 있고 불가하다면 불가한 원인이 있다. 옳다면 옳은 원인이 있고, 옳지 않다면 옳지 않은 원인이 있다. 모든 사물에는 본래 모두 옳은 것이 있고, 가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반대로 어떤 사물도 옳지 않거나 불가한 것은 없다. 그래서 지천에 깔린 잡초나 커다란 나무, 못생긴 여자나 아리따운 서시는 물론이고, 괴이하고 기이한 모든 사물도 도의 각도에서 보면 모두 하나로 통한다. 한쪽에서 분산은 다른 쪽에서 완성이 되고, 한쪽에서 완성은 다른 쪽에서 분산이 된다. 이루어지면 반드시 훼손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에는 완성과 훼손이 따로 없으며, 모두 하나로 되돌아간다.
- 오직 통달한 사람만 이 모든 것이 통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지 않고 사물의 자연스러운 분수에 자신을 맡긴다. 이것이 자연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 저절로 자연의 길을 따라 가면서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를 일러 ‘도’라고 한다.
- 옛날에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처음부터 만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으니, 이는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만큼 지극하고 완전하다. 그 다음 경지에서는 사물이 존재하기는 해도 만물에는 구별이 없다고 여겼다. 그 다음 경지는 태초에 사물이 존재했고 사물의 구별도 있었지만, 옳고 그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옳고 그르다는 시비가 생겨나면서 도가 무너지고, 도가 무너지면서 사사로운 편애가 생겨난다.
- 이렇듯 우주의 기원을 따라 올라가면 유와 무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건만, 현실에는 갑자기 유와 무가 생겨났다. 그러나 유와 무가 진실로 유와 무인지 알 수 없다. 지금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과연 정말 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말을 안 한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 천하에 추호의 끝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태산이 오히려 작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장수한 이가 없으니, 팽조가 오히려 요절했다고 할 수도 있다.
-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는 처음부터 본래 생명이 없었으며, 생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형체도 없었지. 형체만이 아니라 본시 기조차 없었다네. 알 수 없는 혼돈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가 생기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생겼으며, 형체가 변화하여 생명이 있게 된 것이지. 그러다가 이제 또 변화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네. 이는 춘하추동 사계절이 변화하는 것과 같은 것일세. 그녀는 천지자연이란 거대한 방(묘실)에서 편안하게 누워있는 것이네. 그런데 내가 그녀가 죽었다고 엉엉 울면서 통곡한다면, 천명에 통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그래서 울음을 그치고 노래를 부른 것일세.
- 죽음을 과도하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기뻐하며 춤을 출 일도 아니다. “삶이 좋은지 모르고 죽음이 나쁜지 모른다.” 이래야만 득도의 경지, 부동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은 그저 자연 현상일 뿐이니, 삶과 죽음에 대해 기뻐하거나 고통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생명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좋아할 필요도 없고, 혐오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자연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희열과 혐오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기뻐한다고 생명이 연장되지 않으며, 기뻐하지 않는다고 죽음이 더디 오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인간이 통제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 앞에서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든, 아니면 즐거워하든 아무런 소용이 없다. 죽음의 신은 당신의 감정에 따라 결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무정하다.
- 주로 크고 맛있는 사과만 골라 먹은 학생은 결국 크고 맛있는 사과 한 상자를 먹은 셈인데, 당연히 기분도 좋고 즐거웠을 것이다. 이에 비해 주로 작거나 썩은 사과를 먹은 학생은 심리적으로 그다지 즐겁지 않았을 것이며,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분이 좋고 나쁜 것은 사실 자기한테 달려 있다. 우리는 자신을 조정하고 다스리는 것을 배움으로써 마음이 불편할 때라도 편안하고 좋은 심정을 갖도록 해야 한다. 모든 일이 즐거워야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일도 헤쳐나갈 수 있다.
