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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 향연

David Teniers II :  Menagerie: wachtkamer met apen verkleed als soldaten

 

199 자네는 변함이 없군, 아폴로도토스. 자네는 변함없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네. 내가 아는 한에서 자네는 소크라테스를 제외하고는 자네를 비롯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불쌍하다고 믿고 있네. 자네가 어디서 광신자라는 별명을 얻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자네의 말에는 언제나 광기가 있네. 

 

205 나는 소크라테스 선생님까지 포함한 것은 아닐세. 적당히 마시든 많이 마시든, 그분에게는 마찬가지야. 그리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분은 만족하실 거야.

 

211 (파이드로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의 수는 적더라도 그들이 힘을 합쳐 싸운다면 실제로 온 세계를 패배시킬 것이네.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자기 위치를 이탈하거나 무기를 버리는 것을 그의 다른 어떤 동료보다도 자신의 애인이 보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네. 이런 행동을 보이기보다는 그는 오히려 몇천번이라도 죽으려고 할 것이네.

 

217 (파우사니아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애인을 얻기 위한 아주 이상한 행동, 다른 목적으로 했더라면 가장 가혹한 비난을 받았을 행동을 관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찬양하기도 한다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돈을 얻거나 공직을 얻거나 또는 어떤 다른 권세의 자리를 얻을 목적으로 애인이 그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한 것과 똑같은 행동을 했다면, 즉 그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애걸하고 빌고 엄숙한 약속을 하고 문간에 눌어붙어 있고 어느 노예도 생각할 수 없는 천한 일을 자진해서 한다면, 그는 적들과 친구들한테서 그러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제지를 받을 걸세.

 

219 나쁜 사람은 보통의, 또는 저속한 애인, 즉 영혼보다는 오히려 육체를 사랑하는 애인이라네. 그가 사랑하는 것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지. 그가 사랑하던 육체적인 아름다움의 꽃이 시들기 시작하자마자 그는 ‘마치 꿈처럼’ 사라져버리며, 그의 온갖 고백과 약속은 무와도 같다네. 그러나 고상한 천성을 가진 애인은, 그가 집착하는 것이 항구적인 것이기 때문에 평생 동안 애인에게 충실하다네.

 

224 헤라클레이토스가 ‘통일체는 변화함으로써 그 자체와 일치한다’고 말했다는 것은 우주와 우주 안의 사물은 정반대의 긴장이 동시에 작용함으로써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그의 이론을 가리킨 것이다. 이 진리에 대해서 그가 즐겨 든 예가 활로서, 활의 경우에는 활시위와 줄이 동시에 정반대 방향으로 당겨지게 된다.

 

241 (아가톤) 그가 수동적이라고 하더라도 폭력이 그에게 가해졌기 때문은 아니네. 폭력은 에로스에게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라네. 또한 에로스가 능동적인 때도 그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네.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이 에로스에게 즐거이 복종하기 때문이지. 

게다가 에로스는 자제력이 강하네. 자제력이 쾌락과 욕망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 또한 어떤 쾌락도 에로스보다 강하지 못하다는 것도 인정한다네. 모든 쾌락이 에로스보다 약하다면, 에로스는 쾌락의 지배자여야하고, 쾌락은 에로스의 신하여야 하겠지. 그러므로 에로스는 탁월한 자제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네.

 

250 (소크라테스) 그러면 사랑의 경우에도 아직은 우리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거나 또는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대상일 것일세.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현재 받고 있는 축복을 앞으로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 문제일 거야.

그렇다면 이러한 사람, 그리고 욕구를 느끼는 모든 사람은 그의 세력 속에 들어와 있지 않거나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을 욕구하며, 욕구와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성질은 그 사람이 현재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네.

그러면 우리가 합의한 점들을 요약해 보세. 첫째는 에로스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대상은 현재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던가?

신들의 분쟁은, 추한 것에 대한 사랑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 의해 진정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생각되네. 그렇지 않던가?

만일 그렇다면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사랑할 것이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에로스는 현재 그에게 결여되어 있어서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사랑한다는 점에 우리는 동의했네.
그렇다면 에로스에게는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고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되겠지?

 

253 ‘무슨 말씀입니까, 디오티마?’라고 나는 말했네. ‘에로스는 추하고 악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런말은 하지 말아요’라고 그녀는 대답했네. ‘아름답지 않은 것은 반드시 추하다고 생각하나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면 지혜에 속하지 않는 것은 모두 무지에 속합니까? 지혜와 무지의 중간에 있는 마음의 상태를 모르나요?’
‘무슨 말씀입니까?’
‘그 이유는 말하지 못하면서도 참된 확신을 갖는 경우를 말합니다. 분명히 당신은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이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하겠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불합리한 것에는 이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지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입니다. 진리를 적중시키고 있는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무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사실은 참된 확신을 가졌다는 것은 방금 내가 말한 대로 지혜와 무지의 중간 상태입니다.’
‘그 점은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추하고, 선하지 않은 것은 악하다고 주장하지 마요. 에로스는 선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기 때문에 에로스는 추하고 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당신이 인정한 대로, 에로스는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의 중간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257 그는 획득한 것을 언제나 상실하고, 그는 부자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으며, 또한 현명하지도 않고 무지하지도 않아요.

