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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브라질

브라질 해돋이 농장: 벼룩, 부활절, 연극 (여행 266-272일째)

2017년 4월 10일 월요일

비가 온다. 먼 하늘에서 번개가 번쩍번쩍 거리더니 비가 온다. 어제도 오더니 오늘도 온다.

지금은 停電. 번개가 치더니 결국 정전이다. 꼬마 아이들은 무섭다는 듯 소리 지르고 난리를 부리지만 실제로는 즐거운 것 같다.

밤새 긁적긁적 벼룩에 시달려서인지 아침부터 침울했다. 이불을 털다가 하나 이상의 벼룩 시체를 발견했다. 침대보에는 잠결에 때려잡은 모기가 피를 잔뜩 묻히고 죽어 있었다. 모기와 벼룩. 침울하다.

칠레에서 바텐더를 하던 우아하고 예쁜 루나(Luna). 농장에서 누군가와 로맨스가 생겨야만 했다면 그 대상은 루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루나의 얼굴이 달랐다. 무슨 벌레에 물렸는지, 음식을 잘못 먹어서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 한쪽이 팅팅 부어서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아침 모임 시간에 심각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엊그제 별자리 얘기를 하다가 루나와 나의 결혼 얘기가 나와서, 속으로 ‘뭐 나쁠 것도 없지―’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쑥 들어갈 만큼 얼굴이 망가져 있었다. 그런 생각을 들키기라도 할까봐 평소보다 루나에게 더 잘해주게 된다. 그러면서도 ‘나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구나―’ 생각이 든다.


2017년 4월 11일 화요일

남부 브라질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아침에는 춥지만 그만큼 공기가 맑고 투명해서인지 하늘이 아름답다. 동쪽에서 붉은 빛의 해가 뜨는 동안 서쪽에서는 하얀 달이 떨어진다.

풀밭에 자리를 펴고 제시카와 요가를 하면서 청명하고 공허한 하늘을 본다. 요가를 하면서 잡생각을 한다. 

아... 이제 에코, 퍼머컬쳐, 자연, 요가, 새로운 만남, 여행 모두 충분히 즐겼다. 더 보고픈 것도 없고 경험하고픈 것도 없다. 한국에 돌아가 어떤 지루한 직장에 다니는 것도 문제없다. 사랑이 식은 듯, 마음에 열정을 일으키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이룩할 무언가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저 친구들과 치킨이나 뜯고 싱거운 술이나 마시면서 떠들고 싶다. 맛있는 과자를 먹으며 게임이나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열정이 가득한 척 메시지를 보내 잘 곳을 구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지내면서도 괜히 떠나고 싶고 멋대로 하고픈 마음만 드니, 역시 모든 것은 마음가짐 나름이구나. 이를 어찌할꼬.


2017년 4월 12일 수요일

(생략)


2017년 4월 13일 목요일

(생략)


2017년 4월 14일 금요일

(생략)


2017년 4월 15일 토요일

오늘은 아침부터 배가 꺼지지 않아, 모처럼 저녁을 안 먹고, 모기장 안에 들어와 벼룩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노란 긴팔 옷에 붙어 있는 빛나는 갈색 점들. 그 중 하나가 공중으로 도약하는 것을 눈으로 보니, 이제야 ‘무언가가 옷 속을 기어 다니는 듯한 간지러운 느낌’이 상상이 아니라 실재라는 것을 믿겠다. 

심각하다. 이렇게 벼룩을 달고 어찌 카우치서핑을 한단 말인가. 벼룩을 다 옮길 텐데 어디 호스텔이라도 가겠나? 러시아와 불가리아에서는 고양이들과 매일 한 침대에서 자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고? 

밤새 긁고, 또 밤새 (옆 사람이) 긁는 소리를 듣고... 열심히 긁기라도 해야 벼룩이 그 매서운 손톱에 긁혀 죽을 줄 알았건만, 긁어서는 죽지 않을뿐더러 더 간지럽게 될 뿐이란다. 오늘부턴 꼼짝없이 참아야겠군.

모임 시간에는 초콜릿 계란 만들기, 부활절 토끼(Easter Bunny) 그리기, 연극 연습을 했다. 그리고 루이스(며칠 전 새로 온 남자) 차를 타고 이웃 농장에 우유를 사러 다녀왔다. 하지만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머릿속에는 벼룩 생각뿐. 벼룩이나 좀 어떻게 되었으면!


2017년 4월 16일 일요일 (부활절)

아, 시간이란. 시간이란 참으로 신기하군. 길고, 짧고, 무한하고 영원하면서도, 순간처럼 깜빡이고. 하여 이제 주말도 지나갔고, 한 달 반이 지나갔고, 일주일 후면 나는 여기에 없겠구나!

오늘은 부활절.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던 연극 공연이 있었고, 초콜릿과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었고, 신나게 춤도 췄다. 춤을 추다가, 그라지와 프랑코는 언제 눈이 맞았는지 입을 맞추고 있다. 정말 빠르군. 

프랑코는 일주일 전에 온 아르헨티나 남자인데, 8년째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단다. 일할 때는 뺀질거리고 먹을 때는 엄청 먹어서 어처구니가 없을 때도 있지만, 헤헤 웃는 얼굴을 보면 미워할 수 없는 친구다. 오랜 떠돌이 생활 덕인지 잡지식이 많다. 각종 식물의 이름, 효능, 재배법 등에 대해 빠삭하다. 내가 벼룩 때문에 고민하자 대처법을 가르쳐 준 것도 이 친구였다.

프랑코는 연극 <메르헨(Das Marchen, 괴테 환상동화)>에서 ‘램프를 든 노인’ 역할을 맡았는데 그 역과 너무 잘 어울렸다. 뱃사공을 맡은 루이스도, 도깨비불을 맡은 제시카도, 릴리 공주를 맡은 라일라도, 왕자를 맡은 실베도, 초록뱀을 맡은 그라지도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관객 한 명을 앉혀 놓고, 다들 진지하고 훌륭하게 연기를 했다. 라일라는 하얀 드레스를 입었고, 실베는 멋진 망토를 걸쳤고, 독수리인 나는 검정색 날개와 깃털을 달았다.

유일한 관객이었던 여성은 도시에서 온 교수님이었는데, 교수님이 식당에서 강의하는 시간도 있었다. 

인간에게는 오감(五感)이 아닌 12개의 감각이 있다는 얘기, 교수님의 할머니는 나이가 100세인데, 오래된 나무처럼 단단하면서도 새로운 것이 계속 자라난다는 얘기, 음식을 먹을 때는 식물의 뿌리부터 줄기, 잎, 꽃, 열매, 씨까지 모두 먹는다는 얘기, 향료는 우리의 기분을 좌우한다는 얘기, 우유와 물은 땅의 피라는 얘기, 요거트(박테리아)는 몸에는 좋지만 정신에는 좋지 않다는 얘기 등 흥미진진한 얘기를 잔뜩 해 주셨다. 

얘기를 들으며 타로카드를 새로 만드는 공상에 빠졌다. ‘흡혈인, 사진가, 교사, 농부, 나무꾼을 추가하자. 흡혈인의 정방향은 무엇을 의미하고 역방향은 무엇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