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A New Earth: Awakening Your Life's Purpose)
에크하르트 톨레
류시화 옮김
Gillis d'Hondecoeter: Paradise
다른 사람의 에고에 대응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인간의 집단적 에고를 소멸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자신이 여전히 원한을 품고 있는지, 자기 삶에서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 누군가가, 즉 '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 그 원한을 계속 살아있게 하는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들에 대한 신체적 반응인 감정을 느껴야 한다. ... 원한이 거짓 자아의식을 강화시켜 에고를 제자리에 유지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음을 당신이 보게 될 때, 용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 "원수를 용서하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에고가 지배하는 주된 구조 중 하나를 해체하라는 의미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만큼 에고를 더 강화시켜 주는 것은 없다. ... 에고는 옳기 위해 누군가를 틀리게 만들기를 매우 좋아한다. ... 자신이 옳다는 주장은,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해 자신을 상상 속에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에고는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인다. 감정이 일어나고, 방어 심리와 심지어 공격성까지 나타난다. 당신은 진실을 방어하려고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경우든 진실은 방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빛도 소리도 당신과 누군가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이 차원과 연결될 때 당신의 모든 행동과 관계들은 당신이 깊은 내면에서 감지하는 모든 생명과의 일체감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율법, 계명, 계율, 규정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과 단절된 사람들, 자기 내면의 진리와 분리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라고 성 어거스틴은 말했다. 언어로는 이것 이상으로 진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탐욕, 이기심, 착취, 잔인함, 폭력이 여전히 이 해성 도처에 만연해 있다. 그것이 마음 밑바탕에 있는 기능장애 혹은 정신적 질환의 개인적, 집단적 표현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을 개인적인 문제로 받아들이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개인과 집단에 대한 개념적인 정체성을 만들어 "그는 이런 사람이다. 그들은 이런 인간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 상대방 안의 무엇에 대해 당신은 가장 기분 나빠하고 가장 불쾌해하는가? ... 그것이 무엇이든, 상대방 안에서 당신이 가장 분개하고 강하게 반응하는 특성이 당신 자신 안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에고의 한 가지 형태일 뿐 그 이상이 아니며, 전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악을 뿌리 뽑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신이 맞서 싸우고 있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이 바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전쟁은 마음의 방식이며, ... 악으로 인식된 상대방을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든다. 설령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전과 동일하거나 종종 더 나빠진 새로운 적, 새로운 악을 만들어 낸다.
일단 에고의 정체를 알면,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 것도 한결 쉬워진다. 그것을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불만을 품거나 책임을 묻거나 비난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누구도 잘못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에게 있는 에고일 뿐이다. ... 모두가 똑같은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알면 자비의 마음이 일어난다.
에고의 깊은 곳에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 그 환영의 자아를 강화하려는 강한 무의식적 충동이 있다. ... 에고의 숨은 동기는 언제나 같다. 눈에 띄고 싶고, 특별해지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힘을 갖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더 많이'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은 남들과 별개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한다. 즉, 대립하는 상대방, 적이 필요하다.
에고의 행동을 지배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존재하지 않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이다. 결국 에고의 모든 행동은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가까운 관계, 새로운 소유물, 이런저런 성취들로 일시적으로 두려움을 덮어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오직 '나는 누구인가'의 진리만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왜 두려워하는가? 에고는 형상과의 동일화에 의해 일어나지만, 깊은 바닥에서는 어떤 형상도 영원하지 않고 모두 덧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자신감 있어 보여도 에고 주변에는 언제나 불안감이 있다.
그 순간, 당신은 상대방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당신이 느끼는 그 만족감은 에고의 만족감이며, 더 강한 자아의식을 느끼는 데서 온다. 많은 사람들이 잡담에 중독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잡담은 종종 다른 사람들을 향한 악의적인 비난과 심판의 요소를 담고 있으며, 그것 역시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상상을 통해 에고를 강화한다. 만약 누군가 자신보다 더 많이 갖거나 더 많이 알거나 더 많이 할 수 있다면 에고는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그때 에고는 상대방의 소유물, 지식, 능력의 가치를 어떻게든 깎아 내리고 비난하고 하찮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한다. 아니면 만약 그 사람이 세상 사람들이 중요한 인물이라고 우러러보는 사람일 경우에는 전략을 바꿔서, 경쟁하는 대신 그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을 강하게 보이려고 할 것이다.
