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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캠벨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Morning on the Kulikovskoye Field1943-7 by Alexander Bubnov


놀라운 것은, 심원한 창조적 중심을 촉발하고 고무하는 특징적인 효과가 아이들 놀이방에서 굴러다니는 하찮은 동화책에도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한 방울의 바닷물이 바다의 본질을 고스란히 대표하고, 하나의 벼룩 알에 생명의 신비가 두루 깃들여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이는 신화학의 상징은 꾸며낸 것도 아니고 누가 있으라고 해서 있을 수도, 발명될 수도, 억압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palingenesia>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 여신Nemesis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파멸은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올가미다. 전쟁은 올가미다. 변화도 올가미이며, 항구 불변성이라는 것도 올가미다. 죽음이 승리하는 날이 오면 죽음이 다가온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는 길뿐, 갈가리 해체되었다가 재생하는 길뿐이다. 

창조 작업의 회복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을 위한 위기가 따르는데, 토인비 교수는 이 위기를 묘사하는 데 <해탈detachment>과 <변용transfigur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첫단계, 즉 해탈 혹은 물러섬withdrawal 과정은, 외적인 세계에서 내적인 세계로, 대우주에서 소우주로 그 중심을 옮김으로써, 황무지의 절망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영원히 평화로운 영역으로 물러섬으로써 이루어진다. ... 이 영역이 바로 유아기의 무의식이다. 우리가 잠잘 때 들어가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인 것이다. ... 이 황금의 씨앗은 마르는 법은 없다. ... 이 전체성의 일부라도 나날의 현실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우리의 능력은 놀라운 수준까지 신장될 것이며, 아울러 생기 넘치는 재생의 순간을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더 높이 솟아야 한다.

사람들은 비교적 무의식적으로 시민 및 종족으로서의 정례(定例)를 따름으로써 대부분 위험 부담이 적은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역시 구원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대속자들에 의해 아득한 옛날, 인류에게 주어져 수천 년간 계승되어 온, 사회의 상징적 도움이라는 미덕, 통과 제의, 은총으로 입은 성사(聖事)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다.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의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katharsis, purgatorio)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Ovid, Metamorphoses)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재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Bhagavad Gita, 2:18)

... 이렇게 되자 마라는 세 딸, 즉 욕망과 괴로움과 욕정을, 관능적인 시녀와 함께 풀었으나 존자(尊者)의 마음은 흐트러지지 아니했다. 마침내 신은 그 부동의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은 자기라고 주장하면서 날카로운 원반을 던져, 자기를 옹위하던 군대가 암산처럼 그에게로 무너지게 했다. 그러나 미래의 부처는 한 손을 움직여 손가락 끝을 대지에 갖다댐으로써 땅의 여신에게 거기 앉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시키려 했다. 땅의 여신은 수백, 수천, 수십만이 포효하는 소리로 이를 확인하니 적대자는 미래의 부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 군대가 물러갔고, 세계의 모든 신들은 꽃가지를 뿌렸다.
해지기 전에 이 싸움에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초저녁에 자기의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물을 두루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녘에는 인과(因果)를 깨쳤다. 그는 날샐 무렵에 완전한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Buddhahood, 즉 정각은 말로써는 전할 수 없고(불립문자) 오직 정각에의 방법Way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과 형태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진리의 불립 문자 교리는, 플라톤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 전통의 근간을 이룬다. 과학의 진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세워진 논증할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에 가능하지만, 제의, 신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까지 인도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조용한 체험으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산스크리트어에서는 현자를 Muni, 즉 <조용한 자>라고 한다.

돌이켜보면,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神的)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 <왕의 아들>이고 그는 이로써 자기의 실제적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 이런 시각에서 보면 영웅은, 우리 모두가 내장하고 있되 오직 우리가 이 존재를 발견하고 육화(肉化)시킬 때를 기다리는 신의 창조적, 구원적 이미지의 상징이다.

