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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러시아

러시아 타타르스탄 헬프엑스: 과일줍기, 사포질, 아이들 (여행 41-44일째)

2016 8 28 러시아 연방, 타타르스탄 공화국, 슈키예보(Сюкеево)


[등장인물]

보바(블라디미르): 헬프엑스(Helpx) 호스트. 일본 담배 회사 영업 사원. 올가의 남편.

올가(올렌카):헬프엑스(Helpx) 호스트. 가정 주부. 블라디미르의 아내.


1. 아침 다섯시 반 정도면 벌써 날이 밝아 눈이 떠진다. 더 자고 싶기도 하고 일어나고 싶기도 한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누워있자면, 고양이들이 이미 일어나 오래된 나무 바닥을 돌아다니며 만드는 삐걱삐걱 소리가 들린다. 나도 조용히 일어나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나닌다. 내 방에도 올가와 보바 방에도 문짝이 안 달려있어서 사람들을 깨울까 조심스럽다.

차가운 바깥 바람을 쐬고 들어와 고양이들을 만져주며 주방에 앉아 있으면, 올가가 나와서 커피를 끓이고 아침 음식을 차려준다. 

2. 우선 올가를 도와 요리를 한다. 팬에 식용유를 바르고 밀가루 반죽을 얇게 부어서 익히다가 뒤집으면 팬케이크 만들기 끝. 삼사십개 정도 만들어서 바레니아(varenye, 러시아식 잼), 연유, 크림치즈 같은 것을 찍어 먹는데 아주 맛있다.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항상 내가 가장 많이 먹는다.  

3. 블라디미르는 일을 하러 나가고, 나는 공사중인 실내의 파이프에 하얀색으로 페인트칠을 한다. 아주 쉽다. 페인트칠이 끝나고 나서는 나무 의자에 니스(바니쉬, varnish)칠을 새로 하기 위해 나무 표면을 사포로 벗겨낸다. 처음 사포는 잘 듣지 않아서 시간이 한참 걸린다. 중간에 사포를 새 것으로 바꾸니 훨씬 잘 되지만 그래도 시간이 걸리는 건 마찬가지. 의자 하나에 한시간 정도씩 한 것 같다. 의자의 다리 한 쪽 부터 시작해서 가운데 부분과 등받이 부분까지 나무 조각 하나하나를 문지르며 시간이 흘러간다. 

사포질을 하는 손이 계속 움직이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깜빡 깜빡 과거의 장면들과 무작위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에 관련된 기억들이 연달아 연상된다. 의식적으로 관련된 기억을 더듬을 때도 있고,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기억들이 불쑥불쑥 표면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여행을 하며 매일 새로운 장소에 가고 새로운 일을 겪을 때는 안 그랬는데, 같은 장소에만 있어서 그런지 어렸을 적에 하던 오래된 게임들이나 영화 생각도 난다. 정말이지 명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포질 명상을 하다가 종목을 바꿔서 한참 동안 서양자두(plum)를 줍는다. 무릎 높이까지 자란 풀들을 밟아 눕혀서 바닥이 잘 보이게 한 다음, 단단하고 벌레먹지 않은 것만 골라 줍는다. 오래 전에 나무에서 떨어져서 쭈글쭈글하게 말라버린 것, 개미가 벌써 구멍을 파고 들어간 것, 물컹물컹한 것들은 걸러낸다. 풀에 손이 긁히거나 거미줄이 붙거나 벌레들이 기어 올라올까봐 조심스럽지만, 생각해보면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4.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 식사 후 설거지를 한다. 

그토록 바래왔던, 머리 아플 일 없이 단순 노동을 하는 생활인데(채식이 아니라서 아쉽지만) 벌써부터 지겹고, 떠날 마음이 생기는 건 왜일까. 어떤 농장이나 목장에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천국에 있건, 지옥에 있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하겠지. 벌써부터 밤에 별을 보러 밖으로 나가는 것도 귀찮구나.

2016 8 30 

5. 오늘도 서양자두 줍기 명상과 사포 명상을 계속한다. 한 시간, 두 시간, 계속해서 사포질을 하면서 생각은 과거로 흘러가 잊혀졌던 진실을 발견하고, 머릿속으로는 이미 책을 여러 권 쓰고 있다. 이 시간 속 생각의 흐름이 자동으로 기록된다면 힘들이지 않고 글 한 편이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약간의 피곤함(힘이 드는 건 아니지만 일을 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밥 시간만 기다려지는 지루함)을 견뎌낸 후에는, 샤슬릭(shashlik)이라고 하는 러시아식 바베큐 시간이 있었다. 원래는 주말에만 술을 마신다는 올가와 보바가, 오늘은 타타르 공화국 국경일이라며 평일인데도 술을 마신다. 보바가 맛있는 양념을 발라 꼬챙이에 꿰어 구운 돼지고기를 먹으며, 실제로는 혀가 이 기름진 고깃덩이를 맛있어 한다는 생각에, 묘한 죄책감과 쾌감이 뒤섞인다.