자신의 역할과 동일화될수록
관계의 진정성은 사라진다.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당신의 '순수한 있음'을 알아볼 때
그 알아봄이 이 세상 속으로
두 사람을 통해
더 많은 '순수한 있음'의 차원을 가져다준다.
일단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시작하면 끝없이 연기를 계속할 수 없다. 역할이 벗겨지면 무엇을 보게 되는가?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 존재의 진정한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덮고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 즉 연출된 역할이 벗겨진 적나라한 에고, 그것의 고통체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분노로 변한 좌절된 욕구가 그곳에 있다. 그 분노는 거의 대부분 배우자나 연인을 향해 있다. 흔히 말하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사실은 에고의 욕구와 필요성을 강화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당신은 상대방에게,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에 중독된다. 그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진정한 사랑과는 관계가 멀다.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과 더 많이 동일화될수록 관계의 진정성은 그만큼 사라질 수밖에 없다.
당신의 마음이 당신 자신에 대해 만든 개념적 이미지가 당신이 창조해 낸, 그 상대방에 대한 개념적 이미지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도 아마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에고에 바탕을 둔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는 실제로는 마음이 만들어 낸 네 개의 개념적 정체성들의 관계인 셈이다. 그 정체성들도 결국은 허구이다.
에고의 방식은 아무리 오래 계속된 것일지라도 당신이 그것들에 내면적으로 대항하지 않으면 거의 기적적으로 소멸될 때가 있다. 대항은 에고에게 다시 살아나는 힘을 줄 뿐이다. 하지만 비록 그들의 에고적 방식이 소멸되지 않는다 해도 부모의 행동에 하나하나 반응할 필요 없이, 즉 그것을 그들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다.
고통은 고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의식의 진화와 에고의 불태움이 그것이다. 십자가 위의 사람이 그 원형적인 이미지이다. 그는 모든 남성과 모든 여성이다. 당신이 고통에 저항하는 한, 의식의 진화와 에고의 불태움은 더디게 진행된다. 그 저항이 불태워 버려야 할 에고를 더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을 받아들일 때,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그 과정이 가속화된다.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아이와 부모 등 다른 누군가의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고통을 경험할 때,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고통의 불꽃은 의식의 빛이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때 그 다른 사람의 '다름'은 순전히 인간적인 영역, 형상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환상임이 밝혀진다.
역할 연기의 포기: 어떤 상황에서든 역할과 동일화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 각자가 이곳에서 배워야 할 삶의 예술이고 가장 중요한 배움이다. 만약 어떤 행동이 자신의 역할 정체성을 유지하거나 강화하고 따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다만 행동 자체를 위한 것이라면, 그때 무엇을 행하든 간에 당신은 매우 강력해진다.
자신이 하는 일에 예외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완전히, 혹은 거의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들의 일은 하나의 영적 수행이 된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과 하나가 되고, '지금'과 하나가 되며, 자신이 봉사하는 사람들이나 과제와 하나가 된다. 이러한 사람들과 상호작용할 대는 무거운 에고를 지닌 사람들조차 때로 긴장을 풀고 방어 심리를 내려놓으며 역할 연기를 중단한다.
에고의 핵심에 있는 '아직 충분하지 않아.'라는 무의식적인 느낌은 다른 누군가의 성공을 볼 때마다 마치 그 성공이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빼앗아 간 것인 양 반응한다.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한 분함이 자신의 성공 기회를 축소시키고 있음을 에고는 알지 못한다. 성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의 성공이라도 환영해야 한다.