서로 칼을 빼들고 으르렁대던 두 사람이 이웃 사람들 손에 끌려 재판을 받기 위해 추장 앞으로 갔다. 에드슈는 재판의 방청객 틈에 끼어 있었다. 추장이 어느 농부의 말이 맞는지 몰라 전전 긍긍하자 이 익살스러운 노인은 정체를 드러내고는 자기가 장난을 좀 쳤음을 시인한 다음 모자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둘은 싸울 수밖에 없었지.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은 남들을 싸우게 하는 것이니라."

영웅을 도와주는 노파나 요정 노파는 유럽의 민담에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의 성인전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이 역할을 맡는다. 성모의 주선으로 성자는 천주의 자비를 얻는 것이다. 지주녀는 그 줄로써 태양의 운행을 통제할 수 있다. 우주 태모(宇宙太母, cosmic Mother)의 보호를 받는 영웅은, 어떤 가해도 받지 않는다.

삼계(三界)의 위난을 안전하게 두루 거친 끝에 단테는 이렇게 기도한다.
성모여, 당신은 살아 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성모여 당신은 하도 크시고 은혜로우시어, 그 은총을 입되 당신을 거스르지 않는 자는 날개 없이도 나는 소원을 이루겠습니다. 당신의 자비는, 구하는 자는 물론, 미처 구하지 못하는 자에게까지 두루 미칩니다. 당신의 자비, 당신의 연민, 당신의 품위, 당신의 온갖 미덕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모두 하나가 됩니다.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소명에 응답했고, 용기 있게 미지의 사건에 대한 체험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영웅은 모든 무의식의 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대자연Mother Natu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오무기 태자는 다섯 차례의 공격에 실패, 다섯 군데가 붙은 채 도깨비의 몸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태자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한편, 도깨비는 도깨비대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는 필시 인간이라기보다는 사자, 아니 귀신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범인은 아니다. 나 같은 도깨비에게 붙잡힌 신세가 되었는데도 떨기는커녕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내가 이 길목을 지킨 지 오랜데도 이 같은 자와 대적하긴 처음이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젊은이여,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는데 어찌해서 겁을 먹지 않는 것인가?"
"도깨비여,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태어나면 어차피 한번은 죽게 되어 있는데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내 뱃속에는 벼락이라는 무기가 하나 더 있다. ... 결국 그대가 나를 먹으면 우리는 둘 다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고대의 상징 체계에 따르면 빛과 어둠을 표상하는 자매, 즉 이난다와 에레쉬키갈은 두 얼굴의 한 여신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목은 어려운 시련의 길을 의미한다. 신이든 여신이든, 남자든 여자든, 신화의 등장인물이든 꿈을 꾸는 사람이든, 영웅은 적대자를 발견하고 삼키거나 그에게 삼켜짐으로써 이 적대자(뜻밖에도 그 자신의 자아)를 동화시킨다. 하나씩 하나씩 장애는 차례로 사라진다. 영웅은 자신의 자존심, 미덕, 아름다움, 삶을 팽개치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적대자에게 절을 하거나 복종한다. 이윽고 영웅은 자신과 적대자가 사실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된다.

... 이 여신은 다름아닌, 절대 절멸의 공포와, 비인격적이지만 모성적인 평화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주적인 권능, 우주의 전체성, 대립물의 조화였다. 시간의 강이 사람의 흐름으로 바뀌면 여신은 순식간에 창조하고, 보존하고, 파괴한다. 이 여신의 이름은 <검은 존재the Black One>, 즉 칼리Kali다. 별명은, <존재의 바다를 건네주는 나룻배>다.