이 문제에서 진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신도 애지자가 아니고 현명하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신은 이미 현명하기 때문이지요. 만일 현명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도 이 말은 해당됩니다. 한편 무지한 자도 지혜를 사랑하고 현명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무지가 귀찮은 것은 다음과 같은 점 때문입니다. 즉 아름다움도, 선함도, 지성도 갖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만족하고, 그에게 결여된 것이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결여되어 있다고 믿지 않는 것을 욕구하지도 않습니다.

 

262 좀 더 쉽게 말씀드리지요, 소크라테스. 모든 사람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생식의 충동이 있으며, 그들이 성숙하면 아이를 낳고 싶다는 충동을 자연히 느낍니다. 그러나 아름다움 속에서만 이 욕망은 이루어지고 추한 것 속에서는 이 욕망은 결코 달성되지 않지요. 생식이란 전적으로 성스러운 것입니다. 잉태와 출산을 통해서 가사적인 존재는 불사성과 접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부조화 속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추한 것은 신적인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신적인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칼로네(아름다움의 여신)가 출산을 주재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욕망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아름다운 것과 접촉했을 때 편안하고 행복하고 아늑한 마음을 갖고 생식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그러나 추한 것이 가까이 있을 때 그 효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는 낯을 찡그리고 우울해지고 주춤 움츠리고 추한 것과 일체가 되지 못하고 충만한 욕망을 고통스럽게 억제합니다. 그러므로 능동적인 욕망을 갖게 된 사람은 아름다운 것에 몹시 이끌리게 됩니다. 아름다운 것을 갖게 되면 그 아름다움이 그를 고통에서 해방해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의 대상은 아름다움이 아니랍니다. 

그 대상은 아름다운 것 안에서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생식이 사랑의 대상일까요? 가사적인 존재가 획득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생식은 영원성과 불사성에 가장 접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합의한 대로 사랑의 목적이 선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필연적으로 선과 함께 불사성을 욕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지금까지 한 논의는 사랑이란 선에 대한 사랑인 동시에 불사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짐승이든 새든 간에, 모든 동물의 행동을 보십시오. 생식을 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힐 때마다 동물은 사랑의 열병을 앓습니다. 첫 번째 목적은 서로 결합하려는 것이고, 두 번째 목적은 새끼를 얻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짐승은 승산이 거의 없는 경우에도 싸움을 사양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며, 새끼의 생존을 위해서 스스로는 굶주림을 즐거움으로 알고 그 밖의 어떤 희생이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당신은 이러한 행동이 이성적인 숙고의 결과라고 할지 모르지만, 짐승의 경우에는 이러한 사랑의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나에게 말해줄 수 있나요?

 

267 그러나 그 창조적 욕구가 영혼에 속하고 육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신을 통해서 자손을 남기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영혼에도 자손을 만들고 출생시키려는 본성이 있는 것이지요. 영혼의 자손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으시겠지요. 그것은 지혜와 덕 자체입니다. 모든 시인과 어떤 새로운 것을 발명한 기술자들은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에요.

 

269 이 목표에 이르는 올바른 길을 찾으려는 사람은 젊었을 때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한 명상에 열중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해요. 그리고 안내자의 적절한 인도를 받는다면, 그는 우선 한 특정한 아름다운 사람과 사랑에 빠져야 하고 그 사람과 협력하여 고상한 감정을 가져야 하지요. 후에 그는 한 사람의 육체적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흡사함을 알게 될 것이고, 외형적 아름다움을 그의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모든 육체에 나타난 아름다움은 동일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에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면, 그는 모든 육체적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한 특정한 사람에 대한 강렬한 정열에서 해방될 거예요. 이러한 정열은 더 낮은 것이고 사소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에요. 다음 단계는 그가 육체의 아름다움보다도 영혼의 아름다움을 더 가치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 결과로 육신은 별로 아름답지 않지만 영혼은 유덕한 사람을 만나면 그는 이 사람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게 되고, 이 젊은이의 향상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렇게 해서 그는 활동과 제도 속에 있는 아름다움도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여기서도 아름다운 모든 것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육체적 아름다움이란 전체적으로 비교적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그는 품행에서 학문으로 나아가게 되고, 학문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며, 그 결과 그는 더 넓은 의미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었으므로, 그는 아름다움의 개별적 예에 대한 저열한 헌신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고, 오히려 새로이 주목하게 된 아름다움의 광대한 바다를 으시함으로써 지혜에 대한 풍요한 사랑 속에서 아름답고 훌륭한 감정과 사상을 갖게 될 것이고, 마침에 이러한 경험에 의해 그의 마음의 능력이 강화되고 증대되어서 하나의 독특한 학문을 알게 됩니다. 이 학문의 대상은 아름다움이고 이 아름다움에 대해 나는 말하려고 해요. 그런데 여기서 가능한 한 최대의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요청해야하겠습니다.