병은 에고를 강하게도 하고 약하게도 한다. 아픈 육체에 대해 불평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병을 원망하면 에고는 더욱 강해진다. 한편, 정상적으로 살았을 때는 에고가 강했는데 병에 걸리면 갑자기 부드러워지고 친절해지고 한결 성품이 좋아지는 사람들이 있다. 정상적으로 살았을 때는 결코 갖지 못했던 통찰을 얻게 된 것이다.
오리의 싸움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금세 헤어져 각자 반대 방향으로 헤엄쳐 간다. 그런 후에 두 마리는 몇 차례 격렬하게 날개를 털어, 싸우는 동안 쌓인 나머지 에너지를 방출한다. 그 후 날개를 접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유히 물 위를 떠간다.
인간에게는 오래된 기억을 지속시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에너지 장 안에 오래된 감정적 고통의 축적물을 지니고 있다. (고통체, 업장)
오락과 언론과 고통체: 왜 폭력적인 영화들이 그토록 많은 관객을 끌어 모으는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인간의 불행 중독 심리를 부채질하는 거대한 산업이 있다. 사람들이 그런 영화를 보는 것은 분명 나쁜 기분이 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왜 나쁜 기분이 되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가? 물론 고통체 때문이다. 연예 오락 산업의 대부분은 고통체의 구미에 맞춘다. 즉 사건에 대한 맞대응, 부정적인 생각, 개인적인 드라마에 덧붙여 영화와 텔레비전을 통한 간접경험을 통해서도 고통체는 스스로를 재생시킨다. ... 만약 영화가 폭력을 더 넓은 맥락 속에서 보여 준다면, 즉 그 원인과 결과를 밝히고 그것으로 인해 가해자도 피해자도 얼마나 고통을 겪는가를 보여 준다면, 그 영화들은 인류의 깨어남에 중요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 뛰어난 반전 영화들은 전쟁을 미화하지 않고 그 실상을 보여 준다.
국가와 인종의 고통체: 집단적 폭력으로 고통받았거나 폭력을 저지른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보다 더 무거운 고통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더 강한 고통체를 갖는 경향이 강하다. 캐나다나 호주 같은 신생 국가들, 주변의 광기로부터 비교적 격리되어 온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는 집단 고통체가 더 가벼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독일과 일본에서는 일을 통해, 또한 몇몇 나라에서는 광범위하게 퍼진 알코올 탐닉을 통해 고통에 둔감해지려고 한다. 중국의 무거운 고통체는 널리 확산된 태극권 운동에 의해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 태극권, 기공, 요가 등 몸을 이용한 영적 수행은 ... 몸과 영혼을 분리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체를 약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인종이 가진 고통체는 ... 유대인들에게 두드러진다. ...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도 그것이 강하다. 미국 흑인에게서도 집단 고통체가 뚜렷하다. ... 이 두 인종에만 한정되지 않고 아메리카 인들의 집단 고통체가 되었다. 모든 폭력, 억압, 잔학한 행동의 결과는 언제나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 모두에게 미친다.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의 내면 상태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에 의해사만 그 고통체 너머로 갈 수 있다. 남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정당한 상황에서도 남을 비난하는 한, 당신은 자신의 생각으로 고통체에게 계속 먹이를 주면서 에고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행성의 악의 가해자는 오직 하나이다. 바로 인간의 무의식이다. 그 깨달음이진정한 용서이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얼굴을 세상에 보여 주려고 하든 관계없이,
당신의 마음 상태와 감정 상태를 숨길 수는 없다.
누구든지 자신의 내면 상태에 해당하는
에너지 장을 내뿜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상대방이 내뿜는 에너지를 감지한다.