열등한 눈으로 보면 여신은 열등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무식한 눈으로 보면 범용하고 추악한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노파의 행색은 이러하다. ... 이빨은 둥글게 말려올라가 귀 밑에까지 이르러 있는데 ... 눈은 검고 연기처럼 흐렸으며, 코는 심한 매부리코인데 콧구멍이 유달리 넓었다. 주름살이 깊게 패인 배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고, 굵은 발목과 넓은 두 발 위의 정갱이는 심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 어쨌든 노파의 몰골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추악했다.
"물을 드리겠소. 대신 나에게 입맞춰주시오"
"입맞춤이 대수요? 그대를 껴안아줄 수도 있소"
왕자는 노파를 껴안고 뺨에다 입을 맞추었다. 왕자가 입을 맞추고 물러서는데 보라, 화용월태, 세상 어디에 그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랴 싶은 미녀가 바로 앞에 서 있는게 아닌가!
"그대는 누구신가요?"
여인은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왕도(王道, Royal Rule)라고 합니다. 타라(아일랜드)의 왕이시여! 내가 바로 왕도입니다. ... 처음에는 그대 역시 이 몸을 추악하고, 야비하고, 욕지기가 나는 노파로 보았다가, 이윽고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왕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왕도란 싸움 없이, 치열한 전쟁을 치르지 않고는 손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그릇은, 무슨 일이 있든지 이를 이기고 왕도를 가는 것입니다."

왕도가 그렇다니? 아니, 인생이 그렇다는 뜻이다. 수호 여신은 영웅에게 <온유한 마음>을 요구한다. 여신은, 악타이온의 동물적 욕망으로도, 퍼거스의 결벽에 가까운 도사림으로도 파악되지 않았다. 오직 니알의 부드러움에 의해서만 그 정체가 드러났다. 

이 부드러움이 일본의 10-12세기의 낭만적인 궁정시에서는 <아와래(憐憫, gentle sympathy)>라고 했다.
새들의 초록빛 숲 그늘에 깃들이듯
사랑은 온유한 마음속에 깃들인다.
이치로 보면
사랑 이전에 온유한 마음이 없었고,
온유한 마음 이전에 사랑도 없었다.

마귀가 어린 베르나르에게 그런 천품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의 동정을 빼앗고자 함정을 만들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어느 날 악마의 꼬임에 빠져 젊은 여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는 심히 얼굴을 붉히고 얼음이 뜨는 연못 속으로 들어가 뼈마디가 얼 때까지 참회했다. 또 한번은 잠이 들어 있는데 젊은 여인이 발가벗고 침대로 들어왔다. 여자가 다가왔음을 깨달은 베르나르는 아무 말 없이 침대를 내주고는 침대 한 귀퉁이로 돌아누워 다시 잠을 잤다.

<코끼리 형상을 한 손>이 가리키는 왼발은 <두려워 말라>고 한 이유를 보충 설명하고 있다. 신의 머리는, 창조와 파괴의 역동성 안에서도 조용하고 반듯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상(事象)의 중심은 항상 고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시바 신의 오른쪽 귀고리는 남자의 것이고, 왼쪽 귀고리는 여자의 것이다. 이는, 신이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시바의 표정에 떠올라 있는 것은 슬픔도 기쁨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부동의 움직임을 주관하는 존재, 세상의 행복과 고통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이 양자를 품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다.

비라코차는 만유의 신이며 만물의 창조자다 .그런데도 지구에 내린 그의 모습을 전하는 전설에는 그가 누더기 차림에 손가락질이나 받는 거지로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베들레헴 여관 문전을 기웃거리는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문전에서 걸식하던 제우스와 헤르메스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 이것은 신화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는 주제다. 코란은 <어디로 돌아서든, 거기엔 알라 신이 계시도다>라는 말로 이를 암시하고 있다.

욥은, 끔찍한 불가마 안에서 견디는 용기와 전지전능한 신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 개념 앞에서 결코 파괴나 굴복당하지 않음으로써, 친구들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위대한 계시에도 맞설 수 있음을 증명한 영웅이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욥기 42:5-6)

동유럽의 게토에서는 다음과 같은 서정시가 흘러나왔다.
오, 만유의 주님
당신께 찬송을 바치렵니다.
어딘들 당신이 계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나는 곳이면 당신이 계시고,
제가 머무는 곳이면 당신이 계십니다.
오, 당신이여, 유일한 주님이시여.
잘 되어도 당신께 감사 드리고
못 되어도 당신께 감사 드립니다.