- 현실 생활에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사과를 먼저 먹어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문제에 부딪친다. 우아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마음먹는다는 것은 다른 식의 휴식을 포기하는 것이다. 만약 낭만적인 서구식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면, 전통적인 중화요리를 맛보는 일은 다음으로 미뤄야 한다. 어던 회사에 취직을 하기로 했다면 다른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누군가와 달콤한 사랑을 약속했다면, 다른 이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렇든 얻음은 곧 잃음이다. 그것은 모두 기회의 문제다. 우리는 매일 의식적이든 아니든 여러가지 기회를 놓고 득실이 어떠한지 따져본다. 만약 자신의 선택으로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면, 자신의 선택에 대해 만족하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어떤 이들은 우리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거나, 심지어 잘못이고 멍청한 일이라고 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옳다고 생각하여 기꺼이 선택한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생각이 다른 것은 서로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나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이 존재하며, 각기 다른 감각과 느낌이 생겨날 수 있다.
-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먼저 어떤 사과를 먹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이다. 선택이 있음으로 해서 득과 실이 존재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선택함으로써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어떤 것을 잃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선택한 사과가 썩거나 작은 것이 아니라 맛있고 큰 것이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 모든 이들은 꿈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곧 생활이다. 꿈과 생활의 공통점은 결국 허무와 환상 속으로 귀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꿈만 같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삶의 의미는 자신의 이상 또는 몽상을 추구하는 과정에 존재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 장자는 양생을 잘하여 83세까지 살았다. 그의 풍부한 양생경험은 다음 몇 가지로 총합할 수 있다. 우선 심재와 좌망을 실천 방법으로 삼고 중도를 따르는 것을 불변의 원칙으로 삼는 것이 양생의 근본이다. 포정이 소를 잡는 것처럼 자신과 외물의 경계를 잇고 여유있게 칼날을 휘두르는 것 같은 양생이야말로 그가 추구했던 최고의 경계다.
- 번뇌를 자초하지 않는다. 세상의 온갖 허황된 변화 속에서도 정신을 편안하게 갖고 스스로 자신을 어렵게 해서는 안 된다.
- 심성의 자유. 양생은 심성의 자유를 귀하게 여긴다. 그것은 마치 우리 밖의 꿩처럼 먹고 살기가 힘들더라도, 닭장에 갇힌 닭이 되기를 원치 않는 것과 같다.
- 장자는 대종사에서 공자와 안회의 대화를 통해 좌망이 무엇인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안회가 말했다. “저는 나아진 바가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슨 말이냐?”
안회가 말했다. “인의를 잊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좋다. 그러나 아직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얼마 후 안회가 다시 공자를 뵙고 말했다. “저는 나아진 바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저는 예악을 잊었습니다.”
“좋다. 그러나 아직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며칠이 지난 후 안회가 공자를 뵙고 말했다. “저는 나아진 바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저는 좌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놀라 물었다.
“무엇을 좌망이라고 하느냐?”
안회가 대답했다. “손발이나 몸을 잊고, 귀와 눈의 밝음을 무리치며, 형체를 떠나고 지식의 속박에서 벗어나 위대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일러 좌망이라고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 하는 편향이 없어지고, 만물과 더불어 변화하여 한 군데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너는 과연 현명하구나! 나도 네 뒤를 따르고자 한다.” - 좌망(坐忘): 간단하게 말해서 좌망이란 앉은 자리에서 문득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물고기가 큰물에서 사는 것과 같다. 평화롭고 안온한 물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면 자신이 물고기인지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아예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다 물 밖 모래톱에 노출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숨이 가빠오고 아등바등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물고기라는 것을 인식하고 물을 찾아 버둥거리기 마련이다. 넓고 큰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좌망’의 실제다.
- 장자는 삶은 해치는 행위로 두 가지 예를 들고 있다. 하나는 지식 추구다. 유한으로 무한을 추구하면 결국 심신이 상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선과 악이다. 좋은 일을 하면 명성을 얻고, 나쁜 일을 하면 형벌을 당하는데, 결국 양자 모두 자아를 잃는 길이다.