상대방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그것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고통체가 활성화된 두 명의 운전자가 같은 시각에 교차로에서 만나면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몇 배로 증가하낟. 두 사람 모두 무의식적으로 사고가 일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더 높은 시각에서 바라보면 우주의 진화에서 이탈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무의식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고통까지도 진화 과정의 일부이다. 끝없는 고통의 악순환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면 당신은 깨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 넓은 그림에선느 고통체 역시 그 나름의 존재 가치가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이며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면 조건 없이 "예."라고 말할 수 있고, 더 이상의 불필요한 불행을 창조하는 일도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내면에 존재하는 저항이 사라지면 삶 그 자체가 당신에게 힘을 가져다준다.
무겁고 자주 활성화되는 고통체를 지닌 사람은 걸핏하면 갈등 상황에 휘말린다. ... 그런 활동적인 고통체를 가진 사람과 맞닥뜨리게 되면 반응하지 않기 위해 매우 강하게 현재의 순간에 존재한 필요가 있다.
어떤 것보다도 마음의 평화가 중요하다면, 그리고 정말로 자신은 '작은 나'가 아니라 큰 영혼이라고 안다면, 도전해 오는 사람들과 상황에 직면해도 반응하지 않고 완벽하게 깨어 있게 될 것이다. 상황에 저항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면 깨어 있음으로부터 자연히 반응이 나온다. 당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나인 '작은 나'가 아니라 진정한 나인 '의식'이 반응할 것이다. 그 반응은 힘이 있고, 효과적이며, 어떤 사람도 어떤 상황도 적으로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시각이 좁고 제한되어 있으며 자기중심적일수록, 당신은 타인에 대해서도 자기중심적이고 무의식적인 부분에만 눈이 가고 거기에 더 반응한다. 상대방의 '잘못',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잘못이라고 당신이 해석하는 부분을 상대방 그 자체로 본다. 즉, 상대방의 에고만을 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에고를 강화한다. 그 사람 안의 에고를 '뚫고'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에고 '그 자체'를 본다. 그러면 그 에고를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당신 안의 에고이다.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곧 후하게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
당신을 에워싼 삶의 충만함을 보라. 피부에 닿는 햇살의 따스함, 꽃가게 앞에 놓인 꽃들의 아름다움, 깨물면 과즙 풍부한 과일,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풍요 속에 젖는 즐거움 등 모든 걸음마다 삶의 충만함이 있다.
"눈이 내릴 때, 모든 눈송이가 저마다 정확히 자기 자리에 내린다." 생각을 통해서는 이러한 더 높은 질서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내용물에 대한 것인 반면, 더 높은 질서는 형상 없는 의식의 영역, 우주 지성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 어떤 작은 사건조차도 문자 그대로 무한한 인과 관계 속에서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무궁무진한 방식으로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어떤 사건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알고 싶다면 우주의 창조까지 되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우주는 혼돈 상태가 아니다. '우주cosmos'라는 단어는 질서, 조화를 의미한다. 그 질서는 인간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언뜻 들여다볼 수는 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생의 후반기에 행한 어느 강연에서 "나의 비밀을 알고 싶은가요?"하고 물어 청중을 놀라게 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이 나의 비밀입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걱정하지 않습니다." ... 자신의 내면이 일어나는 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면적으로 무저항의 상태라는 뜻이다. 마음속에서 좋다거나 나쁘다는 분류표를 붙이지 않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 있게 함을 의미한다. ... 지금이라는 순간과의 내적인 조화를 기초로 행동할 때 그 행동에는 삶 그 자체의 지성의 힘이 작용한다.
일단 현재의 순간과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고 결정하면, 먼저 당신이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것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친구답게 환영하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때 삶 쪽에서도 당신을 향해 우호적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협조적이 되고 상황도 협력적이 된다. 한 가지 결정이 당신의 현실 전체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 결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삶의 자연스러운 방식이 될 때까지.
에고로부터의 자유가 미래의 목표일 때, 당신은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게 되고, 더 많은 시간은 에고의 더 커짐을 의미한다. 영적인 추구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습을 바꾼 에고가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꿈꾸는 자와 꿈: 무저항은 우주의 가장 큰 힘을 여는 열쇠이다. 그 힘에 의해 의식, 즉영혼이 형상에 갇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형상의 절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항하면 당신 자신의 형상 정체성인 에고를 포함해 세상과 세상의 일들이 실제보다도 더 현실성 있어지고, 더 견고하고 더 영속적으로 보인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형상들의 놀이를 생존 경쟁으로 오해하고, 그 오해가 당신의 인식일 때 그것은 현실이 된다.