당신은 예전에 계시었고, 지금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다스리셨고, 다스리시며, 다스릴 것입니다.

당신은 하늘이며, 땅이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도 채우시고,
지극히 낮은 곳도 채우시니,
내 어디에 가든 당신은 거기에 계십니다.
(Leon Stein, "Hassidic Music")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가납(嘉納)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붙여지고 경계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空)의 무량 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 부처 자신처럼, 이 신과 같은 존재는 인간적인 영웅이 마지막 무지의 공포를 초월하고 획득하는 신적인 상태의 한 본보기다. <의식의 외피가 벗겨져 나가, 모든 공포에서 자유로워지고 변화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 상태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해 있는 해탈의 상태이며, 영웅들이 됨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상태다. 즉 <만물에는 불성이 있으니>, <일체의 존재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 고통과 쾌락은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가 고통과 쾌락을 깊은 휴면 상태로 구속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그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라고 하는 존재, 그의 형상, 혹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희망이다.

신은 각기 다른 신도, 시대, 국가에 맞추느라고 서로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 그 교리에는 여러 가지의 길이 있다. 그러나 길은 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심 전력으로 어느 길이든 따라가면 누구든 신에 이를 수 있다. 얼음 과자를 가로로 먹든 모로 먹든 무슨 상관인가! 어떻게 먹든 달콤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The Gospel of Sri Ramakrishna)

밀라레파Milarepa의 노래 두 편에서 가려뽑은 티베트 시구
육계(六界)미망의 도시 가운데
으뜸가는 소인(素因)은 악업에서 나온 죄악과 우매함이다.
여기서 중생은 좋고 싫음에 의지하니, 언제 이 좋고 싫음이 다르지 않음을 알 틈이 없다.
오호라, 좋고 싫음의 무상함이여.
만상이 본래 비었음을 알면,
그대 마음에 대자 대비가 일어나리라.
그대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알면
남을 섬길 수 있으리라.
남을 능히 섬겨 내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나를 만나면 불성에 이르리라.

이 장(章)에서는 다음과 같은 개념들이 등식을 이루었다.
공(空) 세계
영원 찰나
열반 삼사라(世界)
진리 미혹
정각(正覺) 연민
여신
친구
죽음 탄생
벼락 방울
보석 연화
주체 대상

양(陽) 음(陰)
--도(道)--
--절대 부처--
--보살--
--지반 무크타(자유로워진 사람)--
--육으로 된 말씀--

카우쉬타키 우파니샤드Kaushitaki Upanishad 1:4, 범천(梵天)의 세계에 도달한 영웅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과 비교해 보라. <마차를 모는 이가 두 개의 마차 바퀴를 내려다보듯, 그는 밤과 낮,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그리고 모든 대립물의 쌍을 내려다본다.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넘어 신을 안느 이는 바로 신에게로 간다.>

길가메쉬여, 산해진미를 배불리 먹고,
주야로 그대 일신을 즐기되,
나날을 흥겨운 잔치로 보내라.
주야로 희롱하며 즐거워하라,
머리 감고, 몸을 씻고,
호의 호식을 탐하여라.
누가 그대 손을 잡든 개의하지 말고,
그대 아내를 그대 품 안에서 복되게 하라.

무녀의 충고가 쾌락주의적이라는 지적은 흔하다. 이 구절은 고대 바밀로나이인들의 도덕 철학이 아닌, 입문의 시험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몇 세기 뒤 인도에서도 어느 제자가 스승에게 영생불사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 스승은 현세적 삶의 쾌락에 진력할 것을 권한다. 이를 견딜 수 있는 자만이 다음 단계에 입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靜溢)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魔)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道)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도덕경 16)

일본에는 <인간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신도에게 내리는 은혜는 그 신도의 처지와 그가 발원한 소망에 준하여 내려진다.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교,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차례로 용을 쓰러뜨리고, 관문과 관문을 차례로 지남에 따라, 영웅이 고도로 갈망하는 신의 모습은 점점 커져, 이윽고 우주 전체에 가득 차게 된다. 영웅의 마음은 마침내 우주의 벽을 깨뜨리고 모든 형상(모든 상징, 모든 신성)의 경험을 초월하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불변의 공(空)에 대한 자각이다.

