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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브라질

브라질 해돋이 농장: 공동체에 대해, 빗속 도끼질, 마지막 밤 (여행 276-277일째)

2017년 4월 20일 목요일

[1] (오후 2시 14분. 주방 식탁에서 일기를 쓰는 중. 루이스가 고치고 있는 전기톱에서 기름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온다.)

시몬과 ‘공동체 생활’에 대해 많은 대화를 했다. 시몬은 어렸을 때 스위스의 바이오다이나믹스(Biodynimics) 공동체에서 자랐는데, 그곳에는 인도 등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시몬에게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에 대해 물어보니, 몇 개의 웹사이트를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이상하게 생각했던 소뿔이나 석영증폭제, 부엽토, 물 휘젓기 등에 대한 체계적이고 상세한 정보가 있었다. 특히 인도 웹사이트가 좋았다. 한국에는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시몬이 이곳 ‘해돋이 농장(Chácara Sol Nascente)’에 정착한 지는 (2011년부터 시작해) 만 6년이 되었다고 한다. 노년이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그것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를 통한 안전망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연금이 있긴 하지만 무척 적단다.)

시몬은 이곳에서 낯설고 다양한 사람들과 생활하면서도 엄청난 인내와 너그러움을 발휘한다. 나 같았으면 규율 따위를 정해서 거기에 맞지 않는 사람은 모두 쫓아내려고 했을 것 같은데, 시몬은 그런 게 없다. 여기서는 누구도 대장이 아니다.

공동생활은 개인이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방식대로 사는 것과는 다르다. 공동생활에는 희생이 요구되고, 그렇기에 희생(sacrifice)은 신성한(sacred) 것이다,” 라고 시몬은 생각한다. 

또 그런 면에 대해서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동양문화’에서 온 나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 했다. 

커플이 되면 이기적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공감했다. 내 사람, 내 연인을 우선적으로 챙기고, 배타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라지의 자유분방한 사랑’에 대한 놀라움을 얘기하며 함께 웃었다. 나는 그라지를 심판하는데 시몬은 사랑한다고 한다. 대단하다. 

[2] (오후 8시 12분.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옴.)

화장실에서 신음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라지와 프랑코가 함께 샤워하면서 성행위를 하는 소리다. 지미와 라일라(그라지의 아이들)가 바로 여기에 앉아 있는데! 또 그라지와 다니엘(몇 주 전 그라지의 연인)의 관계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린 아들 지미는 어젯밤 엄마한테 버림받고 혼자 소파에서 자다가 울면서 루나 방으로 갔었다.) 


2017년 4월 21일 금요일. 비.

[1]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몸에 때가 새기고 옷이 더러워지듯, 마음에도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짜증의 생긴다. 하지만 아침에 공동체 사람들과 서로 인사하고 껴안을 때는, 마치 ‘영혼의 샤워’를 하듯, 마음 속 미움의 때가 씻겨 나가며 사랑이 샘솟아 행복해 진다. 생각해보면 큰 축복이다. 여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처럼 마음이 맑고, 자연을 사랑하고, 어디든 맨발로 돌아다니고, 나무에 오르고, 채식과 차와 악기연주를 즐기는 순수한 사람들을 어디서 또 만날 수 있을까. 

[2] 아침부터 비가 오다가 그치다가 하더니, 한창 벌목 작업을 하는 중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물을 머금어 무겁게 몸에 달라붙는 윗도리를 벗고, 도끼질, 톱질, 밧줄 당기기, 나무 손질을 하는데 시간이 참 안 간다. 나무가 깊숙이 파일수록 정확한 지점에 도끼날을 찍는 게 어려워, 쇳덩이가 자꾸 빗맞으면서 손에 아릿한 진동을 준다. 한참동안 빗속에서 수백 번, 수천 번의 도끼질을 하고 있는데도 점심 벨이 울리지 않는다. 신발은 빗물을 잔뜩 먹어 무겁고, 빗줄기에 노출된 몸은 덜덜 떨린다. 매분 매초가 힘겹다.

[3]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비에 흠뻑 젖은 가련한 생쥐 신세였다가,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맛있는 점심으로 배를 채우고, 커피까지 마시고 있으니 정말 좋다는 것이다. 아, 좋다.

[4] 해돋이 농장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시몬, 프란체스코, 엔지를 제외하고) 다들 마을 바에 간다기에, 화기애애한 송별식 분위기를 기대하며 따라갔다. 하지만 현실은 시끄러운 음악과 춤, 당구, 담배 냄새와 소시지 따위였다. 한국에서 많이 느껴본 끈적끈적하고 텁텁하고 뿌연 기분이다. 도망친다. 많이 해 본 도망이다. 그렇게 밤길을 홀로 걸어 조용하고 컴컴한 텅 빈 집으로 돌아왔다. 화장실에선 아기고양이 나비가 바닥에 고인 물을 마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