... 그의 전동휠체어가 통과할 수 있도록 문을 잡아주는 동안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이 무척 맑다는 것에 나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불행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저항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것을. 그는 있는 그대로를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 그의 이름은 스티븐 호킹이었다. ... 자신의 삶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는 이제는 음성합성장치의 도움을 빌어 이렇게 대답했다.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멍청이'라는 말을 듣고서 되받아서 소리를 지르는 지극히 평험한 행동도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에고 복구 장치이다. 가장 흔한 에고 복구 장치 중 하나는 화내는 일로, 일시적이지만 강력한 에고 확대 효과가 있다. ... 강력한 영적 실천 중 하나는 에고의 작아짐이 일어날 때 그것을 복구하려는 시도 없이 의식적으로 작아진 채 두는 것이다. ...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비판받거나 비난받거나 험담을 들었을 때 곧바로 반박과 자기방어를 시도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이미지가 축소되도록 놓아두고, 그때 자신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것에 깨어 있으라.
자신이 특별히 아무 존재도 아님에 만족하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우주의 힘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에고에게 약함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유일하게 진정한 힘이다. ... 이 실천의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자의식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과시하거나 돋보이려 하거나 특별한 존재가 되려 하거나 강한 인상을 주려고 하거나 관심을 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두가 의견을 내세울 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자제하고, 이때 그것이 어떤 느낌인가를 관찰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런가?" 마음의 저항을 하지 않는 자세. "아마도." 판단하지 않는 지혜. 반지 이야기 - 모든 것의 무상함. 저항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 이 세 가지는 진정한 자유와 깨달음의 세 가지 측면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변화가 불가피함을 알고 받아들인다면, 즐거운 것을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즐거움이 이어지는 동안 누릴 수 있다.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갇히는 대신,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한 단계 높은 시점을 가질 수 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는 생각 위로 올라가지 않으며 생각 아래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서 텔레비전은 술이나 마약과 같은 류이다. 어느 정도는 마음에서 해방시켜 주지만 의식의 상실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단순한 것들의 가치를 알고, 혼자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애정을 가지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능력 속에는 공통된 요소가 있다. 이 공통된 요소는 배후에서 이것들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충만감, 평화, 그리고 생동감이다.
시인과 현자들은 진정한 행복- '순수한 있음'의 기쁨 -이 단순하고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 것들 속에 있음을 관찰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자신들에게 중요한 일이 일어나기를 끊임없이 찾아다니느라 사소한 것들을 계속해서 놓친다. ... 니체는 깊은 고요의 드문 순간을 경험했을 때 이렇게 썼다. "행복을 위해서는, 행복해지는 데는, 얼마나 작은 것으로도 충분한가! 더할 나위 없이 작은 것, 가장 미미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한 줄기 미풍, 찰나의 느낌, 순간의 눈빛... 이 작은 것들이 최고의 행복에 이르게 해 준다.고요하라."
상황에 맞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녹아들어가 하나가 되면 해결책이 상황 자체로부터 나타난다. ... 그때 만약 행동이 가능하거나 필요하면 당신은 행동을 취할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올바른 행동이 당신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단지 지엽적으로만 자각한다. 주변 환경이 익숙한 것일 때는 특히 그렇다. 관심의 대부분은 머릿속 목소리에 흡수된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나 외국을 여행할 때 더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런 시간들에는 생각보다 감각기관을 통한 의식, 즉 경험이 의식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이 현재의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시간조차도 머릿속 목소리에 완전히 소유당해 있는 사람들도 있다. ... 그들은 실제로는 아무 데로도 가지 않은 것이다.