... 신들은 그 천상적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소원이 무엇이든 한 가지는 이루어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이미 전능에 이른 그와 같은 왕에게 소원이 당할 것인가? 은혜 중의 은혜를 내린들 인간 중에서 으뜸가는 인간인 그에게 무슨 생색이 나랴? 이야기인즉, 무추쿤다 왕은 전쟁을 치르느라고 몹시 지쳐 있었다. 그는 끝없이 자게 해주되, 어떤 인간이든지 깨우려드는 자가 있다면 일별(一瞥)에 불타서 잿더미가 되게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신들에게 말했다.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인간으로 살고 업을 쌓을 때 저는 닥치는 대로 살고 닥치는 대로 업을 쌓았습니다. 인간이 나고 죽기를 여러 번 할 동안 저는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어디에서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저 뛰고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근심을 기쁨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사막 위로 나타나는 신기루를 시원한 샘물로 알았습니다. 왕의 권능, 지상의 소유, 부와 권력, 벗과 자식들, 아내와 추종자들 이 모든 존재는 제 오감을 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원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것이 되는 순간부터 이 모든 것들은 그 본성을 벗고 불길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저는 제 길을 찾아 신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분들은 저를 동아리로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끝납니까? 안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신들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모두, 주님이신 신이시여, 당신의 손으로 꾸미신 계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피조물들이 태어나고, 고통을 받고, 나이를 먹고, 죽는 헛된 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동안 그들은 죽음의 주재자와 맞서다 갖가지 정도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 모두가 당신에게서 온 것입니다.

내 주님이신 신이시여, 저 역시 당신의 희롱에 말리어 이 세상의 제물이 되고, 허물의 미로를 방황하고 자아 의식의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렸습니다. 이제 원하옵건대, 당신의 실제(끝없고 자비로운)를 피난처로 삼아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바타(devata: 수련자의 수준에 알맞는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융 박사의 견해를 들어보자.
<교리적 상징의 유용한 기능은, 개인이 무턱대고 나서지 않는 한 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과 가족을 떠나 너무 오랫동안 혼자 방황하고, 심연의 거울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이 무서운 만남 자체가 그에게 재앙일 수 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꽃피어 왔던 전통적인 상징체계는 이때 영약으로 작용하여, 살아 있는 신의 치명적인 공격무대를 교회라는 신성한 공간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 그러나 이자나미가 궁전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이자나기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머리카락 오른쪽에 꽂혀 있던 빗의 가장자리 살 하나를 꺾어 여기에다 불을 붙여 들고 들어가보았다. 그가 본 것은 구더기가 하얗게 슬어, 썩어가고 있는 이자나미였다.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첫번째 문제는, 성취의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체험을 겪은 이후에 덧없는 기쁨과 슬픔, 삶의 범용과 소란한 외설스러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문제다. ... 사회를 악마에게 넘겨버리고, 저 자신은 천상의 바위 굴에서 문을 닫고 은거하는 편이 쉽기는 쉽다. 그러나 ... 시간 속에서 영원을 표상하고, 시간 속에서 그 영원을 지각하는 작업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립 반 윙클은 무엇을 체험하고 왔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귀환은 한낱 우스개로 끝나고 만다. ... 카마르 알 자만은 ... 깨어 있는 채로 깊은 잠이라는 천복의 은혜를 체험했고, 믿어지지 않는 모험이라는 튼튼한 액막이를 지니고 빛의 세계로 귀환했기 때문에 일상의 엄연한 환멸에 직면하고도 자기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의 모습은 수십만 가지니, 그 종류와 형상이 가지각색이니라. 볼지어다, 모든 신들과 천사들을. 일찍이 인간이 보지 못했던 수많은 경이로움을 볼지어다. 바로 오늘, 너는 나의 이 몸 안에서, 살아있는 것들과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이 모두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우주를, 네가 보고 싶어하던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허나, 네 눈으로는 나를 볼 수 없다. 내 너에게 영험한 신의 눈을 줄터인즉, 볼지어다. 궁극적인 내 요가의 권능을...