사랑의 신비에 이 정도까지 접근하고 올바른 순서로 아름다움의 예들을 생각해온 사람들은 그의 순례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갑자기 정말로 신기한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거예요. 소크라테스, 이것이 지금까지 기울여온 온갖 노력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우선 영원한 것이에요. 그것은 새로 생기지도 않고 없이지지도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지요. 둘째로 이 아름다움은 부분적으로는 아름답고 부분적으로는 추한 것도 아니고, 또한 그것을 보는 사람에 따라 여기서는 아름다우나 저기서는 추한 것도 아니에요. 또한 이 아름다움은 얼굴이나 손이나 그 밖의 다른 육체적인 것의 아름다움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사상이나 학문의 아름다움으로 나타나지도 않으며, 그 자체가 아닌 어떤 다른 것 – 그것이 생명체든, 지구든, 하늘이든, 또는 그 밖의 어떤 무엇이든 간에 - 에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움으로 나타나지도 않아요 이 아름다움은 절대적이고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고 독특하며 영원하고 모든 다른 아름다운 것은 이 아름다움을 분유(分有)하고 있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생멸하더라도 아름다움에는 결코 증감이 없고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될 거에요.

 

271 순수하고 혼합된 것이 없는 절대적 아름다움 자체를 본 사람, 인간의 사로가 색깔과 보잘것없는 폐물에 의해 더럽혀진 아름다움 대신에 홀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신적인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의 지복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절대적 아름다움을 보는 곳에서는 진리의 반영이 아니라 진리 자체와 접촉하기 때문에, 선의 영상이 아니라 참된 선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당신은 모르나요? 그리고 참된 선을 알고 그러한 덕을 쌓았기 때문에, 그는 신의 사랑을 받고, 만일 인간이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영생할 특권을 갖게 될 거에요.

 

280 (알키비아데스) 선생님의 명령대로 해야 한다는 결론에 반대하는 논의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선생님의 곁을 떠나면 대중의 유혹에 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도망친 노예처럼 행동하고 달아나는 것이며, 선생님을 볼 때마다 선생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287 이 일이 있은 다음에야 우리는 함께 포테이다이아의 전투에 나갔고, 우리는 한솥밥을 먹었다네. 이 전투에 대해 우선 말할 것은,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점에서는 이분은 나보다 뛰어날 뿐 아니라, 군대 전체에서 이분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라네. 전쟁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우리가 포위당해서 식량 없이 지내게 되었을 떄, 누구도 이분만큼 잘 참지 못했다네. 또한 보급이 충분할 때는 이분만큼 잘 먹는 사람도 없었다네. 특히 술에서는, 이분은 강권해서 어쩔 수 없을 때만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이분을 당할 사람이 없었지. 그런데도 가장 놀라운 일은 이분이 취한 것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네. 그곳의 겨울은 아주 추웠는데도 이분은 추위를 이겨내는 데도 비범했다네. 특히 몹시 추워서 누구나 밖에 나가려고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밖에 나가게 되면, 괴상할 정도로 두툼하게 입고 모전과 양피로 발을 감쌀 때도, 선생님은 평상시에 입는 옷 그대로 발을 싸매지도 않고 나갔으며 신발을 신고 있는 사람보다도 더 쉽게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 다녔다네. 병사들은 이분이 병사들을 멸시한다고 생각하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지. 어느 이른 아침에 문득 이분에게 어떤 문제가 떠올라서 이분은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똑같은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자, 이분은 포기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서 그 자리에 서 있었지. 그렇게 하고 서 있는 것을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정오쯤이었고, 사람들은 이분이 이른 아침부터 깊은 생각에 잠겨서 서 있다고 수군거렸다네. 마침내 저녁 식사가 끝나고 초저녁이 되자 이오니아에서 온 사람들은 침구를 밖으로 갖고 나가서 서늘한 곳에서 잠도 잘 뿐 아니라 이분이 밤새도록 그렇게 서 있는지도 지켜보기로 했다네. 이분은 새벽이 오고 해가 뜰 때까지 그곳에 서 있었네. 그러고는 태양을 향해 기도를 하고는 그 자리를 떴지.

 

작품해설 310 현존재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 따라서 자유로운 결단을 위해서는 죽음도 각오한다는 것, 여기에 진정한 용기가 성립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용기에는 무한한 책임이 따른다.

 

313 현실도피는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을 포기하는 것. 현실도피는 위험이나 공포에 단호하게 직면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힘의 발휘가 아니라 반대로 위험감 또는 공포감의 소산인다. 현신실을 없는 것으로 돌려버리려는 태도이기 때문에 대결할 대상이 없다. 투쟁 없이 패배를 자인하는 태도인 것이다.

 

316 비겁한 자는 결단을 회피할 것이며 만용밖에 모르는 자는 결단하기 전에 행동부터 시작할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성실을 다 기울였다는 자신, 자신의 선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한다는 신념, 그것이 인류를 위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 용기없는 자라면 이러한 결단에 도달하기 전에 절망하고 말 것이며 오히려 이러한 결단을 요구하는 현실을 외면하고 현실 도피라는 안이한 처세술을 택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용기는 근원적으로 현실을 긍정하는 용기일 것이다. 이러한 용기의 구현을 우리는 소크라테스에게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