- 평상심을 지녀라. 우리는 가지 나름대로의 방식이나 방법을 통해 인생을 경영한다.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며 티격태격하는 현실속에서 우리는 평상심을 잃는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평상심을 바탕으로 생활해야만 모든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모여든다고 말한다.
- 사람들은 모두 생존 이외의 목적을 위해 산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투쟁을 겪으며, 점점 조급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 일반인이 추구하는 외재적인 목적을 배제하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 근심이나 걱정을 하지 않고, 득실이나 이해에서 벗어나며, 오직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 사륙법칙: 장자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네 가지 측면과 그에 속한 여섯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 동탕거리지 않으면 평정을 얻게 되고, 평정을 얻으면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안하면 모든 일이 명징해지고, 명징해지면 텅 비어 허정에 이를 수 있다. 허정하면 인위적인 일을 하지 않더라도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
- 빈곤한 생활은 때로 정신에 큰 영향을 준다. 빈곤으로 인한 압박은 정신을 피폐하게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빈곤은 정신을 정화시키고 자극을 주어 더욱 고결하고 초월적인 것으로 고양시킨다. 빈곤한 삶 속에서도 장자는 돈을 똥처럼 하찮게 여겼으며, 세속의 악한 세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어둡고 추악한 현실을 고발하고, 통치 계급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했다.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더욱 승화시킨 것이다.
- 자고로 성현은 대부분 빈한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성현은 여전히 성현이다. 빈궁은 단지 환경이며, 빈천은 단지 외양일 따름이다. 성현을 성현이게끔 하는 것은 정신과 기개다. 그래서 비록 성현은 빈궁하지만, 고귀한 자가 그와 함께 서면 영광스러워하고, 무뢰한 제왕이나 비천한 자가 그와 함께 서면 굴욕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듯 군자는 궁핍하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장자는 바로 이러한 빈궁한 성현이다.
- 남방에 원추라고 부르는 새가 잇는데, 혹시 그 새를 아시오? 원추는 남해에서 출발하여 북해로 날아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물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감로천의 물이 아니면 먹지 않소. 그런데 썩은 쥐를 잡은 올빼미 한 마리가 때마침 날아가는 원추를 보고는, 고개를 들어 헉하고 소리를 질러삳고 하오. 지금 당신도 양나라 벼슬자리 때문에 나를 보고 놀라는 것이오?
- 재경의 거: 일개 목수에 불과한 저에게 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악기를 만들 때 정신을 딴곳에 소모시키지 않고, 반드시 재계(齋戒: 마음과 몸을 깨끗히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 함)하여 심신을 안정시킬 뿐이지요. 사흘간 재계하면 상이나 벼슬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닷새간 재계하면 세상의 비난이나 칭찬, 잘하고 못하는 것등을 생각하지 않게 되며, 이레 동안 재계하면 저에게 사지와 육신이 있다는 것조차 잊고 맙니다. 이때가 되면 조정(朝廷)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그저 기술에만 전념하기 때문에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런 다음 숲으로 들어가 나무의 자연스러운 성질이나 모습을 살펴 가장 좋은 것을 찾아냅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속으로 악기의 모양을 그려보고 나서 나무에 손을 댑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만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저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나무의 본성과 서로 합쳐집니다. 제가 만든 악기가 귀신의 솜씨 같다고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 무아지경, 뱃사공의 솜씨: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라면 몇 번 연습하면 노를 잘 저을 수 있다는 것은 물을 잊기 때문이다. 잠수하는 사람이 배를 본 적이 없는데도 노를 곧 저을 수 잇는 것은 그가 연못을 언덕처럼 여겨, 배가 뒤집혀도 수레가 언덕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배가 뒤집히거나 뒤로 가는 등 온갖 위험이 눈앞에 펼쳐져도, 그것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가지 못하니, 어찌 여유가 없겠는가! 질그릇을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교묘한 솜씨로 잘 맞추지만, 띠쇠를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마음이 무겁고, 황금을 내기로 활을 쏘면 마음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솜씨는 한 가지로 같지만, 아끼는 마음이 들어 외물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무릇 외물만 중시한다면 안에 있는 것이 옹졸해진다.
