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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브라질

브라질 펠로타스: 루이스, 제시카, 공동묘지, 흑마술 (여행 278-279일째)

2017년 4월 22일 토요일

[1]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계속 두드리기에 일어나 바지를 올리고 문을 빼꼼 열어보니 지미다. 쉬를 싸게 하고 내보낸 후, 다시 문을 닫고 보던 일을 마저 본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짐을 싼다. 그동안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팔찌들을 가방에 묶는다. 그 순간, ‘내가 지금 원하는 건 그저 팔찌나 만드는 건데,’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날 아침은 맑다. 저 멀리 아름다운 능선도 보이고, 풀밭에는 햇살이 반짝이고, 주방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풍긴다. 집에 가는 건 아니지만, 오랜만에 집에 가는 듯한 기분이다.

[2] 아침 먹고, 점심 먹고, 간식 먹고, 저녁 먹고, 모든 사람들과 하나하나 작별을 하고 난 뒤, 오후 8시가 되어서야 루이스의 콤비를 타고 농장을 떠난다. 펠로타스(Pelotas)로 가는 일행은 제시카-A(아르헨티나), 제시카-B(브라질), 루이스, , 이렇게 네 명이다. 덜컹거리는 콤비 뒷좌석에 앉아, 말없이 시간의 흐름을 지켜본다. 듣기로는 두 시간 거리라고 했는데 더 오래 걸리는 것 같다.

[3] 펠로타스에 도착한 후 먼저 제시카-B의 집에 들렀다. 제시카-B에게 침대 매트리스 하나를 빌려 콤비에 싣고, 루이스네 집으로 갔다. 와, 亂場판이다. 난장판인 집을 대강 치우고 나니 자정이 다 되었다. 제시카-B에게 빌린 매트리스를 구석에 깔고 누웠다. 루이스와 제시카-A는 콤비에서 뜯어온 간이침대에서 같이 누웠다.

농장에 있는 동안, 루이스와 제시카-A 사이에 뭔가 생기긴 했지만 연인관계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둘이 같이 누워버리니, 나는 기분이 참 거시기 했다. 급속도로 이루어진 커플의 오붓한 잠자리를 훼방 놓는 不請客이 된 것 같아, ‘제시카-B네 집에서 잤으면 좋았을 텐데,’하고 아쉬워했다.


2017년 4월 23일 일요일

[1] 아침에 제시카-A가 루이스에게 같이 샤워를 하자고 해서, 나는 또 다시 기분이 거시기 해졌다.

농장에서는 이런 적이 일절 없었기에 상당한 충격이었다. 특히 제시카-A는 농장에 있는 동안 수시로 나에게 다가와 껴안거나 입맞춤하고 가는 경우가 있었기에, 이런 행동이 잘 납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원래 너희들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2] 해가 높이 떠오르면서 妙하고 불편한 끈적끈적함은 사라졌다.

다 같이 근처 빵집에서 햇살을 맞으며 버터빵과 커피를 먹고, 집으로 돌아와 요가를 했다. 

루이스는 대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가 끝난 후에는 집이 완전히 새로워졌다. 화장실, 주방, 침실, 식당 겸 거실, 앞뜰, (구아바, 바나나, 레몬, 고추 등이 자라고 있는) 뒤뜰이 포함된 이 모든 공간의 월세가 관리비를 포함해 350헤알(당시 환율로 약 12만원)이란다. 정말 싸다.

[3] 오후에는 다시 제시카-B와 합류한 후, 공동묘지에 갔다. 특이한 共同墓地였다. ‘관(棺) 아파트’라고 할 수 있겠다. 목욕탕 신발장처럼 쌓인 5단 관 수납장이 3층 건물에 빼곡이 들어서 있었고, 이런 건물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석판(묘비)에는 고인의 이름과 生沒年月日 외에도, 좋아하는 축구팀 로고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축구가 삶과 죽음의 문제인 것이다.

‘관 아파트’ 구역을 벗어나니, 비슷한 5단 구조물들(‘관 빌라’)이 단층으로 세워져 있었다. 

더 오래된 구역으로 가니, 웅장하게 장식된 개별 묘지(‘관 주택’)들이 있었다. 18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 노예제도가 있던 시대의 사람들이 묻힌 무덤이었다.

거기서 더 넘어가니, 풀이 무성하게 자란 구역(‘관 빈민촌’)이 나왔다. 여기에서는 부서진 석관, 파헤쳐진 무덤과 그 속의 유골, 석판 조각, 黑魔術 인형과 魔法陣(거꾸로 뒤집혀진 별)을 볼 수 있었다.

[4] 묘지를 구경한 후에는 시내로 나와, 샌드위치 재료(토마토, 양상추, 빵, 바나나)를 사서 공원에서 팝콘과 함께 먹었다. 아주 맛있었다. 

공원에서 슬랙라인(slackline)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이야기를 하고, 몇 번 해 보다가 떨어져서 왼팔과 발가락을 다쳤다. 아프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부상이다.

[5] 해질 녘에는 바닷가에 갔다. 노을 속을 들락거리는 어선과 낚시꾼들이 보였다. 바람이 제법 차가웠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놀이를 했다. 루이스는 혼자 사라졌다. 제시카-B에게 물어보니 '새우 튀김빵(pastel de camarão)'을 사먹으러 갔단다. 그러면서 루이스가 오면 이렇게 말하란다, “Estava bem, pastel de camarão? (타바 벵, 파스텔 데 카마롱? - 새우 튀김빵 맛있었어?)"

바닷가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길, 콤비 뒷좌석에서 제시카-B는 위드를 꺼내 피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돌렸다. 혼자서만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6] 저녁에는 제시카-B의 친구인 ‘마티아스’를 만나러 갔다. 친환경 공법으로 아무것도 없던 맨 땅에 멋진 나무건물을 짓고 정원을 가꾸어 놓은 친구다. 제시카와 마티아스는 TED에 나왔던 어떤 남자(부자였는데 시스템에 환멸을 느껴 모든 걸 버리고 거지가 되었다가, 다른 차원에서의 부자가 됨)의 강연을 들으러 갔다가, 뒤풀이로 간 술집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마티아스는 영어를 아주 잘했고, 내가 우루과이로 간다고 하니, 몬테비데오에서 만날만한 사람들을 추천해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순간 솔직한 심정은, 나무건물도, TED도, 몬테비데오도 아니었다. 뭔가 먹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아쉽게도 마티아스네 집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7] 밤에는 ‘축구 바(soccer bar)’에 갔다. 아저씨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며 축구 경기를 보는 곳이다. 

여기서 우리 일행들과 위스키를 한 잔씩 마시고(몸이 따뜻해져서 좋았음), 1리터짜리 맥주 두 병을 나눠 마셨다. 오늘 하루의 권태, 피로, 허기, 무기력이 알코올 반응에 의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졌다. 

축구경기는 勝負차기까지 이어졌고, 축구팬 아저씨들의 환호와 탄식 속에서 마지막 승부를 가리는 선수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솔직히 이 팀이 지는 것을 바라고 있어. 여기 사람들 반응을 너에게 한 번 보여주고 싶거든,” 루이스가 나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패배의 순간, 술집은 완전한 정적과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이어진 消滅. 모든 손님이 소리도 없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 사람들에게는 축구가 삶과 죽음의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