... 주님께서는 그 불타는 입술로 이 세계를 삼키시고 입맛을 다시십니다. 주님의 빛은 온 우주를 두루 비추시고, 그 열기는 온 우주를 두루 태우십니다. 오 비쉬누 신이시여, 주님이 누구시며,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운 형상을 하고 계신지 일러 주십시오. 최고의 신이시여, 합장 백배하오니 자비를 베푸소서. 궁극적인 존재이신 주님이 누구신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능한 자요, 이승을 멸하는 시간이며, 이제 여기서는 저들을 살육할 자라. 네가 아니어도, 여기에 대치하고 있는 군사는 하나도 남지 못하리라. 그러니 일어나 네 몫의 승리를 거두라. ... 저들은 다른 이가 아닌, 내 손에 죽었음이라. 아르쥬나여 너는 내 칼에 불과하니라. 이미 내 손에 죽은 드로나와 비쉬마와, 자야드라타와 카르나와 그밖의 선봉장들을 죽일지어다. 두려워 말지어다. 싸우면, 이 전장에서 적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니라.

베다를 공부한다 하더라도, 무서운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보시를 행한다 하더라도, 또 의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네가 본 나의 이 최고의 모습은 볼 수 없느니라. 그러나 오직 믿는 마음이면 나를 알 수 있고 참답게 볼 수 있으며 내게 들어와 하나가 될 수 있느니라. 항상 나를 위해 일하고 오직 나만을 목적으로 알고, 진실로 나를 정성으로 믿으며,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악의를 품지 않는 자, 그런 자가 내게 오느니라. (바가바드 기타 11:53-55)

예수는 똑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마태 16:25)
이제 의미는 분명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종교적 관행이 좇고 있는 바다. 심리적 훈련을 통하여 개인적인 한계, 독특한 습관, 희망, 공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를 깨닫고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자기 적멸에 대한 저항을 버리면, 개인은 위대한 <하나됨at-one-ment>, 즉 <자기 화해self-atonement>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바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제 법Law은 그 안에서 거침새가 없다.
이러한 무애적(無碍/無礙) 존재의 궁극적인 상태를 표상하는 것이야말로 신화적 존재의 대종을 이룬다. 특히 동양의 사회적 신화적 문맥에서 그러하다. 은자의 숲에 은거하는 현자와 운수행각(雲水行却)의 탁발승은 동양의 삶과 전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신화에서 이러한 인물은 방랑하는 유태인(추방당한 무명의 존재지만 주머니 속에는 고귀한 진주가 들어 있는), 개에게 쫓기는 거지, 음악으로 듣는 자의 영혼을 위무하는 방랑 시인, 가장(假裝)한 신, 오딘, 비라코챠, 에드슈로 나타난다.
<때로는 바보로, 때로는 현자로, 때로는 왕관에 미친 자로, 때로는 방랑자로, 때로는 예언자처럼 부동하는 존재로, 때로는 자비로운 얼굴로, 때로는 귀인으로, 때로는 폐덕자로, 때로는 무명인으로...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영웅이 지난 전장은, 모든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의 희생으로 삶을 영위하는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자기 삶을 영위하려면 죄악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영웅은 햄릿이나 아르쥬나처럼, 불가피한 죄악의 거부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 세상의 예외적인 존재로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고 허위적인 자기 이미지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죄악을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부류도 있는 것이다. ...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영원의 원리 안에서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 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 있는 신의 무릎에다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제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날 수 있다.
<그러므로 애착을 떠나 마당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너의 모든 일을 나에게 맡기고, 네 생각을 가장 높은 자아에 모으고, 원망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되, 흐트러지지 말고 나가 싸우라.>
이러한 자각을 반듯이 세우고, 행동거지가 조용하고 자유로우며 그 손을 통해 비라코챠의 은혜가 흘러내리는 경지에 이르면 영웅은, 그 하는 짓이 백정이건, 방랑 시인이건, 왕이건 간에, 저 장엄한 법륜을 의식할 수 있다.