"가능한 한 자주, 기억날 때마다 자신의 호흡을 자각하십시오. 이것을 1년 동안 계속하십시오. 그러면 여기에 적힌 모든 과정에 참가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숨쉬기는 무료입니다." ... 한 번의 호흡이 당신이 알아차릴 필요가 있는 전부이며, 당신이 진정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전부이다. 나머지는 기억과 기대이다. ... 당신이 해야만 하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긴장도 노력도 개입하지 않는다. 또한 호흡 사이의 짧은 멈춤을 주목하라. 특히 숨을 다 내쉬고 난 뒤 다시 들이쉬기 전의 고요한 지점을. ... 호흡을 의식할 때마다 당신은 절대적으로 현재의 순간에 존재한다. 당신은 완전히 깨어 있고 고도로 민감하다. ... 완전히 현재의 순간 속으로 들어오는 것과 의식의 잃음 없이 생각을 멈추는 이 두 가지가 사실은 하나이며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공간 의식이 등장한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너무도 마음을 빼앗기고 머릿속 목소리와 너무도 동일화된 나머지, 자신 안의 살아 있음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그때 당신은 내부의 그 자연스러운 행복 상태를 대체할 다른 것을 찾기 시작한다. ... 지속적인 불안감을 덮어 줄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한다. 약물 ... 음악 ... 위험천만한 행위, 과도한 성행위에 빠진다. 인간관계의 드라마도 살아 있는 느낌의 대체물로 이용된다. 마음 밑바닥에 있는 지속적인 불안감을 가리기 위해 가장 많이 매달리는 것이 남녀 관계이다. ... 당연히 그런 기대는 '실망'으로 변하는 것이 가장 빈번한 경험이다. 그 불안감이 다시 표면으로 떠오르면, 사람들은 대개 상대방에게 그 불안감의 책임을 묻는다.
두세 번 의식적인 호흡을 해 보라. 몸 전체에 퍼져있는 미묘한 생명감을 감지할 수 있는가? 내부로부터 자신의 몸을 느낄 수 있는가? 손을 느끼고, 팔, 발, 다리를 느껴보라.
우리는 육체를 하나의 형상으로 지각하고 형상으로 생각하지만, 그중 99.99퍼센트가 실제로 텅 빈 공간이다. ... 많은 점에 있어서 육체는 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이다. ... 형상인 당신의 육체는 본질적으로는 형상이 없다. 그것은 내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일상의 삶 속에서 가능한 한 자주 내부의 몸을 자각하고, 그럼으로써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 좋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잠시 멈추고 하늘과 나무와 꽃과 연인 또는 아이를 바라볼 때, 그것과 함께 자기 내면의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패턴들 중 몇 가지
자신이 한 것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화가 나거나 마음이 상하는 것.
자신의 문제나 병에 대해 말하거나 소란을 피움으로써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
아무도 묻지 않았고 상황에 변화를 일으키지도 못하는데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
다른 사람 자체보다도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를 더 신경 쓰는 것. 즉, 다른 사람을 자기 에고의 반영이나 에고 강화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
소유물, 지식, 외모, 지위, 신체적 힘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인상을 심으려고 노력하는 것.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한 분노에 찬 반응을 통해 에고를 일시적으로 부풀리는 것.
일들을 개인적으로 해석해 감정이 상하는 것.
마음속에서 혹은 입 밖으로 도움이 안 되는 불평을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은 옳고 상대방이 틀린 것으로 만드는 것.
주목받기를 원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
이러한 패턴을 탐지했다면, 그 패턴을 버리면 어떤 느낌이 들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관찰한다. 단지 그 패턴을 중단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형상 차원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덜 강조하는 것은 의식을 생겨나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자신의 형상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중단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당신을 통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지 발견할 수 있다.
"고요는 신이 말하는 언어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나쁜 번역이다." 삶 속에서 고요와 마주칠 때마다 그 고요를 알아차리면 자기 내면의 형상도 없고 시간도 없는 차원, 생각 너머와 에고 너머에 있는 차원과 연결될 수 있다.