- 장부의 헤엄 기술: 삼십길이나 되는 폭포수에 급류가 사십리나 이어져 물고기나 자라도 헤엄칠 수 없는 곳에서 여량의 사내가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었던 것은, 반복되는 연습, 물의 흐름과 변화를 거스르지 않음, 그리고 공명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전심전력하여 숙련된 수영 기술을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놀랄 정도로 신묘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 진인. 도의 위대함: 미미한 것을 거절하지 않음. 성공을 자랑하지 않음. 어떤 일을 도모하지 않음. 잠을 자도 꿈꾸지 않음. 깨어 있어도 근심이 없음. 식사를 해도 맛난 것을 구하지 않음. 숨을 쉬면 깊고 깊음. 태어났다고 기뻐하지 않음. 죽음을 거역하지 않음. 자신의 내원(來源)을 잊음. 자신의 돌아갈 곳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음. 사물에 따라 치우치지 않음. 무리 짓지 않으나 고집스럽지 않음. 심지가 텅 비어 넓지만 겉치레를 하지 않음. 편안하게 자적하면서 기뻐함. 덕행이 넓고 커서 사람들이 따름. 정신이 넓어 세상처럼 광대함. 초연하여 예법에 얽매임이 없음. 침묵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 감각이 닫힌 것과 같음. 심기를 쓰지 않음이 말을 잊은 것과 같음.
- 윤편의 수레바퀴: 수레바퀴를 깎는 윤편의 기술은 책에서 얻은 간접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실제 노동을 하면서 얻은 직접 경험이다. 대도의 가장 뛰어난 정수는 반드시 개인적인 수양을 통해 체득되는 것이지 언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단 지식의 형태로 변하면, 도에서 멀어지는 법이다.
- 세상에는 두 가지 책이 있다. 하나는 현실이라는 무자서이고, 다른 하나는 제본을 한 유자서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유자서를 많이 읽지만, 나이가 들수록 무자서를 읽어 독립적으로 생활하며 창조해야 한다. 사실 유자서를 많이 읽는 것은 현실의 무자서를 읽기 위함이다. 유자서는 누군가 저술한 것이니 과거의 무자서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무자서는 언제나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의 생활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무궁무진하다. 과거는 과거일 따름이다. 오직 현실 생활만이 살아 움직인다.
- 대도는 무소부재하다. “도는 똥오줌에도 있다”는 장자의 말은 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불가에서 “모래 하나에도 세계가 담겨있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크든 작든 관계없이 어느 곳에든 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검도, 서도, 다도)
- 여섯번째 손가락. 침묵하고 질박한 삶을 유지하라. 과도한 떠벌림과 지나친 수식은 오히려 사람을 혼미하게 하여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게 한다.
- 인류의 지혜나 책략, 변론 등은 천하를 이롭게 하기는 커녕, 천하의 도를 잃게 하고 인류의 본성을 상실하게 하는 근원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데 무엇보다 귀한 것은 자연 무위다.
- 공자가 대도 척을 설득하기 위해 태산으로 갔다. 그러나 도척은 공자를 보자마자 크게 노하며 사나운 목소리로 그를 비난했다. “옛날에는 새나 짐승이 많았지 사람은 적었다. 그래서 나무 위에 집을 지어 짐승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했고, 낮에는 상수리나 밤을 줍고 밤에는 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소씨(有巢氏)의 백성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은 옷을 입는 것을 몰랐고, 다만 여름에 나무를 베어 놓았다가 겨울에 장작으로 때어 추위를 피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생존하는 법을 아는 백성(지생지민)이라고 한 것이다. 신농씨 시대는 백성이 편안하게 눕고 여유롭게 일어나며 한가한 삶을 누렸다. 낳아준 어머니는 알아도 아버지는 몰랐으며, 사슴 등과 함께 살며 스스로 경작하고, 스스로 옷감을 만들어 입으며, 서로 해치는 마음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도덕이 극성하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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