도끼로 장작을 패며 화로에 나무를 집어 넣고, 모닥불에 둘러 앉아 대화를 나눈다. 원래 계획했던 2주보다 더 오래, 러시아 체류기간이 만료되는 60일 동안 머물러 달라는 올가와 보바의 부탁, 그리고 에너자이저처럼 일을 열심히 한다는 칭찬에 며칠간 쌓인 피로와 권태감이 살살 녹아내린다. 그래 잘하고 있다.

2016 8 31 

6.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올가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었고, 덩달아 나도 할 일이 없게 되었다. 할 일을 찾아보다가, 어제 사포질 하던 의자를 마무리한다. 어디서 얻어 온 의자라는데 의자의 안쪽에 제조한 회사의 각인이 있다. 블라디미르가 각인을 조사해 약 200년 전에 만들어진 의자라는 것을 밝혀냈다. 200년 된 의자를 수리해서 쓰는 모습, 아직까지 소비주의에 물들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한국의 대형 폐기물 스티커가 붙어 있는 버려진 가구들이 비교된다.

7. 창고에 있던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려고 했으나, 자전거 상태가 안 좋아 그냥 걷기로 한다. 마을 입구까지 걸어 갔다가 돌아오는데,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얘는 뭐지?'하는 눈으로 보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금방 시선을 피하고 지나간다.

길가에 버려진 고장난 자동차에 사람 머리 두 개가 보인다. 아이들이 차 안에서 놀고 있었다! 하하. 여자아이가 손을 흔들길래 나도 손을 흔든다. 아이들이 귀여워 사진을 찍고, 다시 손을 흔든다. 슬슬 차를 지나쳐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이들이 차에서 나와 뛰어온다. 뭐라고 러시아어로 말을 하는데, 나는 못 알아듣지. 서로 뭔가 반갑고 소통하고 싶은데 말은 못 하니까 그저 셋이서 쳐다보고 서 있는다. 쉬운 영어로 "What's your name?"이라고 물어보자 남자아이가 또렷한 발음으로 "My name is Dmitri(내 이름은 드미트리에요)"라고 대답한다. 그리 풍부하지 않은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간 후에는 드미트리가 영어를 못하는 어린 여동생에게 나와의 대화 내용을 알려준다. 같이 사진을 찍고, 드미트리가 집으로 뛰어가서 가져온 종이에 이메일 주소, VK(러시아 소셜네트워크), 이름 같은 것을 적어 준다. 이 아이들과 만나고 나서는 러시아에 있으면서 러시아어를 못하는게 너무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듀오링고(Duolingo) 앱을 다운 받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꿈꿔왔던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과일따기... 실제로 해보니 무지 지루하고 시간도 잘 안 갔지만 수북히 쌓인 과일을 보니 기분이 좋다.


과일을 다 줍고 땄다고 일이 끝난게 아니다. 하나하나 배를 갈라서 씨를 빼 줘야 한다. 서양자두(plum)는 생긴 것과 크기가 매실과 비슷한데 색깔이 예쁜 보랏빛이고, 속도 자두와 비슷하다.


하루는 바레니아(varenye, 잼)를 잔뜩 만들고, 다른 하루는 컴포트(kompot, 러시아식 쥬스)를 만들었다. 재료는 똑같은데 설탕과 물의 비율로 잼이 되거나 쥬스가 된다. 쥬스와 잼을 담기 전에 유리병은 깨끗히 씻고 물을 약간 담아 전자렌지에 돌려 소독하고, 뚜껑들도 냄비에 담아 팔팔 끓는 물에 소독한다.


모기는 없었는데 파리가 무지 많아서 주방에서 밥을 먹을 땐 20여 마리가 음식에 달라 붙고는 했다. 올가와 보바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살충제로 대대적인 파리 소탕을 몇 번 했는데, 다음날이 되면 파리들은 다시 불어나 있었다.


사포질을 끝낸 후, 진한 나무색으로 새로 니스칠한 의자들.


올가와 보바네 집 뒷뜰에서 본 떡갈나무(oak)와 창고 건물


풀 뜯어먹는 고양이


샤슬릭(러시아식 바베큐)을 준비하는 중



200년 된 의자를 새로 칠하기 위해 구석구석 사포질을 한다.


의자 안쪽에 새겨진 각인. 이 각인을 통해 의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밝혀 냈다.


침대는 고양이 차지


파란 하늘 아래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시골길 풍경




드미트리와 여동생


너무 예쁜 시골의 아이들