... 가장 단순한 행위라도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깊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주된 목적은 전화번호부를 넘기는 일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이 전화번호를 찾는 것입니다. 방 안을 걷는 주된 목적은 방 안을 걷는 일입니다. 이차적인 목적은 방 반대편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책을 집어드는 순간, 그것이 당신의 주된 목적이 됩니다. ... 당신의 내면적인 목적이 시간을 무효화시키는 반면에, 외부적인 목적은 반드시 미래를 필요로 하며 시간 없이는 외부적인 목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이차적입니다. 당신이 불안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은 이미 외부적인 목적이 지배적이 되어 내면적인 목적을 시야에서 놓쳐 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의식 상태가 주된 것이며, 다른 모든 것은 이차적인 것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적인 목적에 진실함으로써 삶에 진실해야 합니다.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 당신이 하는 일들 속에 온전히 존재할 때, 당신의 행위에는 영적인 힘이 충만해집니다. ... 오직 '어떻게 하는가'만 변할 것입니다.
일터에서나 어디에서든 사람들과 만날 때 상대방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당신은 개인으로서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의 장으로서, 깨어 있는 '현존'으로서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애초의 이유, 즉 물건 사고팔기와 정보 교류 등은 이차적인 것이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알아차림의 장, 그것이 만남과 교류의 첫째 목적이 됩니다. ... '순수한 있음'의 차원을 알고 그것이 주된 것이 되었을 때, 행동은 더 쉬워지고 더 강력해집니다.
성공은 현재 순간의 성공밖에 없습니다. ... 당신이 하는 일 속에,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행위일지라도, 하나의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깊이가 있다는 것은 조심성과 주의력, 즉 알아차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깊이를 가지려면 '이 순간에 존재함'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그 불확실성과 함께 살 수 있고, 그것을 즐기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불확실성과 편안해지면 삶에 무한한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것은 더 이상 두려움이 당신이 하는 일의 지배적인 요소가 아니게 되고, 변화를 시작하기 위한 행동이 그것에 더 이상 방해받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철학자 타키투스는 "안정을 위한 욕망은 모든 위대하고 고귀한 진취적인 일에 저항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두려움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받아들이면 그것은 더욱 커진 살아 있음, 깨어 있음, 그리고 창조적인 힘으로 바뀝니다.
정확히 자신이 있는 자리에 머물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을 하는가는 똑같고 '어떻게' 하는가만 변화합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도 타성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의식을 이 세상으로 가져오기 위한 완벽한 수단이며, 그래서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전체와 연결될 때, 당신은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전체의 상호연결성의 일부가 되고, 전체는 목적의 일부가 됩니다. ... 그 연결의 결과로, 자발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들, 기회를 제공하는 만남들, 우연들, 동시에 일어나는 다발적인 일들이 훨씬 더 자주 일어나게 됩니다. 칼 융은 이 동시성을 '비인과적 연결 원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현실이라는 표면 차원에서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에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표면의 세계 밑바탕에 존재하는 지성이 외부로 나타난 것으로, 마음의 이해를 뛰어넘는 깊은 연결입니다. ... 자연은 무의식중에 전체와 하나가 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2004년 쓰나미 재난에서도 야생동물에게는 사실상 피해가 없었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에서 회귀 운동이 일어날 때는, 즉 늙음과 질병, 심신의 장애, 상실, 개인적인 비극 등을 통해 형상이 약해지고 소멸될 때는 영적인 깨어남의 기회가 찾아온다.