그(영웅)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 <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조아르zohar>(빛 광휘)는 1305년경 스페인계의 박식한 유태인 모세스 데 레온Moses de Leon에 의해 소개된 히브리의 밀교 경전집이다. ... 2세기 갈릴리의 랍비 시므온 벤 요하이Simeon ben Yohai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시므온은 로마 군의 위협으로부터 망명도생, 12년간을 동굴 속에서 숨어 살았다. 10세기 후 이 동굴 속에서 그의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이 기록이 <조아르>경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모든 피조물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귀한다. 

조아르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세상에 현현하기 전의 각 영혼과 정신은 한 덩어리로 똬리진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땅에 내리면서 두 부분은 서로 나뉘어 서로 다른 몸에 살게 된다. 결혼할 때가 되면, 찬양할진저, 영혼과 정신을 아시는 거룩하신 이께서는 이를 예전대로 묶어주시니, 이 둘은 다시 하나의 몸, 하나의 영혼이 되어, 한 인간의 오른편과 왼편이 된다. 그러나 이 결합은 남자의 행위, 그가 세상을 사는 방법의 영향을 받는다. 그가 정결하고, 그의 행동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으면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짝이었던 영혼의 여성적인 부분과 제대로 짝하게 된다.

비슷한 사고 방식은 플라톤의 <향연>에도 등장한다. 남녀간의 사랑의 신비에 따르면, <둘은 곧 하나>라는 등식의 깨달음이 있다. 이 자각은, 우주의 만상(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는 광물까지도)은 하나라는 자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정의 체험은 우주적 체험으로 확산되고, 이 자각에 이르게 한 애인은 창조의 거울로 확대된다. 이러한 것을 체험한 남성이나 여성은 쇼펜하우어의 이른바 <도처에 널린 아름다움에 대한 앎>을 손에 넣은 셈이다. 바야흐로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고, 원하는 모습으로 둔갑해서 이 세상을 한유(閑遊)하며>, <오 놀랍도다, 놀랍도다>로 시작되는 우주적 합일의 노래를 부르는 경지인 것이다.

파르바티는 자기도 시바처럼 홀로 은거, 명상하기로 마음먹고 불같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것도 사방에다 햇볕보다 더 뜨겁게 모닥불까지 피워놓고 발가벗은 채 금식에 들어갔다. 그 아름답던 몸에서는 곧 뼈가 드러났으며 곱던 피부는 나날이 거칠어져 갔다. 머리카락은 뒤헝클어져 부시시했고, 촉촉하던 눈은 햇볕에 짓무르기까지 했다. 

파르바티가 대답했다.
[나는 지고의 존재 시바를 만나고자 합니다. 시바는 고독과 흔들리지 않는 집중의 신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같은 고행으로 그분의 심적 균형을 깨뜨리고 나를 사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자 청년이 말했다.
[시바는 파괴의 신입니다. 시바는 세계의 파괴자입니다. 시바가 좋아하는 것은, 시체의 악취가 풍기는 무덤 안에서 명상하는 것입니다. 그는 썩은 시체를 좋아합니다. 썩은 시체는 그의 살벌한 가슴과 같은 것입니다. 시바의 옷은 살아 있는 뱀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시바는 가난뱅입니다. 더구나 시바의 근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처녀가 대답했다.
[그분은 당신과 같은 인간의 마음 저쪽에 있습니다. 가난뱅이인지는 모르나 그분은 부의 원천입니다. 무서운 분인 동시에 자비의 근원이십니다. 뱀으로 만든 옷이든 보석으로 수놓은 옷이든, 입는다면 마음대로 벗기도 할 것입니다. 비실재의 창조자이신데 근본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시바는 내 사랑이십니다.]
그러자 청년은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바로 시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