최초국가에서 '할머니'는 위대한 존엄성의 상징이지만, 오늘날의 '할머니'는 기껏해야 귀여운 존재에 불과하다. 왜 노인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가? 늙은 나이가 되면 '행위'보다 '있음'이 강조되는데, 우리의 문명은 '행위'에 몰두해 순수한 '있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창조 행위는 고도의 집중력이 따라야 하지만 그것은 '힘든 노동'도 아니고 스트레스도 아님을 배우게 된다. 곧 알게 되겠지만 스트레스와 고도의 집중력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싸움이나 스트레스는 에고가 돌아왔다는 신호이다. 장애물과 맞닥뜨렸을 때 부정적인 반응이 일어나는 것처럼. ... 반발력을 일으키지 않는 유일한 행위는 모두의 선을 목표로 한 것들이다. 그런 행동은 배타적이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신의 의식 상태이다. 그 상황,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은 이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미래'의 성공은 행동이 일어나는 의식에 달려 있으며, 그 의식과 분리될 수 없다. 행동은 에고의 대응하는 힘일 수도 있고, 깨어난 의식의 깨어 있는 관찰과 관심일 수도 있다. 진정으로 성공한 모든 행동은 에고나 조건 지어진 무의식 상태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관찰과 관심의 장으로부터 나온다.
깨어 있는 행동의 세 가지 방식은 받아들임, 즐거움, 열정이다. 만일 당신이 어느 상태에도 있지 않다면, 당신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받아들임이란 지금 이 상황, 이 순간이 나에게 그 일을 요구하므로 기꺼이 그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받아들임의 상태에서 행동한다는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당신이 평화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복은 받아들임의 한 측면이다. 만약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길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면 중단하는 것이 좋다.
즐거움은 깨어 있는 행동의 두 번째 방식이다. 즐거움을 통해 당신은 우주의 창조적인 힘과 연결된다. 과거나 미래 대신 현재의 순간을 삶의 중심점으로 삼을 때, 자신이 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능력은 극대화된다. 즐거움은 '순수한 있음'의 역동적인 측면이다. 우주의 창조적 힘이 자신을 의식할 때, 그것은 기쁨으로 나타난다. ... 하는 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대신 자신의 일을 이미 즐겁게 하고 있을 때, 외부 차원에서의 확장과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그 행위를 할 때, 그리고 그 행위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닐 때, 그것이 어떤 일이든 즐거울 것이다. 사실 즐거움은 당신이 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 속으로 흘러들어 가는 강한 살아 있음의 느낌이다. 매일 반복하는 일상생활의 목록, 일터로 가고 오는 것, 시장 보기, 빨래하기, 지루해하거나 스트레스 받는다고 느끼는 일들을 할 때마다 그것을 깨어 있음의 도구로 삼는다.
열정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깊은 즐거움을 느낌과 동시에 목표와 비전의 요소가 더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즐거움에 구조적 긴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어느 정도 더해져서 열정으로 바뀐다. 열정에 의해 연료를 공급받은 창조적인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엄청난 강도와 에너지가 동반될 것이다. 당신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리고 그 여행을 즐기는 화살처럼 느낄 것이다. 열정의 강렬함은 스트레스와는 관계가 없다. '지금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더 많이 원할 때, 당신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즐거움과 구조적 긴장의 균형이 깨지고 뒤의 것이 압도하기 때문이다. ...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하는 일은 반드시 질과 효율성이 떨어진다. ... 스트레스와 달리 열정은 에너지 진동 주파수가 높기 때문에 우주의 창조적 힘과 공명한다. 에머슨이 "열정 없이는 어떤 위대한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한 이유이다. 열정enthusiasm이라는 단어는 '안'을 뜻하는 en과 '신'을 의미하는 theos에서 유래한 말이다(내재하는 신, 즉 내 안에 신을 둔다). 열정은 창조적 에너지의 물결을 불러들이기 때문에 당신은 다만 그 '물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된다.
온유한 사람은 에고가 사라진 사람이다. 자신의 본질인 '의식'에 깨어난 사람이며, 그 본질을 모든 '다른' 사람들, 모든 생명 형태들 속에서 알아본 사람이다. 그는 '전체'와 '원천'과 일체감을 느끼며, 그것에 순응하는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자연을 포함해 이 행성의 삶(생명)의 모든 측면을 변화시키는 깨어난 의식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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